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가 된 성도와 연예인이 된 성직자
– 2026년 겨울, 삼성동 코엑스 광장에서
카페의 문을 열고 나오자, 2026년 서울의 겨울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습니다. 테헤란로의 빌딩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날카로웠지만, 거리의 열기는 그 추위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내 눈앞에는 과거 한전 부지에 들어선, 하늘을 뚫을 듯 솟아오른 OO자동차의 거대한 신사옥(GBC)이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었습니다. 마치 이 시대의 새로운 바벨탑처럼, 혹은 맘몬(Mammon)을 위한 거대한 대성당처럼 그 그림자가 삼성동 일대를 덮고 있더군요.
코엑스 광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귀를 찢을 듯한 함성이 들려왔습니다. 수많은 인파가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저마다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브로마이드가 손에 들려 있었고, 그 행렬은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물결치고 있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아이돌이 손짓 하나만 해도, 소녀들은 울음을 터뜨리고 소년들은 열광했습니다.
나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기이한 전율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공연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예배(Worship)’였습니다. 대상이 다를 뿐, 그 형식과 열정, 그리고 헌신의 밀도는 중세의 어떤 수도사들보다도 뜨거웠습니다.
사람들이 어리석은 유튜브 숏츠나 연예인 가십에는 호구처럼 자신들의 소중한 시간을 열정적으로 상납한다는 사실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구원을 갈망하는 자의 간절함마저 서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비극적인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저 화려한 무대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가 걸린 강단을 저 아이돌의 무대처럼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화려한 조명을 받는 아이돌이 되기를 원하고, 성도들은 그를 향해 열광하는 ‘팬덤’이 되기를 자처합니다.
교회 문을 나서면 부동산과 코인, 자녀 입시에 혈안이 되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면서도, 주일날 교회에 와서는 마치 콘서트 관람객처럼 설교를 평가하고 감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적 취향을 만족시켜 줄 스타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이 거대한 ‘인본주의의 성전’을 뒤로하고, 다시 펜을 잡습니다. 성도들을 관객석에서 끌어내려야 합니다. 강단은 무대가 아니고, 회중석은 심사석이 아닙니다.
이제, 인기에 영합하여 병들어가는 기독교를 향해 내가 쓴 쓴소리를, 이 차가운 서울의 밤공기에 실어 보냅니다.
오늘날 교회의 풍경을 보며 가장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성도들이 마치 연극 평론가나 미식가처럼 행동한다는 점입니다. 예배가 끝나면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오늘 설교는 참 좋았어(내 취향이었어)." "오늘 말씀은 좀 지루하던데? 예화가 별로였어."
이것은 '오만'의 극치입니다.
저는 제 에세이 《피고석의 하나님(God in the Dock)》에서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혀놓고 심문하려 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강단 위의 말씀조차 ‘내 기분을 맞춰주는가?’라는 기준으로 심판받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비위를 맞추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이라기보다, 손님의 주문대로 요리를 내오는 ‘웨이터’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목회자의 본질적인 직무는 영혼의 의사(Doctor)입니다.
환자가 쓴 약을 싫어한다고 해서, 혹은 수술이 무섭다고 해서 의사가 설탕물만 처방한다면 우리는 그를 돌팔이, 아니 살인자라고 부를 것입니다.
성도들이 듣기 싫어하는 ‘회개’와 ‘죄’에 대한 지적을 생략하는 것은, 암 덩어리가 퍼지고 있는데 "걱정 마세요, 피부 트러블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설교자의 인기는 그의 설교가 진리를 꿰뚫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세상과 타협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결코 환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의 '팬덤'을 의식하는 순간, 그는 십자가를 내려놓고 자신의 트로피를 챙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직무 유기이자, 하나님 앞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배임 행위입니다.
지금의 예배 분위기는 묘하게 인본주의(Humanism)적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이 위로받고 힐링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습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악마 스크루테이프는 조카 웜우드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환자(인간)가 교회에 가서 자기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아다니게 해라. 교리를 따지는 게 아니라, '이 교회가 나한테 맞나?'를 따지게 만들란 말이다. 그렇게 하면 그는 교회에서조차 비평가 노릇을 하게 되고, 결국 겸손이나 순종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될 것이다.
영혼은 본능적으로 가벼운 농담보다 무거운 진리를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정통 교회가 심판과 재림이라는 무거운 진리를 인본주의적 배려(?)로 감추는 동안, 영혼들은 굶주리다 못해 독이 든 사과(이단)를 베어 물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성도를 ‘관객’의 자리에서 끌어내립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듯, 예배라는 드라마에서 관객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목회자는 큐시트를 읽는 프롬프터이고, 성도들이야말로 무대 위에서 하나님께 삶을 드려야 하는 배우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는 하나님을 관객석에서도 쫓아내고, 성도들이 관객석에 앉아 목회자의 연기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기막힌 전도(顚倒)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부활 신앙은 요원합니다.
쓴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는 결국 진리의 소리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당신은 훌륭합니다"라는 칭찬이 아니라, "당신은 죄인입니다. 그러니 십자가가 필요합니다"라는 뼈아픈 진단입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살립니다.
*그림,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