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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Aug 28. 2023

뒷담화의 단상

'나 아프다'는 속삭임의 변환기   

어느 날 문득 이런 상상을 해봤다.



새벽에 일어나 잠자리 들 때까지 나의 마음의 언어, 생각. 심지어 무의식과 의식을 오가며 떠오르는 모든 심상들. 그것을 타자기로 타이핑하는 비서가 있다면 어떨까? 나아가 그렇게 타이핑한 글들을 모아 책으로 모아 출판한다면 어떨까. 이 대목에서 '너무 좋을 것 같다', '할 말 다 한다니 속이 다 시원할 것 같네', '안 그래도 내가 까발리고 싶었던 건데 좋아',  '나도 한 성격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려주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까. 아니면 '창피하다', '끔찍하다' '절대 안 될 소리', '옛날에 매력적인 이성에게 품었던 은밀한 생각까지 다 들통나자나',  '나는 그 사람을 싫어하는데, 상사니깐 립서비스 했는데. 상사가 알면 안 되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까. 나는 이득보다는 손해가 많을 것 같아 출판하지 않을 것 같다. 특히 모든 등장인물이 실명이라면 더욱. 그 순간 브런치가 떠올랐다. 내가 오프라인에 몸을 담고 사는 동네 사람들이 아니라 브런치라는 외국에 가서 말을 한다면. 그것도 비실명으로. 그럼 좀 말해볼 만하지 않을까.


나와 같이 고민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의외로 꽤 많을 것 같다. 아니 모두가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이른바 매너와 경우가 꽤 밝은 2023년 대한민국의 교양시민이다. 직장에서고, 교회ㅡ참고로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정통 기독교인이다ㅡ에서고, 심지어 집에서도. 나는 할 수만 있으면 배려와 매너로 사람들을 대하려 애쓴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를 꾹 참을 때가 훨씬 많다. 하지만 본 매거진에서는 각 주제별로 이런 나의 고민과 고뇌의 흔적을 글의 형태로 드러내 나눠보고자 한다.


오늘 첫 번째 주제인 '뒷담화' 도 여러 각도에서 몇 번 조명해 보려 한다. 오늘은 봉사모임에서의 뒷담화다. 나는 유독 저항의식과 사회개혁적인 마음이 초등학교 때부터 남달랐던 것 같다. 그런 내가 어렸을 때부터 잘 용납이 안 되는 세상의 모습 중 하나가 어른들의 뒷담화였다. 나는 뒷담화는 가장 비겁한 자기 정치이며, 음흉하게 자기를 높이며 타인을 깎아내리는 야심이라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뒷담화가 일상이 된 사람들은 내 친구들 중에도 없고, 그런 분들과는 거리를 많이 둔다.






그런 나에게 올봄엔가 한 존재가 던져졌다. 한 봉사모임-어디의 봉사모임인지는 유추가능하리라 본다-에서 만난 B선배. 작년부터 그녀는 우리 모임에 동참하게 된 준신입이신 분이다. 그럼에도 선배라 지칭하는 것은 나이가 나보다 7년에서 10년은 많으실듯해서. 그런데 이 분이 처음에는 안 그러시더니 1년이 지나가자 사람들 뒷담화를 여기저기 흘리며 모임의 분위기를 이상하게 흐리는 거다. 그런 B선배의 야욕은 조용한 나의 세계에도 문을 두드렸다. 한 번은 모임의 일 때문에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또 다른 A선배에 대해서 건의라는 명분으로 계속 뒷담화를 하는 거였다. 나는 연신 그분이 그렇게 나쁜 분이 아니라고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게 두 분의 오해를 풀고자 진땀을 흘렸다. 1년간 지켜본 바로는 조심스럽지만 B선배는 천성이 워낙 이 사람, 저 사람의 뒷담화를 흘리는 분 같았다. 사실 A선배는 그 모임에서 중요한 위치에서 많은 역할을 담당하는 분이었고 나 역시 그 모임에서 다소 일을 많이 하고 있었다. 느껴진다. B선배는 A선배를 질투는 하는 것이었다. B선배는 입담과 정치성향은 좋으나 능력이 출중한 것은 아니고 특히 인격이 다듬어지지 않아. 툭하면 중년의 나이에도 곧잘 삐치고 별일 아닌 일에도 언성이 곧잘 올라가곤 했다. 그 모임의 교양 있는 기존 사람들은 그를 품어주고 덮어 주고 얼르고 달래느라 여태 큰 잡음 없이 지나갔다. 나도 그렇게 눈감아 주는 한 사람 중 하나였다. B선배는 나이로 봐서 그 모임에서 가장 연장자 중 한 명이었기에, 오래 봉사했다면 직분을 맡았을 수도 있는 연배다. 또 본인 딴에는 지난 1년 동안 열심히 했는데 1년이 지나도 본인이 만족할만한 그럴듯한 감투가 씌여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B선배의 뒷담화가 담고 있는 복잡하면서도 입체적인 그러면서도 심플한 동기. 같은 인간으로서 또 여자로서 이해가 되면서도 나의 남다른 의협심이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내가 의분이 일 때면 마음에 단어와 문장이 거품처럼 차오르는데, 순간 단어가 따발총처럼 내면에 차오른다. '와, 뭐야. 나잇값 좀 하지. 그리고 여기는 사람을 돕는 봉사모임인데, 이런 모임에 와서 세상 정치를 하다니. 샘 많아 질투하는 것 나도 그럴 수 있으니 이해가 되지만. 모임 분위기를 더 이상 흐리게 두어서는 안 되겠다'


그래 뒤에서 자기 세력을 펼치려는 속내 다 보이는 뒷담화는 더는 봐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지랖 넓게 A선배를 변호하다가, 이내 나에게까지 삐치고 말을 안 하시는 거다. '와, 유치원생도 아니고' 애들 용어로 이제는 나도 빡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재빠르게 나의 내면의 단어를 정정하려 애쓰는 나. "감정이 잘 이탈되고 조율이 안 되는 사람이구나, 이분 상처가 많으신 분 같다."라고. 나는 격분하려는 의협심을 다잡으며 그렇게 나의 감정을 순화해서 기술하려 애쓰는 내 안의 다른 감정들과 씨름했다. B선배는 그 후부터 자기의 말에 전적 동의해 주지 않는 나에게 서운함을 드러냈다. 심지어  B선배는 이번에는 나에 대해서 뭔가를 말하고 다니는 눈치였다. 그냥 눈치가 그랬는데, 팩트는 일일 리 알아보고 싶지 않았다. 나까지 어둠에 물드는 것 같아서.  



그리고 어느 날 큐티를 하면서, B선배가 남들을 뒷담화를 하면서 스스로도 자각할 자책감과 그럼에도 그것을 고수하는 그의 질투심 아래 있을 아픈 내면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이분은 아픈 거다. 어려서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지 못 했거나. 이전투구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에 많이 노출되어 정치가 익숙해진 게 아닐까. 생각은 하염없이 길어지다, 나는 이미 B선배에게 카톡의 커피쿠폰을 선물로 발송하고 있었다. 선물이라 쓰고 나 혼자 몰래  '내가 좀 더 기다려 볼게요'라고 읽으며. B선배는 그 후에도 성향이나 태도가 여전했다. 그는 바뀌지 않았으나 내가 바뀌었다. 의협심과 격분에서 긍휼과 이해로. 나의 마음은 다시금 평화를 회복했고, 전투 가득한 곳곳의 전장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두 손을 모으곤 한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기독교 서적의 책제목 중 <무례한 기독교인>(리처드 마우, IVP)이 있다. 그리고 나는 사실 <무례한 기독교인> 대한 저항의식이 큰 기독교인이기도 하다. 이른바 교회 내 내부고발자. 그러나 교회 안에서도 대놓고 비판하거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교회나 직장, 가정 어디서고 비판자들을 얼래고 달래는 중재자 이른바 피스메이커(peacemaker)에 더 가깝다. 즉 나는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고 포용하고 원수를 사랑하자를 실천하고자 애쓰는 진영의 사람이다. 그럼 나의 저항의식은 어떻게 해소하냐고요? 진짜 해야 할 말은 절대자(하나님)에게 한다. 큐티로 기도로. 그렇게 쌓이고 쌓인 단어와 문장, 장문들은 정말 거대한 산에 이른다. 내 멘토가 늘 말했듯, '입에 파수꾼을 세우고 되도록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성숙의 지름길이다'라는 말에 전적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대목에서는 공론화해서 나누어야 할 대목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브런치를 통해서나마, 이 부분에 대해서. 그간의 내가 묵히고 묵힌 사연들을 조금씩 공유하면 좋겠다고. 물론 내 속내를 적나라하게 타이핑하듯은 못 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브런치 매거진 <마음의 주소 feat큐티>는 그런 이유로 오픈한다.  단순히 기독교 큐티 나눔이라기보다. 직장, 가정, 교회, 사회에서 느껴왔던 문제의식, 나의 저항감을 내면으로만 묵혀 놓았던 주제들을. 내가 개인적으로 어떻게 치유하고 설복하고 스스로를 자책하고 다듬으며 성장하려고 애쓰는지. 마음 성장기의 관점에서 봐주면 좋겠다. 기독교에 반감이 있거나 종교가 지루하다 느끼는 분들은 본 매거진은 너그러이 또 과감히 Skiip 해 주길  바란다. 이 매거진에서는 오프라인에서 볼 수 없었던 나의 면모를 만날 수도 있다. 즉 조금은 정제되지 않고 순화되지 않은 뾰족뾰족한 단어들도 나올 수 있다. 나의 마음을 타이핑하는 비서가 여과 없이 대필해 줄 때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뿐 아니라 우리 내면의 단어일 수 있기에 안심하고 기술해 본다.








#아래 큐티는 B선배에 대한 답답함이 고조되던 시즌에 묵상했던 내용이다. 참고로 큐티 본문의 성경구절은 내가 임의로 정하지 않고 그날의 큐티책에 이미 정해져 있는 순서를 따른다.



[생생큐티] 2023년 5월 15일(월) 더 넓은 시각으로(창세기 50장)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세기 50:20)     


아버지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요셉은 이제는 애굽(이집트)의 이인자인 총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요셉에게 행했던 자신들의 악한 죄에 대해서 죄책감과 형벌감이 밀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복형들인.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어렸을 때. 질투심에 아버지 몰래 요셉을 노예로 팔고는 아버지에게는 동생이 죽었다고 거짓말했다. 상세스토리는 성경 창세기를 참조) 형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비춰볼 때, 요셉이 자신들을 증오하고 어떻게든 처벌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다만 아버지인 야곱에게 효심이 지극한 요셉이기에 당장은 자신들을 벌하지 않아 왔다고 인간적인 추측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아버지인 야곱이 죽은 것입니다. 형들은 오래 묻어 두었던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벌벌 떨었습니다. 그렇게 속으로 끙끙 앓다 요셉에게 희한한 전갈을 보냅니다. 이 또한 꾸며낸 말인데, 야곱이 죽기 전에 요셉에게 그들의 형들의 죄를 용서하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작위적이고 유치하고 어이가 없기까지 한 조작이지만, 요셉은 보이는 형들의 조악한 행위들을 주목한 것이 아니라 죄의 형벌로 살아왔을 그 내면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러자 형들은 여전히 미숙하고 인간적이지만 그들의 인생이 불쌍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형제가 온전한 화해를 이룸을 다 누리지 못하고 가셨을 아버지 야곱에 대해서도 회한이 밀려 들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이에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웁니다.


   

그리고 요셉 앞에 나타나 자신들을 총리가 된 동생 요셉의 종으로 자처하는 형들에게 말합니다. 19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요셉은 형들의 두려움과 인간적인 생각에 하나님을 각인시켜 줍니다. 이 모든 일이 그저 형들과 요셉 사이에서 벌어진 인간적인 해프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있었음을 주목하도록 돕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단순히 용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고자 목양적인 도움을 줍니다. 그것은 수십 년 전 요셉이 꿈을 꾼 꿈과 같이, 그는 이 야곱 가정의 목자와 같은 위치에서 형들을 돕고 또한 이스라엘 가문과 애굽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사람을 악인과 선인, 훌륭한 인격자와 미숙한 인격자 등 이분적으로 나눠서 보려는 저의 인간적인 선입관을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로 대하기를 원하시며, 그 은혜를 전하기 원하십니다. 그가 겉모습과 됨됨이가 어떠하든 그가 구원받고 변화되도록 그를 돕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적인 정의와 나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사사로움 감정에 매여. 겉으로는 대놓고 척을 지진 않았지만 마음으로 정죄하고 멸시하고 그들이 호되게 훈련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올해 잘 풀릴 것 같던 직장의 프로젝트들이 엎어지고 연기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저의 내면상태를 돌아보고 교정하며 관계회복에 나서도록 푸시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일을 잘해 성공하는 것보다 어디에서도 그 모임과 사람들 속에서 목자의 심정을 갖고 중보자요, 제사장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돕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을 회피하고 고집 피웠던 마음을 내려놓고 인간적으로 무례하며 심지어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들을 뒷담화하며 흠집을 냈던 꺼려지던 한 분. 그분에게 카톡선물을 주며 소원했던 관계를 회복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나는 빨리빨리 직장일이 잘 되기를 바랐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로 더 크게 잘 되게 하기 위하여 잠시의 장애물과 어려움을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제가 성령 하나님의 세미한 책망과 충고에 바로 엎드리며, 바로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물꼬를 잘 받아 누리는 자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변화되어 쓰임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뜻을 늘 마음에 새기며 날마다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우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후기: 신기하게도 그후 직장일에서 한 프로젝트를 필두로 잭팟이 터졌다. 난 기복신앙을 기피하기에, 기복을 기대한 건 전혀 아니였으나. 직장일이 저절로 풀리는 순적함 속에서 혼자만 아는 내적 씨름에 대한 무언의 격려가 느껴졌다.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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