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잃은 형부가 내게 가르쳐준 기독교

전생의 빚이라며, 처가 가족의 짐을 짊어주던 형부에게 집을 사주기로 했다

by 청년 클레어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0-23)


예전에 중동 모 국가에 선교 봉사를 하러 갔다가 알게 된 선교사님 부부가 있다. 사모님은 본국에 어머니가 계시는데, 사역하시느라 수년간 찾아뵙지 못한 듯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머니는 요양원에 계신다고 했다. 다행히 남동생이 근처에 살아 자주 요양원을 찾아 뵙는듯 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걱정할 사모님 마음이 안쓰러워, 귀국 후 한 달에 한번 간식을 사들고 편도 3시간 거리의 사모님의 노모를 찾아가 수개월간 정기적으로 말벗을 해드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열정적인 선교사님의 마음과 어머니가 느끼는 서운함 사이에는 온도 차가 있었다. 찾아뵙는 것은 열외로 치더라도, 통화도 자주 안 해주는 것에 어머니는 큰 서운함을 느끼고 계셨다. 아마도 선교사 사명을 반대하셨던 것 같고 그 간극에 모녀가 거리감 아니 감정의 앙금이 해소되지 않았던 것 같았고, 할머니의 노년이 외로워 보였다.


어르신은 낯선 나에게 말을 아끼셨지만, 자간에서 서운이 자주 묻어 나오곤 했다. 정황상 사모님이 의도적으로 거리을 두고 사는 것이 역력했다. 나름 많이 배우셨던 엘리트 스펙이고 그 모두를 버리고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현지에 상당한 위치에 있었건만 의도치 않게 알아버린 누군가의 비밀을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 섣부른 판단은 유보하고 싶었다. 아니 유보해 마땅했다.


근데, 이런 일은 생각보다 교회 봉사에 열정적인 성도들의 가족들에게서 가끔 아니 실은 자주 듣는 피드백이다. 일면 부모보다 예수님을 우선해야 할 사명자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는 가고 마땅하다. 다만 이게 자칫 고르반(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여 부모 부양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애매한 지점이 있기에 조금 아쉽고 씁쓸하고 했다.


이 경우뿐 아니라 교회 봉사는 열심히 하는데, 남편 밥은 안 차려준다든지, 교회에선 화목하게 지내는데 집안에서 가족들과는 자주 다툼의 진원지가 된다든지,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데 집안일은 게으르게 한다든지, 하는 일들 말이다. 물론 나도 직장 생활하는 사람으로서 모든 것에 능한 슈퍼우먼을 요구하는 것은 좀 무리한 요구일 수 있다. 이런 사소한 일 외에도, 형제간 재산 다툼의 진원지가 기독교인 형제자매인 경우도 보았다. 사뭇 교회에서와는 다른 모습들인데, 이런 풍경이 익숙해져서 이젠 그려려니 하는 듯하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1-3)



어제 우리 서치펌(내 직장)의 여자 부사장님과 식사를 했다. 왕년에 외국계 기업 임원으로 재직했던 독실한 크리스천이시다. 식사 중 불현듯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원래는 중동 국가 선교사로 가고 싶었는데, 이렇게 한국에서 홀로 계신 (88세, 치매) 어머니 간병하느라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지 못해서...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드릴 게 없을까 봐 걱정이야."


부사장님의 소녀다운 순수한 고민이 오히려 아름답게 보였다. 부사장님은 올해로 60세가 넘었고 독신으로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모시고 오랫동안 살아오시고 계셨다. 그 맘고생을 그 누가 알리 있을까 마음이 애잔해졌다.


그때 중학교 시절 극동(기독교) 방송에서 들었던, 꿈속 이야기인지 간증인지 헷갈리지만 뇌리에 깊이 박힌 이야기 하나를 공유해 드렸다. 어떤 큰 교회 목사님이 천국에 갔는데, 크리스털로 된 어마어마한 성이 있어서 '아, 내 천국 집이 저건가 보다' 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안내받은 자신의 집은 너무도 초라한 초가집이었다.


목사님은 '나만큼 헌신한 사람이 이런 집에 간다면, 도대체 저 크리스털 집은 누가 가는 겁니까?' 하고 물었다 한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 교회에서 존재감도 없이, 이름도 빛도 없이 새벽 기도 자리를 묵묵히 지키던 소심한 권사님이 바로 그 크리스털 성의 주인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은유적인 이야기였겠지만,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고 생각했다.


이 예시를 부사장님께 말씀드리고 말을 이었다.


"부사장님, 하나님은 사람들의 겉모습이나 겉으로 보이는 열매에 속지 않으세요. 그래서 항상 우리 삶과 신앙의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지가 중요해요. 아무리 몸을 불살라 헌신하고 심지어 순교를 한다 해도, 그 목적이 인간들의 칭찬과 인정, 혹은 자기 영광일 수 있는 게 인간이랍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이 땅에서 자기 상급을 다 받은 거예요.

반면에 아무도 모르는 기도의 헌신, 은밀한 섬김들을 사람들은 몰라주어도 하나님은 다 아셔요. 과부의 두 렙돈 헌금 같은 헌신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진실한 이웃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건 하나님 편에서 엄청나게 큰 헌신일 거예요."


부사장님은 그제야 긴장된 표정을 푸시고는 까르르 웃으시며 "정말 그럴까요?" 하고 반문하셨다.


어쩌면 이 땅에 발을 딛고 시간과 힘을 들여 헌신하는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부사장은 저번주에도 내 방으로 찾아오셔서 불현듯 꽃 한 송이를 선물 주고 가셨다. 그날 우리 회사 경영지원팀 과장님도 맛집 소금빵과 과자, 비타민제를 선물이라며 주고 갔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1주일에 한번 직장 동료들을 위해 자비로 사내 카페에 간식을 비치해 오고 있는데, 패턴상 간식 놓던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감기몸살로 결근하자 걱정이 되었던 것 같다. 다음날 수요일에 간식을 차려놓자 다들 득달처럼 찾아온 것이다.


우리 회사 카카오 단톡방 분위기다. 동료들 중에 기독교인이 많다.


최근에 짝꿍과 밥을 먹으면서 중국 화산의 잔도공들의 삶을 다룬 영상을 보았다. 이 영상을 우리는 이번 포함 3~4번은 본 것 같다. 볼 때마다 '어떻게 저토록 처절하게 삶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가' 싶어 마음이 아팠다.


나를 포함한 인간은 누구나, 남들은 모를 수고와 숨이 찰 듯 버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 쉬는 날조차 마음은 온전히 쉬지 못할 때가 많다고들 하며, 향방 없는 조바심을 내고, 우리 인생의 다음 장에 들이닥칠지 모를 맹수와도 같은 사건과 상황 앞에 숨을 고르며 긴장 속에 살아가곤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지금 수고하고 있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사실, 그것을 누군가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고 힘을 얻게 될 때가 있다.


'내 수고의 무게와 깊이, 이 기나긴 서사를 과연 누가 알아줄까.'


생각이 그 지점에 머무를 때면, 우리네 인생살이에 왈칵 눈물이 나기도 한다.



(67) 제대로 만들 수밖에 없다 "내가 죽지 않으려면"|아찔한 절벽 위 중국 잔도공이 사는 법|레전드|극한직업|#골라듄다큐 - YouTube


어머니 간병을 계기로, 우리 7남매는 전에 없이 대화하고 소통할 기회가 잦아졌다. 스무 살 이후 이 험한 세상에서 각자도생 하듯 치열하게 사느라,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자매 간에도 속 깊은 대화를 나눌 겨를이 적었다. 대학도 가지 못했던 큰언니는 국민학교 6학년 때 빚쟁이가 학교까지 찾아와 "부모 빚을 안 갚으면 공장에 팔아넘기겠다"라며 위협을 가하고 갔다고 했다.


셋째 언니는 초등학교 5~6학년 무렵 육성회비가 밀렸다는 이유로 반 아이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담임 선생님께 따귀를 맞았다고 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한동안은 그 선생님 생각만 하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며 깊은 상처를 드러냈다. 이 두 이야기 모두 작년에서야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모두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깊은 상처와 아픔들이 있었구나.'


그간 3명의 언니들 간 가끔 있는 트러블을 창피해했던 나는 그만 죄송한 마음을 쓸어 담아야 했다.


왜 언니들이 아귀다툼하듯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셋째 언니가 왜 집을 6~7채나 소유하며 갭투자에 열을 올리다 한순간에 날려버렸던 것인지, 큰언니가 왜 그리도 자기 것을 챙기며 종종 얌체 같은 모습을 보였는지, 퍼즐이 맞춰지며 마음이 시큰거렸다.


오빠는 신혼 때 어머니 빚 4,500만 원을 남매들 몰래 가져가 혼자 다 갚았는데, 중간에 연체가 되어 한동안 신용불량자가 된 적도 있었다고 했다. 이 또한 작년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우리 7남매 모두, 누구 하나 쉬운 인생이 없었던 것인데 참 열심히도 꿋꿋하게 살아왔구나 싶었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어머니와 우리 7남매가 헤쳐 나온 삶들, 그리고 앞으로 또 헤쳐 나가야 할 인생들이 애잔하게 다가오기도 하고, 이들이 중년과 노년에는 부디 쉼과 여유를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어쩌면 그래서 내 연봉을 쏟아붓듯 언니들의 중년과 노년이 비루하거나 빠듯해지지 않도록 재정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5-30)


셋째 언니가 집 7채를 날린 후, 셋째 형부 역시 삶이 좀처럼 회복되지 못한 채 올해로 예순넷이 되셨다.


최근 셋째 형부와 정말 오랜만에 통화를 하며, 우리 7남매가 20대와 30대를 지나는 동안 형부가 마치 아버지처럼 우리 가정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음에 깊은 감사를 전했다.


형부가 신혼 때, 약 30여년 전에, 어머니는 반 사기로 집을 날려 빚잔치를 했고 결국 어머니와 우리 가족은 월세로 나앉았었다. 형부는 신혼 때부터 '장모님 아파트 사주는 게 최대의 소망'이라며 노래를 부르셨다. 당시 노량진 공무원 쪽 일타 강사라 연봉이 2-3억이 넘었던지라, 형부는 이내 그 소망대로 우리에게 아파트를 덜컥 사주셨다.


그 이후로도 생활비, 종종 외식할 때 비용도 셋째 언니 편으로 넉넉히 대주었다. 그 과정에서 한 번도 잘난 척을 하거나 생색을 내지 않고 말이다. 참고로 형부는 고액연봉자였으나 나처럼 운전면허 없이 대중교통을 늘 이용하던 검소한 분이기도 했다. 한 가지, 형부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는 것이 내내 목에 걸리는 기도제목이었다.


그런 형부가 13년 전엔가, 온라인 교육사업을 하자는 제안에 반사기를 당해 자금이 엉키면서, 도미노처럼 우리 집을 포함 모든 집을 차례로 날렸던 것이다.


"형부, 제가 어떻게든 두 분 노년에 편히 살 온전한 내 집(自家) 하나는 꼭 마련해 드릴 테니까 노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에 독실한 불교 신자이신 형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이다, 나는 한 번도 뭘 도와주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전생에 아마도 내가 너희 가족들에게 큰 도움을 받아서 현생에 그 은혜를 갚는 거라 생각했으니, 그런 마음 갖지 마라."


기독교인인 나는 타 종교인이지만 형부의 이토록 성숙하고 선량한 태도에 도리어 깊은 도전을 받곤 한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이 정도로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분들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나 살기도 바쁜데 누가 처가에 집을 사주려 하고 물주 노릇을 하려 하겠는가 말이다. 근데 우리 집은 올케언니-독실한 기독교인-도 그렇고 짝꿍 천재도 그렇고 참 선량한 분들이 가족이 되어 감사하다. 우리 집 가풍 때문인지, 다들 당연하게 시댁, 장모님 댁을 살피고 채워주곤 했다.


돌이켜보면, 셋째 언니와 형부네는 어쩌면 내가 오랫동안 기도해 온 '가정 복음화'를 위해 우회적인 연단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형부같이 좋은 분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워낙 형부네 집안이 불교에 독실하고 인품들이 훌륭하여 쉽지 않았던 터였다. 그래도 형부는 13년 전 집을 모두 날렸을 때부터 셋째 언니를 교회로 전도해도 좋다고 허락해 주셨다.


셋째 언니도 요즘은 거동이 불편하신 엄마 곁을 지키며 주일 영상 예배를 귀동냥으로 함께 드리고 있다. 겉으로는 엄마 옆에 그저 앉아 있어 주는 모양새지만, 어느 날 보면 예배 말씀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모습이 보이곤 한다.


셋째 형부와 통화를 마친 날, 형부가 예순넷의 연세에 부정맥, 협심증, 고지혈증, 고혈압을 모두 안고 살아가고 계심을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증상이 심해지면 심장 박동기를 달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훌륭한 인품을 가지신 형부가 그동안 누구 하나 탓하지 않고 홀로 얼마나 버겁게 삶의 짐을 지고 살아오셨을까 생각하니 미안함과 걱정이 물밀듯 밀려왔다.


며칠 전 주일, 셋째 언니에게도 형부에게 말씀드렸던 '노후 자가 마련 프로젝트'를 다시금 굳게 약속했다. 노년에 두 분이 편히 쉴 온전한 집 하나는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 드리겠다고 말이다. 언니는 딱히 거절하지 않으면서도 미안해하며 당장 1천만 원을 구할 수 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한번 마련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내 복안은, 어머니 집이 재개발되어 값이 오르면 되팔아 그중 일부로 셋째 언니와 형부의 집을 사드리는 것이다.


어제 짝꿍 천재는 어디선가 1000만 원을 구해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내가 가족들을 애잔해하는 것을 잘 알기에 걱정을 덜어주려고 한다. 마치 오래전 셋째 형부나 올케언니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진실한 가족 사랑, 이웃 사랑이 점차 희귀해지는 시대다. 다들 나 살기도 힘들어 그렇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과 혀가 아닌 삶 그 자체로 우리 가족을 보듬어 주었던 셋째 형부의 헌신과 희생처럼, 기독교인인 나와 우리도 더욱 진실한 사랑으로 진리의 묵직한 진정성을 세상에 전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