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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Sep 06. 2023

천재 의사의 해물찜 치료법   

건강한 자에게는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는 것은?

천재가 저번주 뜬금없이 주말에 해물찜 먹으러 가자 말했다.

집순이, 집돌이인 우리는 밖에 나가 외식을 잘하지 않고, 데이트할 때는 천재 집에 가서 주문 배달해서 식사할 때가 많다.

그때가 브런치에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란 글을 쓰고 아버지의 알코올중독과 가정폭력의 기억이 되살아나,

내색 않고 혼자서만 끙끙거리며 기분이 꿀꿀했던 날이었다.


예전에 내가 천재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난 우리 엄마가 너무 좋아, 자녀들을 진짜 잘 돌보는 것 같아. 가령 내가 학교 갔다 집에 돌아와 힘들어 하면 왜 힘든지 꼬치꼬치 캐묻지 않아.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침울하게 혼자 있는 기색이 보이면 그날 저녁 메뉴에는 어김없이 내가 좋아하는 김치찌개나 오징어국 등이 나와. 그리고 어머니가 해주는 전혀 비싸지 않지만 맛있는 요리를 먹으면 금세 마음이 풀리곤 했어."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로 인해 심신이 지친 자녀들을 오롯이 그녀의 방식으로 따뜻하게, 아주 아늑하게 양육해 주셨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그것은 극심한 전쟁터에서 피어난 장미꽃처럼 신비로운 모성이었다.

어머니는 공부하라, 이거 해라 잔소리가 일절 없는 분이셨다.

어머니는 우리의 말을 경청했고 심지어 비언어적 표정과 행동까지 조용히 또 유심히 읽고 경청했다.

우리 마음을 잘 다독여준 분이셨다.

덕분에 7남매 모두 중간에 방황들은 있었지만,

크게 비뚤어진 사람 없이 건강한 시민으로 잘 살고 있다.






저번주 옛날 생각으로 꿀꿀한 나에게 천재는 일절 아무 말 없이 거금을 들여 해물찜을 사주었다.

그곳은 십수 년간 천재가 그의 어머니와 단골로 다니던 유명한 해물찜 집이었다. 천재의 어머니, 그분은 몇 년 전 암으로 돌아가셨다.

나와 천재가 인연이 된 것도 어쩌면 어머니 암과 소천 때문이기도 했다. 천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거이 폐인으로 지냈다.

지성적이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부재는 천재에게 너무도 큰 상처였다.





해물찜 주인은 천재를 알아보았고 너무 오랜만이라며 반가워하셨다. 천재는 주저하듯 이내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일이 있어 몇 년간 못 왔다고 했다. 우리는 어색한 잠깐의 고요를 해체하듯 바로 젓가락을 들었다.

우리는 거대한 산처럼 쌓여있는 해물찜을 먹기 시작했다. 너무 맛있었다, 마음의 신음과 고통이 잠시나마 녹아내리는 듯했다.


천재는 내가 무엇때문에 침울한지는 몰랐지만

내가 해물찜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날 천재와 나는 그렇게 엄마의 손길 같은 해물찜을 먹으면 서로를 다독였다.   





# 아래 큐티는 저번주 옛날 기억으로 끙끙 앓으며 마음이 부어 오른 그때 묵상한 내용입니다. 이미 다 완치되었는 줄 알았는데, 아직 상흔은 조금은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묵상을 통해 아린 마음들이 해소되었어요.





[생생큐티] 2023년 9월 1일(금)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마가복음 2장)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가복음 2장 17절)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불치병 중풍병자, 돈병 세리 레위, 위선병 바리새인 등 다양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병이 낫는다는 것을 앎에도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이 세부류의 사람들만 생각해도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오기까지 장애물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고, 돈병 세리 레위는 종교사회인 이스라엘서 출교를 당해 왕따를 당하는 위치에 있었고, 바리새인은 아예 자신이 병든 것도 몰랐습니다. 몸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자기는 아프지 않다는 착각과 무지 때문에.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병고침 받을 기회를 놓칩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의 명성은 가히 BTS보다 더 열광적인 것이었습니다. 호스피스에서 죽음을 앞둔 병자, 불치병 심지어 온갖 귀신 들린 사람, 죽은 자까지 살린다는 명성은 가히 전설적인 명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조차 섣불리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병이 오래된 사람들은 거듭된 좌절과 실패로 인해 체념과 절망이 큽니다. 오래 병을 안고 살면서 의술을 안다는 전문가들을 찾아다녀봐도 고침 받지 못한 병들. 그 병을 예수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고친다는 전설 같은 루머는 와닿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허황된 소문에 괜스레 희망을 품고 갔다가 또 낫지 못하면 어쩌나. 희망을 품었는데, '혹시나'가 '역시나' 가 될 거듭된 실망과 좌절이 싫어 나아가기 힘들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중풍병자가 그랬습니다. 그는 낫고 싶지만 아예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어떤 희망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는 육체의 질병이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열렬한 우정이 그를 살렸습니다. 네 명의 사람들이 이 중풍병자를 낫게 하고자 메워 가지고 예수님께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워낙 사역을 왕성하게 하신지라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곧 다른 마을도 가실지 몰랐습니다. 즉 중풍병자가 자기 순서를 기다리다가는 인생 최대의 기회를 놓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중풍병자는 혼자 거동을 할 수 없는 데다가, 친구 4명이 생업을 포기하고 방방곡곡 예수님의 동선을 계속 좇아 다닐 순 없었습니다. 오늘, 지금이 그들이 놓쳐서는 안 되는 절호의 기회,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낫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과 예수님은 고치실 수 있다는 신뢰와 믿음. 중풍병자와 친구들을 움직인 간절한 동인은 소원과 믿음, 이 두 가지였습니다.       


친구들은 중풍병자 친구의 그간의 고통스러운 세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자살충동에도 시달렸을지 모르고 폐인에 준하게 망가져 가는 그의 모습에 함께 아파했을 것입니다. 그랬던지라 친구들은 거이다 왔는데 사람들이 많다는 이유로 이렇게 손 놓고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풍병자 친구들은 창의적인 도전을 합니다. 4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예수님 계신 집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서 그 아래로 누운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상상만 해도 가히 엽기적인 상황입니다. 고매하신 예수님이 잠잠히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지붕에서 흙덩이가 떨어지고 호러영화처럼 사람이 들것에 묶여 위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당황하며 얼굴이 불그락 푸느락하며 욕설이 나오기 직전이고, 상식적이지 않은 이 상황에 불쾌감과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십니다. 이어 11절-12절 a “내게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중풍병자 친구들의 비상식적이고 무리한 행태를 판단하기보다. 그들의 애끓는 심정을 보았습니다. 중풍병자의 병에서 낫고자 하는 처절한 소원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거두절미하고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육체의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그의 죄의 병을 먼저 고쳐주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5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죄에 대한 용서 즉 죄사함인 것을 잘 알았습니다.      


인간이 고통스러운 것은 죄 때문입니다. 정신과에서는 정신병의 90% 이상이 죄의식이라고 합니다. 죄의식은 범법자인 가해자만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를 오랫동안 증오하거나 스스로 자학하는 등 내면적으로 엉킨 감정의 모든 뿌리에는 죄가 있습니다. 인간은 성품이 성자 같은 사람일지라도 원죄-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죄-을 갖고 태어나 늘 죄에 고통하고 신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사람들도 많이 못 만났던 중풍병자가 무슨 죄를 지었을까요? 그는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원망하고 늘 이렇게 질병을 달고 살아야 하는 자신의 인생을 저주했을 것입니다. 돈도 못 버는데 병원비나 축내는 자신의 무가치함에 절망했고 그런 자신을 부담스러워하고 때론 대놓고 바퀴벌레 대하듯 핀잔과 욕을 해대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미워하고 복수심이 들끓었습니다. 죽는 게 낫다며 자살 시도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중풍병자는 생각의 죄를 짓고 살았습니다.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육체의 병보다 실은 죄로 인한 마음의 병, 생각의 병이 더 컸습니다. 이런 중풍병자는 육체의 나음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죄 사함을 얻고 구원받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저는 제 인생을 돌이켜 보면, 몸은 중풍병자가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마음이 중풍병자와 같이 될 때가 있었습니다. 요즘은 이 영적인 중풍병이 많이 나아졌지만 초등학교 때는 나의 가정환경과 인간조건을 비관하며 절망하고 저주하며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에 달고 살았습니다. 특히 초등학교 5학년때는 매일 하루에 최소 1번에서 서너 번씩 “차라리 죽고 싶다”를 혼자 읊조렸습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환경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6학년 때 교회에 나가고 중학교 2학년 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서 저는 조금씩 서서히 변화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원망하고 가난을 부끄러워하며 나의 생명을 저주한 것이 죄인 것을 알고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환경은 동일한데 중풍병자처럼 매일 드러누워, 혼자 마음으로 원망과 불평, 저주를 일삼던데서. 돈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친구의 도움을 얻어 독서습관, 일기 쓰기, 편지 쓰기 등을 연마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 첫 단추가 지금의 나를 만든 단초가 되었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내 저주스럽고 수치스러운 가정환경과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병나음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를 진정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영적인 중풍병, 마음의 중풍병인 것을 아시고 그것을 오랫동안 수술하시고 환부를 케어하시며 치료해 주셨습니다.      


제가 이 예수님을 매일 잘 누리며 또한 나와 같이 영혼과 마음에 중풍병이 들어 고통하고 방황하는 이들을 도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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