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잃어버린 언어, 그리고 우리가 마셔야 할 쓴 약

빼앗긴 진리를 되찾아야 할 때

by 청년 클레어

본 매거진 <2026년 한국 도착한 CS 루이스>는 C.S 루이스가 2026년 한국에서 숨쉬며 살아간다면 느낄 생각, 신앙, 철학, 느낌을 현재적으로 각색해서 써봅니다. 자료 수집등은 AI의 도움을 조금 받았고 기존에 읽었던 책들도 인용합니다.




2026년 서울, 붉은 말의 해를 맞이하며



2026년 1월 1일, 나 C.S. 루이스는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인천공항의 자동문을 나서자마자 마주한 한국의 공기는 날카로웠습니다. 옥스퍼드의 습한 안개와는 다른, 폐부 깊숙한 곳까지 찌르고 들어오는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올해를 ‘붉은 말의 해(적말띠)’라고 부르더군요. 요한계시록 6장에서 땅의 평화를 제하고 서로 죽이게 하던 그 ‘붉은 말(Red Horse)’이 떠올라 잠시 등골이 서늘했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그 말은 그저 역동과 번영의 상징인 듯했습니다.



나는 지금 서울의 심장부라 불리는 강남, 테헤란로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카페 창가에 앉아 있습니다. 통유리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마치 거대한 회로 기판 같습니다. 쉴 새 없이 반짝이는 전광판,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마천루들. 이곳은 현대판 바벨탑의 전시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곳에서 마시는 커피는 묘하게 씁쓸합니다. 아마도 내가 방금 읽은 한국 교회의 자화상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창밖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을 봅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주일이면 예배당에 앉아있을 '크리스천'이겠지요. 하지만 내 눈에는 그들의 영혼이 몹시 지쳐 보입니다.


내가 보기에 이곳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마치 자동차 보험을 들듯 말입니다. 사고가 날 때를 대비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로만 신앙을 걸어두고, 나머지 삶은 철저히 세속의 논리에 따라 굴러갑니다.


저기 횡단보도를 건너는 학부모들의 발걸음을 보십시오. 자녀를 특목고나 SKY 대학에 보내기 위해 주일 예배를 빠지는 것을 ‘불가피한 희생’이라 여기고, 주말에는 봉사 대신 자녀와 함께 시즌별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을 ‘가족 사랑’이라 포장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부동산과 주식, 코인 시세에 일희일비하고 있습니다. 직장 일이 피곤하다며 교회 봉사는 사절하면서도, 유튜브 숏츠나 연예인 가십에는 호구처럼 시간을 상납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스크루테이프가 쾌재를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래, 그렇게 영적인 감각만 무디게 만들면 돼!"


하지만 나는 또한 희미하게나마 들려오는, 순수한 신앙의 외침들도 기억합니다.


2026년의 한국 교회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인본주의라는 달콤한 진통제를 계속 맞으며 서서히 잠들 것인가, 아니면 회개와 심판이라는 쓴 약을 삼키고 깨어날 것인가.


나는 이제 펜을 들어, 이 화려한 도시의 소음 속에 묻혀버린 '진짜 복음'에 대해 편지를 쓰려 합니다. 강단에서 사라진 단어들, 성도들이 혐오 단어처럼 여기게 된 그 '심판'과 '부활' 등과 같은 관념화된 진리에 대해 말입니다.


내 앞에 놓인 빈 종이가 마치 한국 교회의 영적 상태처럼 하얗게 질려 있는 것 같군요. 이제 시작해 보겠습니다.






잃어버린 언어, 그리고 우리가 마셔야 할 쓴 약



1. 진통제만 처방하는 의사


현대 기독교는 마치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수술 대신 사탕과 진통제만 쥐여주는 의사와 같습니다. 환자가 아파할까 봐, 혹은 환자가 병원을 떠날까 봐 두려워 "당신은 건강합니다, 다 잘 될 겁니다"라고만 말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직무 유기입니다.


제가 쓴 책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에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참으로 이상한 종교다.
기독교는 먼저 우리에게 절망을 안겨준 뒤에야 비로소 희망을 준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심판받아 마땅한 상태라는 끔찍한 사실을 직시하기 전까지 복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다.



오늘날 강단에서 '심판'과 '회개'가 사라진 것은, 성도들이 자신을 환자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자신이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에게 '구명조끼(구원)'는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입니다. 심판을 설교하지 않으면서 구원을 말하는 것은 기만입니다.


옥스포드 대학 교수 시절(19050년)의 C.S 루이스



2. 전략적 패배, 왜 보석을 도둑에게 맡기는가?


이단과 사이비 종교가 심판, 재림, 부활과 같은 핵심 교리를 납치해 갔습니다. 그리고 정통 교회는 그 단어들이 '이단스럽다'는 이유로, 혹은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사용을 꺼립니다.


이것은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전략입니다. 제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나오는 그 교활한 악마들을 참고해 주세요.


가장 중요한 무기를 적군이 깃발을 꽂았다는 이유만으로 버리고 도망가는 군대를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이단들이 가짜 '심판'과 공포를 조장한다고 해서, 진짜 심판의 메시지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위조지폐가 시중에 돈다고 해서 진짜 돈을 갖다 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정밀하고 엄중하게 '진짜 심판'과 '진짜 부활'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가짜를 식별할 눈을 갖게 됩니다.






3. 본질, 천국을 소망해야 이 땅을 살 수 있다


우리는 "믿음의 닻을 천국(십자가 구원)에 내려야" 합니다. 현대 교회가 약해진 결정적인 이유는 성도들의 시선을 이 땅의 행복, 성공, 안락함에 고정시켰기 때문입니다.


저는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라. 이 세상을 위해 가장 많은 일을 한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다음 세상을 가장 많이 생각한 사람들이었다.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이다.


부활 신앙은 죽음 이후의 보험이 아닙니다. 나는 이 땅의 시민이 아니라 '천국 시민'이라는 정체성이야말로, 이 타락한 세상에서 유혹에 굴하지 않고 죄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동력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자(Memento Mori)만이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습니다.






4. 처방, 값싼 은혜를 경계하라


지금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듣기 좋은 위로가 아니라, 뼈를 깎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의 책 《나를 따르라》에서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다. 값싼 은혜란 회개 없는 사죄요, 참회 없는 세례요, 십자가 없는 은혜다.


성도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혹은 교인 수가 줄어들까 봐 죄를 지적하지 않는 목회자는 성도를 '영적 당뇨병'에 걸리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달콤한 것만 먹이다가 결국 영혼을 괴사시키는 것입니다.


심판 그리고 "너는 죄를 회개해야 해"라는 직설적인 메시지는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진짜 사랑하기 때문에 해야 하는 말입니다.


낭떠러지로 걸어가는 아이에게 "거기로 가면 위험할 수도 있어"라고 부드럽게 권유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멈춰! 거긴 죽는 길이야!"라고 소리쳐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설교입니다.







5.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


기독교가 허약 체질이 된 것은 '영양 과다' 때문이 아니라, '필수 영양소 결핍' 때문입니다. 사랑과 축복이라는 탄수화물은 넘쳐나지만, 회개와 심판, 십자가의 고난이라는 단백질과 무기질이 빠져 있습니다.


이제 다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합니다. 강단에서는 다시금 거룩한 두려움(심판)이 선포되어야 하고, 회중석에서는 가슴을 치는 통회의 눈물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


천국을 향한 소망은,
이 땅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이 땅을 견디고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그림,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