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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Sep 02. 2023

나의 약함은 나의 자랑이요

허영의 시장에서 길을 잃던 어느 날...


중학교 1학년때인가.

동네에 사는 A 친구의 집에 놀러 갔다.

그 친구와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많이 놀았는데, 학년이 올라가면서는 좀 소원해졌던 터였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때까지 시험 전에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정확히는 공부는 해야 하지만 가난해서 참고서 살 돈도 없는 데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술에 취해 들어와 난동을 부리고 밤에 잠을 못 자게 하는 아버지. 그 덕에 공부를 안 해도 누구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실은 누군가 공부를 하도록 푸시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가족 모두 각자의 수고와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할 각자의 신음에 7남매의 여섯째인 나까지 챙길 여력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초등학교 5학년때 공부를 잘 못했다는 얘기를 장황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당시 초등학교에는 한 학급당 학생수는 50명~55명 정도였는데, 난 시험 전에 거이 공부를 안 해도 다행스럽게도 20등 안에는 들었다. 운 좋으면 14등도 하고.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 때 절친의 권유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손에서 놓았던 아니 놓으려 했던 내 인생을 주섬주섬 추려 잡았다. 마음 잡고 공부를 시작했고 그해 말 반에서 5등으로 졸업했고 중학교 1학년때는 반에서 2등을 했다.


A친구는 그 소문을 어디서 들었는지, 나에게 공부비법을 배우고자 오랜만에 자기 집으로 호출한 것이다. 내 기억에, 조숙했던 나보다 조금 더 조숙했던 그 친구. 공부비법을 잘 전수했냐고요? 무슨. 그냥 놀다 왔다. 근데 그날도 이 친구가 참 조숙하다 느꼈던 대목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연예인을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너는 어떤 연예인 좋아해?"

"좋아하는 연예인 없어"

"정말?"

"연예인이 뭐가 멋지다고 다들 그러는지. 무대에서야 화려하지. (무대) 조명만 꺼지만. (다음 가수 나와야 하니깐) 급하게 무대에서 내려와야 하는 거야. 그게 연예인의 삶이야. 카메라만 꺼지면 초라해."


세상에나. 중학교 1학년 학생이 이런 통찰을 갖고 있다니. 아니 통찰은 있어도 그것을 자신의 세상으로 흡수해서 가치관과 의사결정을 하고 있다는데,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당시 나로서는 코페르니쿠스적 충격이었다. 사실 나도 꽤 조숙했던 아이라. 이 친구가 느끼는 느낌이 얼핏 느껴졌지만. 그것을 확신하고 입 밖으로 내기가 주저되었다. 또래 친구들 중에는 그런 생각을 감히 하는 이들도 없거니와. 학년이 올라갈수록 연예인 매니아들이 많았던 터라. 이런 발언은 그 친구들을 은근히 무시하고 그들의 결정을 어리석다 비하하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날 내가 신선한 충격과 질투에 가까운 감동을 받았던 것은. 이 친구는 이런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른바 My way를 자기결정하며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중학교 1학년 나이에 이미.






먼 훗날 어른이 되어서 다시 만난 그녀. 근데 오히려 그녀는 세상에 좀 더 익숙해져 있는 모습이었다. 다수가 가는 길을 저항하던 야성은 무뎌지고 맞벌이에 고된 워킹맘의 일상이 묻어났다. 어렸을 때 내게 놀라운 카리스마적 신념을 설파하던 친구. 그녀는 더 이상 세상에 저항하지 않는 듯했다. 일상적으로 늘 볼 수 있는 '그 사람' 중 하나로 살아가는 모습. 나의 작은 연예인이 일반인이 된듯한 서운함과 아쉬움이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안심이 되었다. 세상에 과격하게 저항하다 이리저리 부딪혀 다치고 무너졌을지도 모르니깐.


거대한 세상에서 다수가 가는 길에 "왜? 꼭 그래야 해"라는 질문을 하기가 어렵다. 더더군다나 저항하려면 나만의 내적인 힘이 있어야 한다. 내 안의 세계가 단단하며 뿌리가 깊어야 한다. 그런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세상에 부딪히려 하면, 내가 갈팡질팡하거나 작은 벽 앞에서도 무너지기도 하고 심지어 크게 다치기도 한다.  


존번연의 <천로역정>은 내가 세 번 이상 읽은 책이다. 1678년에 출간된 후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진 책으로, 참 통찰력이 있는 스테디셀러이다. 그 책에 보면 허영의 시장이 나온다. 세상의 화려한 스펙, 얼짱, 직장, 자격증, 어학점수, 연봉, 집평수, 학벌...  그리고 먹고 마시고 멋부리고 떠벌리는 그 무엇. 사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나는 이런 허영의 시장 때문에 내가 지향하는 가치관과 세계가 크게 흔들린 적은 다. 내가 20대 때 대학생선교단체에서 탁월한 현인 같은 멘토나 선배들을 만나 좋은 영향을 받은 덕도 있지만. 그전부터 내게 중학교 때 깊어진 신앙의 뿌리에 기초한 가치관과 세계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종교인이 아니라면 각자 자기만의 배의 닻이 있을 것이다. 거대한 세상의 조류라고 해서 모두가 다 좇아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물론 나는 업무상 화려한 스펙과 경력의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또 나도 예전보다는 여러모로 삶의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이 세계가 주는 허영의 함의에 의미없이 휩쓸리지는 않는듯 하다. 오히려 식자층, 기득권, 나름 세상적으로 잘 나가는 분들이 나에게 묻는다. 종종 화려한 세계와 접속하면서도 여전한 나의 오롯함의 비결에 대해서. 마치 먼옛날 A친구가 공부의 비법을 물어왔듯.


물론 이런 나도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지만, 허영의 시장으로 대변되는 세상의 화려함 앞에 스스로 너무 초라하고 비참하다 느꼈던 감정의 동요는 꽤 있었던 것 같다. 청소년기나 20대때 남들은 한창 영어점수, 자격증, 여러 스펙들을 끌어 올리는데 집중할 그때. 나는 학과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나머지 상당한 시간을 봉사 등 비영리적인 영역에 시간과 물질, 힘을 쏟았다. 남들은 성공을 향해 치열하게 살아도 살아남을까 말까 하는데, 이렇게 이타적인 삶을 살아도 될까. 잠시 마음이 어려웠던 날들. 오늘 공유할 아래 큐티는 그런 어느 날 묵상했던 내용이다. 비법이라 이름하기에는 너무 거창하고, 누구나 매일 감당하는 소박한 한 인간의 내적 전투라 명명하고 싶다.


어제 퇴근길에 한 CCM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다. <나의 약함은 나의 자랑이요>라는 곡이다. '늘 쓰러지나 다시 일어남도... 나의 아픔은 나의 영광이니'. 노래가사를 꾸욱꾸욱 눌러 는데, 차창 밖을 향하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흔들리고 쓰러질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는데 존귀한 위엄이 있는 것이 또한 인생이다.






CCM_나의 약함은 나의 자랑이요


참 고마운 친구 나의 예수님

나는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으나

때론 낙심해도 포기치 않음은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에


내 삶의 동행자 나의 예수님

나는 기대가 없는 어린 나귀 같으나

늘 쓰러지나 다시 일어남도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에


나의 약함은 나의 자랑이요

나의 실패는 나의 간증이요

나의 아픔은 나의 영광이니

그 부르심 따라 내가 걸어갑니다


나 가난함은 나의 상급이요

나 미련함은 나의 자랑이요

나 쓰러짐이 나의 고백이니

그 부르심 따라 내가 걸어갑니다


그 부르심 따라 그 부르심 따라

그 부르심 따라 그 부르심 따라



가사 발췌 출처: 나의 약함은 나의 자랑이요 - YouTube






#나는 국내기업, 외국계기업, 강사 등 다 해보았지만. 정말 내 몸에 맞는 내 옷이 없는 것 같아 고민이었다. 그러다 10년 전 우연인듯 필연처럼 헤드헌팅업으로 이직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맨땅에 헤딩하듯 적응하고 발버둥 치며 3년 차 때 썼던 큐티이다.

당시 고등학교 동창들은 금융권에서 이미 억대연봉을 받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나는 전혀 새로운 분야로 이직해서 처음부터 기초를 다지며 성과를 내느라 정말 하루하루가 너무 지치고 힘들었다. 그때 썼던 큐티 거이 그대로 공유한다. 참고로 전도서는 비종교인들도 많이 애독하는 성경이다.



[생생큐티] 2016년 12월 5일(월) 하나님의 손에서 오는 즐거움(전도서 2:18-26)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26a)  

    

죄 아래 태어난 인간은 그의 태어나고 살아지고 죽어가는 전 과정이 참으로 허무하고 무익하게만 보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 또 풍요로운 것을 쌓아도 죽으면 수고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주고 허무하게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와 사망권세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과 영생의 영향력 아래 있는 인생에게는 똑같은 삶의 패턴이고 수고이지만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인생의 모든 수고에는 필연 영육의 고됨과 고통을 수반합니다. 오늘 말씀의 전도자는 이러한 수고에 대해서 전반부에서 실망하였던 이유는, 그것이 결국 헛되이 한 수고가 되어 심지어 큰 악의 하나로 분류되기 때문입니다.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을 위해서 애쓰고 힘쓴 인생의 허무는 실은 하나님 앞에서 볼 때 그 허무성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23절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일평생 근심하며 생존을 위해서 때론 더 많이 쥐고자 수고하나 그 마음엔 족함이 없고 슬픔뿐이며, 그의 마음은 밤에도 쉬지 못하니 이것도 참 헛된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이 땅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도와주는 안전장치가 있는데, 그것은 지혜, 지식, 희락입니다. 이 땅의 삶이 유한하고 우리에게 죽음과 심판이 있음을 각성토록 하시는 지혜와 지식이 더 가치가 있고, 잠시 사는 이 땅의 삶 속에서도 희락을 누릴 수 있음이 하나님의 복이요, 은혜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가치 있는 것은 지혜, 지식, 희락이라는 점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부귀영화나 이 땅을 사는데 좀 더 편한 안락이나 풍요를 더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의 관점에서 인간에게 무엇이 더 가치 있고 헛되지 않는가라는 관점에서 더 유용한 것을 주시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저는 연말을 맞아 내 나이에 비해 해놓은 것이 없는 자신이 좀 대책이 없어 보이고 이게 맞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제가 어렸을 때뿐 아니라 제 인생의 황금인 청년의 때, 지금까지 그 기본 지류를 흐르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 지식, 희락을 덧입는 기간이었음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결코 허망하게 보낸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100% 의미 있는 일에만 내 인생을 보냈다고 할 순 없지만. 그 결국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성장하고 구원과 영원의 관점에서 신중, 통찰, 사려 깊음, 혜안을 덧입는 기간이었기에 의미가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지금껏 이런 본류를 세우는데 내 인생을 살아왔다면 이젠 부차적인 세상에서의 필요를 쌓아간다는 마음으로. 여유과 기대감, 희망으로 이 땅의 삶을 영위해 나가기를 기도드립니다. 사단은 자꾸 저로 조급하게 회의적으로 마음을 갖게 합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 위해서 보냈던 시간과 수고, 물질 등의 값진 가치를 생각지 않고 계속 겉으로 드러난 그 무엇을 남들과 비교하고 주눅 들고 움치려 들게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내 필요를 누구보다 아시고 그분이 주시고자 하면, 하나님의 때에 내가 구하는 이상을 채워주실 분임을 믿고 신뢰합니다. 제가 연말 얻지 못한 것보다 더 많이 채워주셨던 보이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는 복된 인생을 구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이 땅의 삶들이 복되고 의미 있는 그래서 구원과 영생의 관점에서 나와 가족, 이웃, 인류에 헌신되는 삶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 전도서 2:22-26 >

22.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25.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26.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마음의 주소 feat 큐티_다음 예고편 목차 초안>

직장 다니면서 글을 쓰기가 쉽지 않네요.

브런치에 일주일에 1~2편 이상 쓰는 것으로 자기 약속을 해봅니다.

본 매거진에서는 사이다 사색이 비중이 있을듯 합니다.

문제의식을 따뜻하게 풀어갈 예정이오니 안심하셔요. 


0.상처 입은 꼬마리더_말씀대로 죽다 살아난  

0.종교 언어, 그 존재의 가벼움 

0.고지론 vs 저지론 

0.무엇때문에 바쁘세요?

0.새부대엔 새 포주를 

0.뭣이 중헌디_파워 블로거 리더 

0.틈새에 방치된 이들 

0.아프니깐 더 찌르는 이들 

0.듣고 싶은 이야기_엔터테인먼트의 등판?

0.듣고 싶은 이야기_오직 말씀

0.듣고 싶은 이야기_치열한 절대 고독의 시간

0.듣고 싶은 이야기_성경 본문에서 멀어져가던 리더가 

0.듣고 싶은 이야기_간증 

0.주변인의 시각(1)배달노동자

0.주변인의 시각(2)속앓이 교회 거래처

0.주변인의 시각(3)청소어르신 

0.주변인의 시각(4)비종교인 가족

0.자기 아픔에 침몰하는 배 

0.나의 드라빔이 된 신 

0.차별적 친절_편가르기

0.차별적 친절_반대급부

0.차별적 친절_빈부격차

0.차별적 친절_역할놀이

0.종교스펙의 빛과 그림자

0.영적 사관학교들의 고뇌

0.내면의 십자군 처단

0.친절의 폭력성

0.직장에서 종교인의 두얼굴(1)

0.직장에서 종교인의 두얼굴(2)

0.노총각 김팀장의 히스테리

0.끼리끼리에 신이난 그녀들

0.출근시간에 지각생이 독실하다?

0.흘리고 다니는 리더 

0.이중언어의 교묘한 덫 

0.젊은 기독교인들의 회의 

0.젊은 기독교인들의 갈증

0.젊은 기독교인들의 침묵 

0.비기독교들의 성토

0.비기독교인들의 오해

0.비기독교인들이 듣는다_택시

0.비기독교인들이 듣는다_교회 갈 길이 막혔던 차에

0.비기독교인들이 듣는다_실망에서 이해로 

0.비기독교인들이 듣는다_매력적인 기독교 

 

          ....


(그외 틈틈히 주제 선별하고 있어요)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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