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로의 불빛 아래서, 비겁한 생존을 묻다
악은 때로 괴물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악인은 거창한 괴물이 아니라
양심보다 안전을 선택한
평범한 인간이곤 했다
코엑스 광장의 그 거대한 ‘네온사인의 성전’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테헤란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임에도 하늘을 찌를 듯한 빌딩 숲의 창문들은 여전히 하얗게 불을 밝히고 있더군요. 그 네모난 불빛들 하나하나가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저 안에는 상사의 비위를 맞추며, 때로는 양심을 접어두고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영혼들도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세속의 야망을 위해 야근의 피로와 싸우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본디오 빌라도를 우리는 그저 유약한 비겁쟁이나 악당으로만 치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에서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는 악마적이라기보다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던 지극히 세속적이고 현대적인 ‘직장인’에 가깝습니다. 그는 진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선택했을 때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두려워서 무너진 자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반란이 끊이지 않아 다스리기 골치 아픈 험지였습니다. 로마 황제는 이 거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최고위 귀족인 원로원 계급이 아니라, 군사적 실무 경험이 풍부한 기사 계급 출신의 빌라도를 파견했습니다. 혈통이나 가문이 아닌, 오직 ‘실적과 줄타기’로 살아남아야 했던 실무형 엘리트 빌라도에게 생존은 늘 벼랑 끝의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과거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연했던 《내부 서클(The Inner Ring)》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권력의 핵심, 즉 '안전하고 인정받는 이너 서클'에 들어가고자 하는 강렬한 갈망이 있으며, 그 서클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기꺼이 양심을 팔아넘긴다는 내용입니다. 빌라도 역시 로마의 이너 서클에 머물기 위해 발버둥 쳤습니다.
빌라도가 총독으로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의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최측근이자 권력의 실세였던 근위대장 세야누스라는 든든한 백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흡사 반유대주의자에 준하였던 세야누스의 지시에 따라,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종종 가혹하게 탄압하며 딸랑이처럼 황제 숭배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즈음, 로마 정계에 거대한 피바람이 붑니다. 세야누스가 황제에 대한 반역죄로 처형당한 것입니다. 빌라도 역시 언제 자신의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빌라도는 이미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른 상태였습니다. 예루살렘에 무리하게 로마 황제의 형상(이미지)을 들여오려다가 유대인들의 거센 폭동에 직면했고, 이로 인해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엄중한 경고를 받은 전력이 있었습니다. "또다시 폭동이 일어나면 네 목숨은 없다"는 압박감이 그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뱀처럼 교활하게 빌라도 총독의 이 치명적인 약점을 간파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며 머뭇거리는 빌라도를 향해 정곡을 찌릅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총독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여기서 폭동이 일어나 황제를 반역하는 자를 살려줬다고 로마에 고발당하면, 빌라도의 정치 생명은 물론 진짜 생명까지 끝장날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정치적 안위와 목숨을 위해, 무죄한 자를 죽음으로 내몰고 맙니다. 그는 유대인의 풍습을 빌려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나는 무죄하다. 이 판결의 책임은 너희에게 있다"며 법적, 심리적 책임을 교묘히 떠넘기는 퍼포먼스를 벌입니다.
이 끔찍한 빌라도의 딜레마는 2천 년 전 예루살렘의 관정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테헤란로의 빌딩 숲뿐만 아니라, 오늘날 가장 거룩해야 할 강단과 당회장실 안에도 버젓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교회 담임목사님들 중 아주 소수의 분들은 가끔 영적인 '가이사(황제)'가 되어 군림합니다. 그리고 그 밑에서 사역하는 부교역자들은 종종 빌라도처럼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윗선의 눈치를 보며 살아갑니다.
아주 희소하게나마 뉴스상에 회자되었던 안타까운 교회의 현장으로 들어가 적용해 봅시다. 담임목사가 절대 권력에 취해 재정을 전횡하거나, 심지어 여성도들을 향해 부적절한 언행과 일탈을 시도하기 시작했다면, 그 초반에 누군가 목숨을 걸고 직언을 했어야 합니다. 허나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좋은 게 좋은거야, 은혜로 포장하며 초기에 성도나 장로는 물론 부교역자들도 침묵했던 것입니다, 아니 매번 무딘 언어로 우회해서 정신 차리게 돕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처럼 "당신이 바로 그 죄인이오!"라고 불을 토하며 책망해야 할 입술이, 빌라도처럼 슬며시 눈을 감고 읍소하며 아부를 떠는 입술로 변해버립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직접 죄악과 아부로 점철된 비틀어진 교회 모습을 세상의 뭇매와 채찍질으로 다루십니다. 그들은 숨기고 포장하며, 자기 자리 보전하려 전전긍긍 노력했을텐데, 하나님께서 아예 온 세상 뉴스와 언론을 통해서라도 빛 가운데 드러내 정신 번쩍나게 혼내신 것입니다. 마치 구약에 회개치 않는 완악한 이스라엘 민족들을, 이방 민족의 침략(공격)을 받아 포로요, 노예 신세가 되게 해서라도 죄를 직면하고 처절하게 회개하도록 도왔듯이 말입니다.
죄를 책망한다는 것은, '정죄'라는 악의와 '충언'이라는 선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숱한 사람들을 포용하고 수용하셨지만 유독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 사두개인들에겐 가차 없이 독설로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죄와 충언을 분별할 수 있기에, 그 사이의 균형을 잡아 어린 양 같은 백성들을 도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툼과 분쟁이 아니라 회개와 치유, 화해로 물꼬를 틀 수 있는 지위를 부여 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근데 당시 태반의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 밥그릇 싸움, 기득권 유지, 뒷돈을 받는 사익 추구 등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역할은 오직 세례 요한만이 우직히 감당했습니다. 죄를 책망하는 일은 곧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일이였고 사람들이 구원 받도록 돕는 절체절명의 사명이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감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교역자들은 왜 아부할까요? 생존 때문입니다. 문제를 제기했다가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는 핑계로 사역지에서 쫓겨나면, 당장 내 가족의 생계는 누가 책임지느냐는 두려움이 진리의 칼날을 녹여버린 것입니다. 결국, 이 잔인한 인본주의적 타협 때문에 한국 교회에서는 교역자들의 끔찍한 성 문제와 비리, 곪다 터진 교회 분열, 교회 세속 등의 죄들이 곰팡이처럼 침잠되어 있다가 댐이 무너질때가 될 즈음에 드러납니다.
인간 담임목사 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하고, 진리를 수호해야 할 목회자들이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사교계의 마당발'이자 '종교 서비스업 종사자'로 전락한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거대한 이익 집단으로 변질 될 것입니다. 2000년전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 처럼 서서히 그러나 비릿하게 변질은 시간을 타고 질주하다 결국 지옥 문앞에서 멈출 것입니다.
이는 강단 아래로 내려와 평신도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반복됩니다. 테헤란로의 거대한 제국 안에서, 성도들은 상사라는 총독의 눈치를 보며 하루하루를 버팁니다. 생존과 경쟁 논리라는 거대한 중력에 휘둘려, 진리가 아닌 줄 알면서도 불의와 타협합니다. 회식 자리에서 부어라 마셔라 하는 폭음의 문화에 동참하고, 회사의 실적을 위해 적당한 거짓말과 편법에 조용히 손을 댑니다.
"다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어쩔 수 없이 하는 겁니다. 의도한 건 아닙니다."
이들은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자기합리화의 물을 떠다 놓고 손을 씻습니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로 일생 종노릇하는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은, 결국 하나님보다 내 밥줄을 쥐고 있는 자를 더 두려워하고 있다는 적나라한 증거일 뿐입니다.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저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기독교가 만약 거짓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진리라면 그것은 무한히 중요하다. 기독교에서 '적당히 중요한 것'이란 존재할 수 없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이 죄악되고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내 영혼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진리를 지켜내는 무거운 배의 닻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테헤란로의 빌딩 불빛들이 하나둘 꺼져가는 것을 보며, 나는 다짐하듯 펜을 꽉 쥡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무뎌진 말씀의 검을 다시 시퍼렇게 갈아야 할 때입니다. 인본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비겁한 눈치 보기와 아부를 집어치워야 합니다. 목회직이 끊어지고 직장에서 밥그릇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진리를 진리대로 선포하고 살아내는 그 야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세상의 중력을 이겨내는 결단, 그것만이 우리를 짐승의 생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찬란한 영광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날마다 이 믿음의 결단과 실천을 행하며 굳건히 성장해 가기를, 이 차가운 서울의 밤하늘 아래서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그림,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