Zurich, Switzerland.
2012년 10월
갑작스레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이번 주에 스위스에 가요. 만날 수 있을까요?」
아, 그러니까 이것은 올해 초- 홍콩인인 친구 C가 일하는 취리히에 놀러 갔을 때의 일이다.
***
당시 취리히로부터 기차로 약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에 거주하고 있던 나는 모처럼의 외출에 굉장히 신이 나 있었다. 그날은 취리히에서 일하고 있던 친구 C와 함께 밤새도록 신나게 놀기로 약속한 날이었고, 한껏 들뜬 나는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기차를 타고 취리히로 향했다. 그녀의 근무처는 도심 중앙에서도 약간 떨어진 중화풍 레스토랑이었는데, 테이크아웃을 주력으로 하는 곳답게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나를 반갑게 맞이한 C는 한 시간 정도 후에 근무가 끝난다며 리벨라(Rivella) 한 병을 몰래 냉장고에서 꺼내 주고는 카운터로 돌아갔다. 나는 약간 구석진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읽으며 그녀를 기다렸다.
약간은 따갑게 느껴졌던 초봄의 해가 지기 시작하고, 각종 중화풍 요리가 산처럼 쌓여있던 푸드 트레이도 바닥을 보일 무렵 레스토랑 문을 열고 동양인 남자 한 명이 들어왔다. 큰 키가 눈에 띄어 자연스럽게 눈이 갔던 그는 카운터에 있던 C에게 주문을 하고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나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나는 그제야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언뜻 봐도 190은 될 것 같은 키. 약간 검게 그을린 피부에 어울리는 단단한 체격, 수염을 깎지 않아 약간 까슬해 보이는 얼굴. 나이는... 잘 모르겠다. 스물 후반에서 서른 초반? 그런 생각을 하며 그를 살피는 사이에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나에게 걸어와 곧장 인사를 건넸다. 한국어였다.
아- 한국분이셨구나.
푸드 트레이에 있지 않은 메뉴를 주문한 그의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냥 그런 이야기 - 이름은 뭐고, 몇 살이고, 무슨 일을 하고, 왜 여기에 왔고-(그는 방콕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한다고 했다.) 우리는 음식이 나오고서도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고, 마감시간이 다 된 C가 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할 때까지 그 이야기는 이어졌다.
내일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그를 배웅하기 위해, 우리 둘은 가게를 나와 나란히 근처의 기차역을 향해 걸었다. (C는 가게 마감을 끝내고 기차역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레스토랑 안에서 쉴새없이 대화를 나눴던 아까 전과는 달리, 그는 걷는 내내 말이 없었다. 다만 기차역에 다와서야 딱 한 마디, 아쉽네요, 라고 할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장난스레 그럼 같이 놀러 갈래요? 라고 묻자,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내가 변명할 새도 없이 그는 역시 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빙긋 웃으며 그럼 인연이 되면 언젠가 또 봐요, 하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
그 후 두 달 정도 지났을까. 그를 만났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 채 나의 작은 도시로 돌아온 어느 날이었다. 근무를 마치고 초 저녁부터 달콤한 잠에 빠져있는 사이 수상한 번호로 부재중 전화 두 통이 와있었다. 잠에서 깬 내가 비몽사몽간에 스위스식 보이스피싱인가 하고 있는데, 곧이어 C에게서 문자 몇 통이 날아들었다.
「너 저번에 우리 레스토랑에 온 한국인 남자 손님 기억해? 그 남자가 다시 찾아왔어! 네 전화번호 좀 가르쳐줄 수 없겠냐고!」
태국에 있어야 할 사람이 이곳에 있다니,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답장을 하려던 차에 부재중 수신전화가 생각났고, C로부터 문자가 이어졌다.
「한두 시간 전에 찾아와서 네 번호 달라길래 줬는데, 네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 하더라? 방금 찾아와서 네 이메일 주소 받아갔어. 조만간에 연락할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의 신상정보를 왜 함부로... 일단은 알았다고 C에게 답장은 했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그때 한번 본 게 다인데, 왜 내 번호를 묻는 거지? 그것도 이제 와서.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그에게 이메일이 왔다.
자기를 기억하냐는 말을 시작으로, 출장차 근처의 어느 도시에 왔다는 것... 그때 같이 놀러 가지 못해서, 그리고 내 연락처를 묻지 않아서 후회했다는 것. 그래서 이제라도 연락처를 받아 기쁘다는 것, 하지만 오늘 저녁 방콕으로 돌아간다는 것까지...
짤막한 그 이메일에, 그와 함께 걸어갔던 취리히의 저녁 풍경이 스치듯 지나갔다. 나는 그 이메일에 짤막한 답장을 보냈고, 우리는 그렇게 이메일로, 그리고 아주 드문드문 문자로 연락을 하게 되었다. 날씨 이야기, 영화 이야기... 그냥 그런 이야기들.
그랬던 그가 대뜸, 이번 주에 이곳에 온다고 한다. 만나자고 한다.
그 문자에 머뭇거리던 사이, 곧이어 한 통의 문자가 더 날아들었다.
「보고 싶어요.」
그 순간 뜬금없이, 그를 만났을 때 내가 그를 알아볼 수 있을까 덜컥 겁이 났다.
그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그의 큰 키 정도. 그의 외모, 생김새, 심지어 분위기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름대로 시각 정보에 민감했던 나였기에, 그것은 꽤나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정작 선명하게 기억난 것은- 엉뚱하게도 그와 함께 별 말 없이 기차역을 향해 걸었던 10분 남짓의 시간이었다.
초봄의 알싸한 공기가 맴돌던 취리히의 밤거리, 모처럼 신은 새 신발의 굽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던 돌길, 스치듯 지나며 짤랑짤랑 소리를 내던 트램, 드문드문 밝혀진 가로등 불빛, 묵직한 쇼핑백을 들고 혹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하던 사람들... 그리고 그와 나. 너무 그림 같아서 이 모든게 거대한 연출이 아닐까 싶을만큼 작위적인 순간.
다만 그것은 우리의 배경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우리가 그 풍경의 일부였다.
그는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나와 같을까?
그 역시 서로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기억에 남은 풍경만으로 서로를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닐까? 흔히 말하는 '추억 보정' 같은 것으로, 서로 주고받은 글에 남은 모습만으로 서로를 기억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다시 만났을 때 서로 실망하지는 않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휴대폰을 손에 쥔 체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자고 일어나서 답장하자,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차라리 잠을 청했다.
다만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를 쓰면서.
***
2020년 9월
약 8년 전에 쓴 이 글을 발견하던 날, 나는 정말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솔직히 나는 이 사람의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도저히 믿기지 않아 지금은 사용도 않는 옛날 이메일의 '휴면'까지 풀어가며 이메일을 뒤졌다. 한참에 걸쳐 몇 페이지를 거슬러 올라가자, 위의 글의 4개월쯤 전부터 그와 주고받은 이메일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고 했다.
단 한 번만 만난 상대에게 올 지 안 올 지 모르는 연락을 기다리는 것이, 누군가를 향한 설렘, 떨림, 그리움, 기다림이 이렇게 애틋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전에는 미처 몰랐다고도 했다.
그 아래 나의 대답 역시 설렘이 가득했다.
나는 그의 지구 반대편에서 사는 이야기를 전했다.
서로의 이야기를 아낌없이 나누자고도 했다.
이런 감정을, 내가 느꼈다고?
기나긴 이메일의 타래의 끝에는 그가 메신저가 가능한 휴대폰을 장만했으니 앞으로는 메신저로 이야기 하자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내가 2012년부터 지금까지 휴대폰을 최소한 3번은 바꿨으니, 결국 글자로 남아있는 기록은 그가 다시 유럽에 오겠다고 한이메일, 그를 정말 만나고 싶었던 것인지에 대한 의문, 그리고 아주 약간의 반가움이 적힌 위의 글 뿐이다.
8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도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을 맺었는지 모른다.
풍경화에서 빠져나와 인물화 속 주인공이 된 나와 그가 언제 다시 만났는지, 어디서 만났는지, 아니, 애초에 만나기는 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과연 나는 그를 만났을까?
만약 그를 만났다면, 나는 왜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문득 이메일 속의 그에게 묻고 싶다.
기억나지 않는 귀하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소식을 전합니다.
2012년의 나는, 당신을 만났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