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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Sep 19. 2023

자기 매몰의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뉴스 기사에서 반면교사를 발견하다  

어렸을 때 아니 어른이 되어서도. 작은 가시가 손가락에 박혀서 아팠던 기억이 난다. 정확히는 아픈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내 신경이 계속 거기에 쓰이고 분산되는 것. 곧 마음의 에너지가 그 가시에 흡입되는 것이 더 어려웠던 것 같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미묘한 쓰림과 아픔이 느껴지기에, 내 손가락에 있는 가시란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픔을 느끼니깐 그것을 뽑거나 심하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가시는 우리의 마음에도 가끔 찾아온다. 어떤 사람은 매일 자주 찾아올 수도 있다. 아래는 그런 가시를 제때 발견해 뽑지 않은 어떤 사람. 그의 내면을 허구로 구성해 보았다.      


사람들이 나를 해코지할 것이 두렵다. 누군가 내 뒤에서 내 욕을 했다는 말만 들으면 평온하던 나의 마음은 분노와 수치심, 적개심으로 아수라장이 된다.

누가 내 돈 1000원이라도 손해 보게 했다 하면 따져야 한다. 택시기사가 길을 몰라 조금이라 헤매면 분노가 치민다. 나의 돈을 더 받으려고 사기를 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빨리 채근하며 육두문자라도 날려야 직성이 풀린다.

마트 직원이 계산을 조금이라도 느리게 하면 나를 무시하는 것 같다. 자꾸 시계를 보는데 짜증 게이즈는 계속 올라간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누군가 나를 툭 치고 먼저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피곤한 내가 좀 쉬어 가려고 했는데, 새치기를 해서 내가 쉴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았다. 그는 이제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는 대천지 원수다. 분노에 온몸이 찌릿해진다.

온 세상이 다 나를 무시하고 내 것을 빼앗으려 한다. 모두가 적뿐이고 나는 오늘도 내내 피해자이다. 늘 나만 상처받고 손해를 본다. 더 이상 이렇게 참고만 살아서는 안 된다. 왜 나는 불행하게 늘 가해자에 둘러싸여 살아야 하는가? 도대체 불행은 왜 나에게만 몰아서 찾아온단 말인가.

그래서 나도 이젠 세상에 맞서기로 했다.  
나도 세상을 공격하며 나의 힘을 보여 주기로 했다.
나는 오늘부터 복수를 시작한다.      


위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범죄자들의 내면을 허구로 각색해 본 것이다. 프로파일러들이 극악한 범죄자들과 대화하면서 느낀 공통점은 극도의 ‘피해의식’이라고 한다. 의외이지 않는가? 누구보다 세상에 극악한 피해를 끼친 가해자들이 저마다 자신이 피해자라고 울부짖으니 말이다. 그리고 범죄자들이 갖는 이 피해의식은 그들이 다른 사람을 때리고 심지어 살인하고 어떤 이들은 연쇄살인을 하고도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않게 해준다. 그들에겐 일종의 면죄부, 기괴한 방어기제가 된다. 범죄자들은 이 ‘피해의식’이라는 자기 매몰에 빠져 자신을 또 세상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늘 나는 열심히 살려고 했는데, 늘 주변 사람들이 또 환경이 문제였다는 생각에 더 깊이 침잠한다. 동시에 세상을 모두 처벌해야 할 적으로 둔갑시킨다.     

                

세상에는 천인공노할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각종 범죄자들이 있다. 이들은 공권력이나 종교의 힘, 누구의 도움으로도 쉬 회생되지 않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극단적인 예는 별 외로 하더라도.   

   

사실 아주 평범한 우리들도 피해의식에 매몰되어 살 때가 많다. 자신을 잘 살펴보라. 내가 정당하게 또 응당히 ‘가해자’로 지칭했던 그들을 처벌하려 좇았다니며 했던 생각, 말, 행동, 표정, 일들을. 내가 가해자라 특정한 이들에게 정의롭게 했던 일들이 실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더 심각한 가해자의 행보일 때가 상당히 많다. 또한 내가 누군가를 가해자로 지목하는 상당 부분은 과잉반응, 오해, 착각, 열등감, 질투와 시기, 침소봉대일 때도 상당하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누가 가해자가 될까?


그래서 우리는 손가락의 가시를 느끼듯 마음의 가시를 느껴야 한다. 나는 ‘마음의 가시’를 ‘죄’라고 이름하고 싶다. 보통은 상처를 가시로 은유하기도 하지만 난 가시를 죄로 이름하고 싶다. 그래야 내가 과잉반응의 가해자로 돌변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도와준다. 간혹 누가 봐도 내가 처참히 피해자일 때도 있다. 그때는 앞서 말했듯 공권력 곧 법의 힘을 빌리거나 권위 있는 성직자나 국가기관, 공동체의 리더십, 집안의 어르신들께 도움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보통 이런 극단적인 일들은 주변에 많지 않다. 우리는 대부분 상당히 일상적인 일들에서 소란해지고 무너진다. 남편이 무심히 던진 말, 아내의 투덜거리는 신세 한탄, 직장 동료가 지나가듯 내뱉은 한 마디와 그 눈빛, 학교에서 친구가 저지른 작은 실수나 험담, 부모님의 다툼, 버스기사의 질책, 떡볶이집 아주머니의 무반응, 동생의 뺀질함. 때론 내가 알던 학교동창의 잘난 남편, 소꿉친구의 성공, 옆집의 아파트 당첨 소식, 담임선생님의 칭찬을 받는 짝꿍, 친구 아들의 서울대 합격소식, 내 성적표의 C학점 등. 우리 마음에 가시가 생기되는 통로는 생각보다 서서히 굉장히 일상적으로 스며든다. 그래서 의식하기가 어렵다. 그 가시 때문에 내 마음이 쓰리고 아프다는 것을, 또 그 가시를 빨리 빼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기가 어렵다.


그럴때 절대자께서 인간의 눈에 확연히 보이는 '숙제'를 그 인생에 던져 주시는게 아닐까? 가령 내 개인의 삶에 자꾸 장애물과 큰 아픔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질병이나 사고, 사건, 인간관계 등 다양할 것이다. 내 마음의 작은 가시를 무심히 방치하며 가시를 키우다 결국 그 가시에 찔러 넘어질까 봐 도우시는 손길이 아닐까, 나는 종종 생각한다. 이에 대해 C.S 루이스는  "고통은 귀 기울이지 않는 세상을 깨우는 확성기입니다."라고 말 했다. 혹자는 이 대목을 과격하게 번역하기도 한다. "고통이란 귀먹은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우리네 인생이 가시에서 자라난 대못에 박혀 박살나는 것을 막기 위한 메가폰 말이다.    


내가 인간관계에서 자유로워졌던 핵심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나도 어렸을 때는 늘 나만 상처받고 억울하고 힘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그 피해의식 때문에, 사춘기시절엔 어머니에게 이유 없이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동생에게는 투명스럽게 대하고, 영문도 모르는 다수의 사람들을 미워하고 원망하며 지냈다. 물론 나는 굉장히 내성적인 사람이어서 그런 감정을 드러내서 가족 외 타인에게 쏟는 일은 거이 없어지만 말이다. 그러나 중학교 들어가면서, 나는 내가 피해의식에 과몰입되어 자신을 감옥에 스스로를 가둬 놓고 있었음을 조금씩 발견하기 시작했다.      


죄 그리고 죄의식, 죄책감에 대해서 할 말이 길다. 그것을 기술하련 A4 1000장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오늘은 그 첫 단추인 “나도 가해자입니다,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라는 시각의 전환만을 전하고 싶다. 나의 아픔에만 매몰되던데서 세상과 타인의 아픔들이 들리고 읽힐 때, 그때 인간관계의 꼬인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한다. 그때 진정한 진리와 자유가 내 삶을 채워갈 여백이 생기기 시작한다.          





*프로파일러(profiler) : 용의자의 성격과 행동 유형 등을 분석하고 도주 경로나 은신처 등을 추정하는 역할을 하는 수사관. 주로 증거가 불충분하여 일반적인 수사 기법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에 투입된다.


**피해의식(victim mentality) : 자신을 타인의 부정적인 행동의 피해자로 인식하고, 이런 상황과는 반대되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획득 성격 특성(acquired personality trait)을 말한다.




# 아래 큐티는 수시로 들어오는 마음의 가시(죄)를 신앙적으로 풀어가는 개인 묵상입니다




[생생큐티] 2023년 9월 14일(목) 예수님의 보혈(마가복음 14장)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가복음 14:23~24)  

   

마지막 만찬. 예수님께서는 내일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됩니다. 자신의 고난과 처참한 죽음을 이미 알고 계신 예수님. 그 예수님은 그 전날 제자들과 이른바 마지막 식사를 합니다. 도피하거나 전략회의를 하는 등 엄청난 과업을 해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한가로이 정말 한가로이 그것도 만찬을 하시기로 한 것입니다.      


식사는 우리의 일상이며 놀랍게도 우리의 기억이자 추억입니다. 다른 추억들은 사건으로 기억되지만 이상하게도 매일 식사시간은 맛과 메뉴는 잊히지만 사람과 느낌, 분위기, 향취는 기억됩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기억보다 강력한 부착력을 갖고, 애착하듯 내 내면의 밑바닥에 힘 있게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처참한 죽음 이후 제자들이 걱정되고 안쓰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거대함이 아닌 산소와 같은 일상으로 자신을 각인시키십니다.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너무도 중요한 제자훈련의 정점이며 핵심인데, 그것을 식사로서 시청각 교육을 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예수님의 몸을 떡에 비유하시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새기도록 돕습니다.


또한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며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 포도주를 다 마시자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려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만약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예수님의 이러한 비유적 가르침은 공포영화를 방불케 했을 것 같습니다. 끔찍한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포도주는 알코올 성분이 들어가지 않은 포도즙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포도주는 우리의 식수처럼 식사 때 늘 먹는 음료였습니다. 제자들 매일의 일상에 십자가로 처참히 죽으신 예수님의 몸과 예수님이 처절하게 흘리신 피를 충격적으로 심으신 예수님. 왜 이토록 애쓰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그 보혈의 피만이 인간들의 죄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사함과 구원만이 현재와 영원에 이르는 인간들의 기나긴 고통. 그 죄와 사망의 고통에서 건져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내일 죽는다는 사실에 자기 연민에 빠져있거나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거나 또는 고상하게 죽을 궁리나 빠져나갈 궁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제자들이 깨달아 알고, 그들의 인생에 받아들이기를 원했습니다. 십자가의 진리가 그들의 일상 곳곳에 파고들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예수님 하면 가장 강력하게 떠올리고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은 다시금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임을 생각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죽으심은 구약 예언의 성취고 이것이 갖는 의미는 우리를 죄와 사망권세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인생들이 고통스러운 근본적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죄 문제는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짝퉁의 해법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짝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날마다의 일상에서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묵상하고 되새기고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매일 새벽기도때 예수님을 많이 묵상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묻고 또 묻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매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자체를 묵상하지는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핵심이 빠진 묵상일 수 있습니다. 새벽기도뿐 아니라 매일의 일상에서 예수님을 내 삶에 모셔들이야 합니다. 삶의 크고 작은 문제들 앞에서도 예수닙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구원과 능력, 해법이 됨을 깨닫고 치열하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에는 우리 생명을 살리고 인생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습니다.      


제가 기도를 하되,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깊이 생각하므로 능력이 있는 기도. 예수님의 능력을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기도를 날마다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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