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바라는 자의 참 기쁨, 참 평안
참된 기쁨은
십자가에 완전히 항복한 삶에서만 흐른다.
ㅡ <The Calvary Road>, 로이 헤션ㅡ
내 멘토와 사모님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한 모습으로 살고 계신다. 사실 강남 S교회가 대학생선교단체들의 제자훈련, 귀납적 성경공부나 일대일 성경공부 등을 체용해서 지역교회에 이식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나는 지역교회에서 신앙생활하다 선교단체에 10년 있었고 다시 지역교회에 다니고 있어서, 양쪽의 스토리의 얼개를 익히 알고 있었다.
내가 몸 담았던, 대학생 선교단체엔 웬만한 성직자들보다 훌륭한 인격, 진실성, 순복 하는 겸손, 욕심 없는 자기 버림의 분들이 허다했다. 내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 받은 가장 큰 축복은, 이 분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목도했다는 점이다. 강남 아파트 몇 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이다. 이 때문에, 오랜 세월 신앙생활하는 동안도 20대의 구원의 감격, 천국소망을 풍성히 누리고 믿음의 중심을 견고히 지킬 동인을 얻었기 때문이다.
옥OO 목사님께서, 이 땅에 너무 많은 영광을 누려 하나님 앞에 가면 받을 상급이 없을까 걱정이다, 라는 뉘앙의 말씀은 그분의 겸손이면서 동시에 진정한 진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70~90년대 제자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선교단체ㅡ물론 예수님이 원조이시다ㅡ 성직자들은 대부분 세상 영광을 받기는 커녕 세계 각지에서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헌신하다 돌아가시곤 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분들은 대부분 책을 내지 않았고 메이저 미디어엔 거이 노출되지 않고 헌신만 했기 때문 같았다.
심지어 내 멘토는 사역 초반기에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형교회에 초빙을 많이 받았는데, 두어 번 가다 일부러 고사하고 안 가셨다 한다. 사역초반 너무 가난하셔서, 오뎅국물로 끼니를 떼울 때도 있던 시절이라, 사례비 한푼이 아쉬운 때였는데도 말이다. 70년대부터 몸 담아 오신 대학생선교는 고난이 많고 배고픈 사역이었는데, 자꾸 그런 곳에 불려 가니, 자신의 마음이 너무 자고 해지고 부유해지는 것 같아 경계해서라고 하셨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진짜 존경받은 믿음의 거목들께서 말년에 암 등 질병으로 고통하실 때, 역설적이게도 이건 그분들의 영혼을 지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이 땅에서의, 육신의 고난은 안타깝지만 그 영이 깨어있고 천국 가는 날까지 허튼 실수 하지 않게 도와주시는 섬세한 하나님의 배려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 멘토도 그렇지만 사모님(멘토의 아내분)도 놀라우신 분이셨다. 진짜 성경 속에서 튀어나온 위인 같았다. 70-80년대인가 서울대 미대를 나왔고-동창중 유명인들이 있다- 단아한 미모에 심지어 집도 잘 살았다. 90년대에 서울에 꼬마빌딩 정도는 돈을 대줄 수 있는 가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모님은 예수님을 전하는 사명을 위해서 집안의 반대 때문일 테지만, 신혼 때 가구 살 돈이 없어서, 월세에 우유 박스(플라스틱)를 밥상 삼아 신혼생활을 시작하셨다.
멘토는 사역의 절정기, 서울대부터 제주대까지, 전국 대학의 그 대학생선교단체에서 이젠 시니어로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멘토는 그 선교단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말씀이 빼어난 종이였기 때문이다. 허나, 일찍 은퇴하시고 아프리카 수단에서 60세 넘은 나이에 사모님과 함께 선교사로 가셨다. 그 연세에 아프리카 캠퍼스에서 노방전도를 하셨다 한다. 사모님은 내가 지켜본 20대 때도 몸이 너무 아파 무너질듯한 날에도 새벽 4시 30분 기도를 빠진 적이 없으셨다. 이 대목은 우리 자매들로 경악에 가까운 놀라움을 전해주었고 지금 나의 성실한 새벽기도의 롤모델이 되어 주신다.
그 사모님과 큐티모임을 할 때면, 자매들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긴장했다. 나도 그랬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경외심 같은 것이었다. 사모님은 굉장히 인격이 훌륭해서 나는 한 번도 사모님께서 인간적으로 화를 내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허나, 영적으로 잘못 갈 때는 오금이 저릴 정도로 단호하게 책망하시고 훈련도 주시는데, 부드럽지만 진짜 무섭다 것을 처음 느껴 보았고 그건 예수님의 십자가를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의 영성과 카리스마였다.
하나님을 만만하게 보는 사람을, 사람들은 앞에서는 아부하지만, 실은 뒤에선 만만하게 본다. 반면에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경외하는 사람을, 사람들은 말은 안 하지만 어려워하면서도 존경심을 담아 리스펙 한다. 이것이 영성이고 영적인 리더십인 것이다. 어떤 인간적인 처세술, 개인기, 인간적인 성품이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영성,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타인들을 근본부터 변화시키는 말씀의 능력을 부어주신다.
브런치스토리는 신앙 플랫폼이 아니라서, 가끔 재밌고 말깔스럽게 에세이톤의 글을 쓰려다 보면, MSG가 들어가는 느낌이다. 내가 큐티 관련 이 카테고리를 만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최소한 신앙 주제에 대해서는 MSG 없이 내 진짜 속내를 담백하게 말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여기에선 오프라인 어디에서도 말하지 못했던 속내를 속풀이 하듯 풀어내는 나만의 자유공간인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믿음과 신앙생활의 허세와 허풍, 자기 유희, 자기 언어가 공해처럼 너무 많이 떠다니는 반면, 삶으로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이들이 의외 많아, 염증을 느껴 내 내밀한 신앙생활은 도리어 오픈하기가 꺼려졌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보지 않은데, 영적인 자기의를 드러내는 꼴이 되면, 얼마나 하나님편에서는 어처구니가 없겠는가 싶어서다. 세상적인 주제, MSG 에세이는 그에 비해 쓰는 게 좀 더 편하다.
사람들은 가치관-자신이 가치가 더 있다 여기는 것-에 따라 자신이 보고 싶은 것 위주로 타인의 언행을 본다. 2년 전 OO자이푸르지오 아파트에 세입자를 들일 때, 중개해 준 공인중개사가 그랬다. 그녀는 이름만 들으면 아는 유명교회에 다니는 성도였다. 그녀의 말을 빌자면 그 자신은 나이롱 신자였다가 이제 막 마음 잡고 큐티를 시작했다 한다. 초신자 같은 구신자였다. 그녀는 내 아파트 전세 세입자를 구해 주었다. 그녀는 공교롭게도 나와 동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자매가 나와 통화하다가는 울컥 울어버린 것이다. 그녀 말로는 하나님께 억하심정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말은 이랬다.
'하나님, 왜 OO자매는 아파트 청약도 하지 않고 임장도 한 번도 안 다녔는데, 저렇게 쉽게 로또 아파트를 주시면서, 나는 2년 넘게 발이 부르터라 청약하고 임장 다녔는데, 아무것도 안 주시냐고. 내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냐고.."
음, 그때 그녀에게 슬며시 '하나님과 관계'를 먼저 생각하라고 얘기해 주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아파트를 주셨지만 사실 이 아파트를 하나님께서 다시 가져가신다 해도 나는 감사할 수 있다고도 했다. 나는 중학교 때 예수님을 만나고 특히 대학교때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난 이후론, 돈은 먹고 살 정도만 있으면 되고 유명인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지금 회사에서 언론 쪽과 연결해 인터뷰 기사 써준다고 했는데 내가 고사했다, 교회에서도 교회신문에 낸다고 여러 번 인터뷰 제안을 주셨지만 다 거절했다. 그냥 내 신앙의 중심이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죄 사함의 은혜를 날마다 누리고, 그 은혜의 물꼬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누리는데 소박하게 머물고 싶기 때문이다. 교회 갈 때도 잠바대기 같은 옷, 구제에서 산 너덜 해진 신발 신고 존재감 없이 조용히 봉사만 한다.
기독교인들 중엔 신앙 연차가 오래될수록 완고해지고 자고 해지는 고집스러운 모습들이 의외로 꽤 있다. 굳이 누군가, 내가 하나님께 기도 응답이나 구하지 않는 세상것도 잘 받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본질을 얘기할 것 같다. 지금 당장 내가 죽어도 후회 없는 삶을 지향하며,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되면 순복하는 것이 (다른 평신도들보단 상대적으로) 좀 잘 되는 편 같다고 말이다. 즉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리 되기까지 그 여정을 추정해 보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도 여전히 불완전해서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오래 신앙생활 했음에도 태반의 사람들은 마음이 완고하기에 하나님께서 안심하고 쓰실 수 없는 것이다, 그래 고난으로 그들을 다듬으실 때도 많은 것이다. 그건 나도 소싯적 아니 요즘도 종종 연단 받는 이유다.
요즘도 내 감정과 자아가 일어나다가도, 새벽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이시라면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실까 생각하다 보면, 고집스러운 감정은 이내 부드러지고 비워지게 된다. 물론 내 멘토 사모님처럼 단호하게 책망해야 할 때는, 나도 얄짜 없이 돌직구를 날리듯 부드럽지만 강하게 말할 때도 있다. 브런치에서 특히 그 돌직구를 해소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같다. 오프라인에서는 거이 속내를 잘 말을 안 하고 살아서 그런가 보다.
하단에는, 내가 20대에 은혜 받았던 성경 말씀중 일부와 신앙서적의 위인들이 남긴 명언들을 발췌해 두었다. 혹여 직전 나의 글(국가가 도와준 어리버리 부동산 재테크) 을 읽고 상기 공인중개사처럼 하나님께 서운하다면, 내 현재의 세상적인 결과물만 보지 말고, 그 여정과 현재 세상 재물을 바라보는 나의 영적인 가치관이 어떠한가를 이면적으로 바라보기 바란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세상적인 것을 구하지 않고 등지고 살아도 인생은 가치가 있고 필요는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세속적인 축복을 주시면 상당히 조심하고 조금은 아쉬워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 땅에서 수고의 상급을 다 받으면 하나님 앞에 가서 받을 게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내가 받은 재물을 나눠주는 것도 또 책을 바로 출간할 수도 있는데, 선뜻 실명으로 책을 내고 싶지 않은 이유이다. 내 멘토는 세상적으로는 너무 우직하고 너무 청빈한 분이셨지만 -평생 전세로 사셨다- 오히려 영적으로는 영악하다 할 정도로 지혜로운 분이시다. 난 멘토의 그런 신실함과 영안과 영성이 부러울 따름이다. 그 우직함과 오롯함 말이다.
영적인 가치관, 영적인 분별력. 신앙의 연차가 오를수록 이 눈이 생겨야 한다. 안 그러면 인생이 불행해진다. 뭐고 옳고 그른지 판단을 못 세우고 시류에 휩쓸리다 하나님과 척을 지며 불순종하기 쉽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 완고하다가는, 이내 하늘 몽둥이로 제대로 연단 받을 수도 있다.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수고도 많이 한 것 같은데, 나보다 잘 나가고 세상 축복받는 옆의 크리스챤들을 보면 분통이 터지고 그를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폄하하고 싶은가? 그런 일그러진 내면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심해서 쓰실 수도 또 축복을 섣불리 주시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건 나도 소싯적 경험한 미숙함이기 때문에 안다.
아등바등 너무 삼박자 축복을 구하지 말라! 역설적이게도 내 직전 글의 핵심 포인트다. 세상 축복은 굳이 간절히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정말 필요하다 싶으면 주신다. 반대로 밤낮 부르짖어도, 그가 안심이 안 되는 사람이거나 그에게 독이 된다면 세상 축복은 안 주실 것이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주어진 세상 축복은 저주고 재앙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50억 아파트가 생겼는데, 내가 살집 5억 빼고 45억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되팔아 나눠주라 하면 할 수 있겠는가? 이 대답에 거짓 없이 대답할 수 있다면 하늘에서도 안심하고 주실지 모른다.
하나님은 동일하시고 우리에게 뭐든 후히 주고 싶어 하신다. 문제는 우리가 물질의 축복이나 세상 영광, 인기, 유명세에 쉽게 변질되는 죄성이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그런 우리를 예방접종할 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가자.
자기 뜻을 버린 사람은 어떤 손실도 입지 않는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ㅡ<그리스도를 본받아>, 토마스 아켐피스 ㅡ
내가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다독한 것이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였다. 20대-30대 때 자주 새벽기도때나 틈틈히 형광펜과 색연필을 칠하며 몇 장씩 묵상하며 읽다 보니 나중엔 책이 무기개색이 되었던, 이젠 너덜너덜해진 책. 그렇게 천천히 읽었는데도 거이 7-8독을 했던 것 같다. 근데 오히려 이처럼 내가 신앙적으로 열정을 냈던 이런 부분은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하나님께 드린 은밀한 기도와 간절한 소원, 내 삶의 지향은 하나님 앞에서 상급으로 받을 몫으로 남겨 놓기 싶기 때문이다. 은밀해야,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받을 칭찬이 남아있을 것일테니 말이다.
하나님께 완전히 맡긴 삶에는
결코 ‘실수’가 없다.
ㅡ 코리 텐 붐 (나치 수용소 생존자·선교사) ㅡ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ㅡ 시편 37:4–5 ㅡ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ㅡ 잠언 16:3 ㅡ
주님께 순복할 때,
나는 비로소 나 자신에게서 자유로워졌다.
ㅡ 성 어거스틴 ㅡ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결코 지킬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어리석지 않다.
ㅡ 짐 엘리엇 (에콰도르 선교 중 순교)ㅡ
하나님의 뜻 안에는 결코 부족함이 없다.
그 뜻을 벗어난 곳에만 결핍이 있다.
ㅡ 허드슨 테일러(중국 내지 선교회 설립자)ㅡ
하나님 뜻에 순복하는 삶은
고난을 피하는 삶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얻는 삶이다.
*오탈자만 수정하고 편집 없이 큐티 그대로 공유합니다. 글이 좀 엉기어 있어도 양해 부탁드려요
11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11-18)
이스라엘 민족은 고된 애굽의 노예살이와 절박한 광야(사막)의 40년을 지났습니다. 이 중 한가지만도 혹독한데, 그들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낮고 치열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주목할 것은, 그들이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는 점입니다.
상상만 해도 뭔가 기괴하고 싸합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도 돈이 없어 재물에 인색할 것도 아닌데,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그러시는 걸까? 이것은 수천 년 전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가 던지는 질문입니다. 내 인생에 왜 이런 어려운 일이, 이런 결핍이 생기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분명 나를 사랑하고 보호하신다고 하셨는데, 온우주의 주인이 왜 내게 이리 인색하시고, 심지어 괴롭히냐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고난은 인간의 본성에 전면으로 위배되고 고통을 수반하는 여정이기에, 인간은 누구나 격렬하게 싫어합니다. 굳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가 아프고 싫어하는 것을 그 삶에 던지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6절 말씀에서는 이에 대한 힌트를 줍니다.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우주 전부라도 주시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시고 그럴 능력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 인간이 교만하고 본성이 악하고 신실치 못 해서 복을 주시기 위험할 따름입니다.
그 위험성이 무엇입니까? 그들 자체가 본디 죄악되고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죄란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생각, 의지, 뜻, 삶인데 즉 그들 삶에서 하나님을 배제하고 통제를 거부하는 마음, 창조주를 멸시하고 구원자를 무시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교만은 그중에서도 하나님보다 자기를 높이고 모든 것을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이룩한 것처럼 자고하고 자랑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성을 꺾으시고 교만을 낮추시기 위해서 노예살이와 광야훈련을 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 이방 민족들처럼 먹고사는 일에 골몰하다 하나님을 잊고 살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놓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거나 거역했다 보기는 어렵지만, 하나님을 잊는다는 점에서는 본질은 비슷합니다. 죄는, 하나님을 기억할 때 인간의 주변을 맴돌더라도 접근 금지가 되지만,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순간 작은 틈 하나로도 그 인간을 압도하고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13-14절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즉 우리는 고난 속에서 낮아지는 경향이 있지만 풍요와 안정 속에서 스멀스멀 교만이 피어나고 하나님을 잊거나 반발하는 악한 본성이 있습니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어떤 순간에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순종하는 사람이, 내면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관된 겸손과 신실함을 인간은 자연스럽게 터득하지도 간직하지도 못합니다. 오직 고난을 통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자각과 절체절명의 절망 속에서 느끼게 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고난의 유익과 목적을 다시금 마음에 새깁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불안해서 고난으로 연단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안심하고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날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피조물이요, 죄인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합니다.
성숙이란 고난을 통해 꺾이는 사람이 아닌 스스로 낮추고 때론 스스로 고난과 수고를 자원하는 데 있음을 생각합니다. 제가 날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헌신하는 성장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