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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Sep 13. 2023

질투의 화신

 마음의 문을 찾습니다  feat. 백성공주 vs 신데렐라

나는 어렸을 때 디즈니 만화영화에 대한 열렬한 팬이었다.

신데렐라, 백성공주, 숲 속의 잠자는 공주 등 해피엔딩의 주인공들을 만화로 만날 수 있다니. 그 당시 우리 집은 가난해서 동화책으로 겨우 볼 수 있었던 이야기 속 주인공들. 그들이 손발이 움직이고 표정을 지으며 대사를 치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 가슴이 뛰었다. 작년에도 다이소에 갔다 마침 디즈니 만화영화 관련 스티커 세트가 있어 냉큼 여러 개 샀다.  


근데 나도 나이가 드니깐. 그 주인공들 각자의 입장을 한걸음 더 들어가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백설공주를 괴롭혔던 계모 여왕이 실은 신데렐라였다면? 우리의 동심을 너무 망가뜨리는 기괴한 스토리 전개일까 조심스럽지만 허구의 스토리를 풀어 본다. 


신데렐라는 막판에 유리구두 덕에 결국 왕자를 만나 결혼까지 골인했다. 그런데 그 왕자가 그만 말을 타다 떨어져 일찍 죽고 말았다. 때마침 신데렐라를 눈여겨 보았던 옆에 설국나라의 왕이 그녀를 위로하다 가까워졌다. 마침 그도 홀아비였다. 그에게 백설공주라는 딸이 있는 것 빼고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때까지 신데렐라는 자기 나라에서 가장 예쁜 여자였다. 그러나 재혼해서 설국나라 가서 얼마잖아 현타가 왔다. 남편의 의붓딸에 대해서, 그저 예쁜 딸 하나 생겼다 편하게 생각했던 터이다. 그런데 막상 백설공주를 보니 그 아이는 예뻐도 너무 예뻤던 것이다. 게다가 왕은 재혼의 단꿈도 잠시 온갖 정신을 백설공주 뒷바라지에 올인하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설국나라 온 백성과 신하들은 백설공주의 어머니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 백설공주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하늘을 찔렀다. 백성들이 백설공주를 환호할 때면 자기를 왕비로 인정할 수 없다는 속삭임으로 들렸다. 신데렐라는 설 자리를 잃은 듯 존재감이 점점 없어져 가며 심각한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  

바닥에서 입지전적으로 성공한 공주 신드롬의 주인공이었던 신데렐라. 그녀는 혼자 궁궐 자기 침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신 안에 전에 없이 무서운 감정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더 이상이 착하고 불쌍한 신데렐라가 아니었다. 계모와 언니들 밑에서 구박 받으며 살았기에, 백성공주의 마음과 형편을 더 잘 헤아리고 보듬을 수 있으련만. 미워하면서 배운다고, 더 지독한 계모로 돌변한 것이다. 바로 "질투"라는 바이러스가 신데렐라의 심장을 정조준해 타격한 것이다.




신데렐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백설 공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나의 동심에 흠집을 내는 것 같아, 상기 내용은 허구이지만 두 번 보고 싶지 않은 스토리이긴 하다. 그러나 질투란 온 인류의 오랜 동지이며 적이다. 한 명도 빠짐없이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양쪽을 오가며 겪어 봤을 녹이 슨 고성의 감정이다. 누구나 내놓고 말하진 않지만 우리를 뿌리 깊게 관여하고 조종하고 있는 감정, 질투.


얼마 전에 모 블로그에서 때마침 질투를 극복하는 법에 대해서 쓴 글을 보았다.

많이 공감이 되어 아래 발췌해 본다.


질투 스스로 극복하는 방법


출처: 질투하는 심리와 스스로 극복하는 방법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우리 내면 깊이 엉키고 묶이고 무너지고 자학하고 미워하게 하는 감정은 비단 질투뿐이겠는가. 인간 내면에는 당장이라도 우리의 인생을 전복시킬 악한 감정의 씨앗이 하루에도 수십 번 들고 난다. 어떤 악한 감정은 잠깐 문을 두드리다가 내가 단호히 No 해서 지쳐 나가 떨어지기도 하고. 어떤 악한 감정은 나의 지극한 환송을 받으며 마음에 둥지를 틀고 부화한다, 또 이내 새가 되어 활개를 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날은 그 자유로운 새가 거대한 돌덩어리가 되어 내 삶을 파국으로 이끌 수도 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장 23절) 어쩜 이 오래된 성경구절은 우리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어렵고 고된 산행일 것이다.








# 아래 큐티는 저번주 묵상한 내용인데, 수시로 들어오는 어려운 감정들을 어떻게 보고 다루어야 할지 지혜를 얻는 시간이었습니다. 너무 몰입해서 큐티를 하는 바람에 좀 장황하고 긴데, 시간 있으신 분들만 보시길 권해드려요.




[생생큐티] 2023년 9월 7일(목) 마음의 문지기(마가복음 7장)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가복음 7:21-23)     


안과 밖. 세상에는 안과 밖으로 나뉘는 것 천지입니다. 집안과 집밖을 합쳐 집 안팎이라고도 합니다. 옷의 안감과 바깥 천. 몸의 안과 바깥. 지하철 바깥과 지하철 안쪽. 공동체의 바깥의 아웃사이더와 공동체 주류의 인사이더. 더 나아 핵인사라는 신조어가 생겨났습니다. 안과 밖은 필연적으로 세상의 사물이 갖고 있는 형식의 본질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 몸의 안과 바깥처럼 기능의 차이일 수 있고. 공동체의 안과 밖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구분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 사람의 마음에도 안과 밖이 있을까요? 잘 생각해 보지 않은 개념인데, 오늘 말씀에서는 마음 자체가 안과 밖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서 들어가고 나오는 것이 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마음에도 어떤 지점에 문이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마치 건물의 안과 밖을 그 문이 경계 짓듯.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과 나오는 것에도 경계선이 있다고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 마음의 문 곧 마음으로 들어가고 마음에서 나오는 경계선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형상화된 어떤 지점이 아니라 우리 삶 자체 같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뿐 아니라 표정 짓고 존재적으로 표현하는 모든 정적인 영역까지. 우리의 삶은 마음을 드러내는 문지기와 같습니다. 성경에서는 이에 대해서 그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낸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지점에서 한 가지 트릭을 씁니다. 곧 내가 마음의 문지기를 조작할 수 있다는 안일하면서도 교묘한 트릭 말입니다. 물론 트릭을 다 나쁘다고 할 순 없습니다. 좋게 말하면 기술이나 솜씨, 재능으로까지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마음속의 그 무엇을 숨기고 은닉하고 포장하려고 트릭을 쓰는 대부분의 이유는. 마음의 어두움을 감추고 속이고 포장하기 위한 것이라는데 있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단연 내가 실제의 나보다 더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평가 받으면 되는데, 왜 이런 작위적인 포장, 치장에 우리는 힘을 쓰고 때로는 목숨을 걸듯이 달려들까요? 교만과 허영, 허세, 욕심, 인정욕, 성공욕 등 그 또한 죄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있어서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인간은 모두 죄인이고 날마다 죄에 노출됩니다.      


그럼 나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포장하고 치장하는 것이 다 나쁠까요? 오늘 말씀에선 인간의 마음에 가득한 것이 온갖 죄들이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마음의 오물인데, 그 마음의 오물들을 만나는 사람마다 있는 그대로 쏟아내는 것이 맞을까, 그 또한 답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책망하시는 대목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인간의 매너나 예의를 질책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그것을 남 탓, 환경 탓, 세상 탓을 하며 마음의 죄를 고집하는 것. 그 교만과 완고함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입니다. 그들이 자기 마음을 때마다 씻고 새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곧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가장 씻고 변화시키기 원하는 마음의 죄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 씻는 등 사람들 눈에 보이는 것에 치중합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당시 살던 중동지역은 사막지대로 모래 먼지가 많기 때문에 손과 발을 잘 씻는 것은 위생과 건강상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 공동체의 개인과 사람들 사이에서 이것이 습관이 되고 하나의 전통과 예의가 된 것 같습니다. 그건 잘 하는 일이라 치더라도. 이렇게 손 씻는 문제에 과민하고 민감하고 열심일 정도라면 마음 씻는 문제도 열심이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손 잘 씻는 문제로 타인들을 정죄하고 본인은 우월감을 가지면서 정작 예수님에 대한 질투, 살의, 거짓, 모략 등 더 더러운 오물의 죄들은 아예 깨닫지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신들이 손을 잘 씻는 사람이라는 자기의 와 사람들의 칭찬 때문에 마음을 씻지 않아도 명성과 존경, 칭찬을 받고 살 수 있다며 영적 포만감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손은 점점 하얗게 깨끗해지는 반면 방치된 마음에는 교만과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  온갖 죄가 씨에서 발아하고 자라 목구멍을 뚫고 나오는 지경이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죄를 숨길 수 없는 상태. 인간 내면의 죄가 홍수처럼 댐에 가득 차 넘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마음 밖 곧 말과 행동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더 이상 인간 의지와 예의로도 교묘하게 포장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유대인의 전통을 명분 삼아 예수님의 제자들을 질책한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좋은 전통을 좇지 않는다고 쓰고. 실은 예수님이라는 혁명적인 존재가 기득권층인 자신들의 죄와 허물 곧 마음에 가득한 악을 들추는 것에 거부감 아니 격노할 불쾌함과 분노를 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종교는 자신들의 밥벌이이고 종교적 명예가 그들의 자존심인데, 그 근간을 흔드는 것에 대한 위협을 느꼈습니다. 바리새인과 그들의 추종자는 현재 밥그릇 싸움, 자존심 싸움으로 예수님에게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우회하지 않고 사이다 돌직구를 날려 버렸습니다. 사랑 많으신 예수님께서 왜 유독 위선적인 바리새인과 그의 일파에게는 이토록 매너 없고, 심지어 상처를 주는 책망을 서슴없이 하시는 걸까요? 그들의 위선병은 웬만한 충격에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아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들 자신도 자기를 속일 정도록 그 두께는 나날이 두꺼워지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옳다는 생각, 잘 하고 있다는 생각, 누구의 책망이나 충고도 듣지 않으려는 영적 우월감은 가장 무서운 영적인 암이요, 이것을 영적인 문둥병-한센병-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감과 상처를 주기 위해서 이토록 적나라하게 들추신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라도 해야 죄에 무감각한 그들이 영적인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마음에 가득한 것이 죄이고, 그것이 사람들 눈에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관문’이 말과 행동, 표정, 존재적 삶 그 전반임을 돌아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말실수를 하거나 표정으로 불쾌감을 전달하는 그 모든 것이 그저 그럴 수 있는 수준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그 해당 죄들이 이미 내 마음의 댐에 홍수처럼 가득하여 넘실거리며 삐죽삐죽 나오고 있는 상태임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방치하면 그 삐져나온 말과 행동은 더 나아가 해치는 행동으로 발전합니다. 나아가 창과 검을 든 무력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습니다. 뉴스에 나오는 각종 범죄가 그런 극단의 결과물들인 것입니다.      


저는 뉴스에 나오는 온갖 범죄들이 실은 전혀 다른 타인의 일이 아니라 내 내면에서 매일 자라는 죄들의 장성한 모습임을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남몰래 꺼리고 은근히 낮추어 보거나 마음으로 배제하고. 불쾌해하고 겉으로 친절한 듯이 말하지만 속으로는 그 관계를 손절하려는 많은 일들. 물론 예수님도 위선병으로 더 이상 손 대기 어려울 때는 신발에 모래를 떨며 손절 곧 내버려 두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손 내미는데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저는 20대 때 윗사람들에 대한 반발심이 오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대놓고 들이받거나 매너 없게 대꾸하는 일은 없었지만. 후배들의 죄와 허물은 그런대로 너그럽게 눈감아 주겠는데, 손윗 사람들이 그럴 때는 마음으로 정죄하며 한심해하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의 연장선상인 것도 같습니다. 내 인생의 사연이 어떠하든 이것을 상대방이 느낄 수 있고 불쾌해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실수가 아니라 내가 방치한 마음의 죄들의 증거입니다. 제가 말실수, 표정관리, 행동, 결정 등에서 드러나는 나의 죄들을 겸허히 인정하고, 겉모습인 매너와 예절을 단도리 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뿌리인 마음의 죄를 들여다 보고 때마다 회개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정직하고 신실하고 날마다 죄씻음으로 예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으로 날마다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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