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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Oct 23. 2023

광화문 글판(2) 살아온 기적

브런치를 넘어 담담히 나와 우리네 삶의 기적들을 쓰고 싶다

2023년 10월 23일(월) 아주 화창함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김종삼, 시 <어부>  ㅡ



광화문 글판에서 보았던 글귀. 삶은 그 모든 순간이 기적의 연속이라는 말에 공감이 되었다. 특히 기적이라는 단어에 힘을 줄 때 느껴지는 얼얼한 감정과 묵직한 무게에 눈물이 핑 돌았다.


브런치에 과거의 내 삶을 쓰면서 글이라는 게 새삼 신비롭게 다가온다. 어렸을 때도 또 현재까지, 삶에 무너지지 않고자 또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고자 내달리느라 놓쳤고 묻혔던 기억들. 그것이 현재로 소환되고 추억되는 대목들은 때론 판도라의 상자처럼 얼얼하게 아른 감정이 재현되기도 하고 그 시절 설익었던 인격과 소양에 회한이 밀려들기도 한다.


나는 봉천동 산 81번지에서 그것도 집에서 태어났다. 내 출생 관련해서 산부인과 기록이 없는 이유다. 그 시절 가난과 결핍, 아픔을 가족이나 이웃과 연대해서 함께 겪을 당시엔 힘들다 느낄 겨를도 없었다. 살아내야 한다는 본능은 삶을 관조적으로 만들며 때론 그것은 밝은 에너지를 회복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잊고 싶었던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 현재를 교란시킬때 더 아프게 느껴지기까지 하다. 그 당시엔 허겁지겁 살아내느라 내가 아픈줄도 몰랐던 것 같다. 할머니 이귀애의 단상을 쓰고 나서 실은 며칠간 마음을 앓았다. 가볍게 몸살도 와서 종합감기약도 먹었다.


생각해 보건대, 브런치에 글을 쓰기 전까지는 나를 대놓고 '알코올중독 가정폭력 속에서 자란' 사람으로 네이밍 해서 대대적으로 공표한 적이 없었다. 소소한 개인 간 소통이나 신앙모임에서는 있었지만 말이다. 동시에 나랑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분들이 아직도 그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분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도 새삼 알게 되었다.


'직장일이 너무 바쁜데 몸살을 앓아가며 브런치에 글을 계속 써야 하는 것일까?'


이런 고민이 종종 들긴 했다. 그러나 이내 내가 다른 사람을 돕는 걸 유독 좋아하는 성향임을 절감했다. 즉 내 글로 단 한 사람이라도 위로와 격려, 치유의 단초를 얻을 수 있다면 쓰는 게 맞다는 생각으로 가닥을 잡았다. 미처 못 낸 육성회비처럼 드러내기 부끄러운 대목도 있으나 나 한 사람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겐 삶의 연고가 된다면 시간이며 몸살이나 마음앓이인들 못 하겠는가. 반대로 이 글쓰기가 절대자(하나님)가 보시기에 여러모로 유익하지 않으면 나는 그날로 펜을 놓을 마음도 있다. 즉 마음을 비우고 쓰려고 애쓰고 있다.





이젠 보통 어떤 글들이 브런치에 픽되고 포털에 메인으로 뜰지도 조금 감이 오곤 한다. 가령 내 브런치글  <K봉지 밖에 없어 죄송합니다>라는 글을 쓰고 나서 이건 pick 되겠구나 싶었는데, 진짜 바로 pick 되었다. 조회수가 하루 만에 천 단위로 올라갔다.


'내 글에서 백과사전 링크 참조를 빼고 큐티(성경묵상) 발췌를 빼고 브런치의 취향대로 말깔스럽게 편집하고 주제를 선정해서 쓰면 되는구나.'


그런데 이상한 저항감이 들었다. 브런치의 컨셉이나 취지에 너무 공감되고 좋은데, 그냥 내 마음이 닿는대로 편하게 글을 써가고 싶다고 말이다.


내 브런치 구독자에는 직장일로 알게 된 분들도 있고, 교회 동생도 있고 무엇보다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훌륭한 작가님들이 많으시다. 사실 구독이나 라이킷을 하지 않고도 꾸준히 몰래 구독하는 분들도 150명~200명 이상은 되시는 듯하다. 누굴까요?^^ 그래서 더욱 브런치의 pick에 개이치 않고 그분들 매일의 일상에 말벗이 되는 맘으로 글을 쓰고 싶다. 때론 인생의 고뇌를 함께 나누고 파이팅도 외쳐 드리면서 말이다.


달동네 공동체가 <고통이라는 어두움>이 있었지만 <이웃 간 정이라는 밝음>도 있었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곤 한다. 그래 도시 재개발은 결핍을 일부 거둬낸듯 하지만 이내 그 이웃 간 연대마저 빼앗아가 그들이 도시에서 지탱하던 삶의 지팡이를 빼앗아 버렸다고 말이다.


내가 자란 달동네는 가난하고 결핍이 많았지만 단언컨대 굉장히 훈훈하고 따뜻했다. 이웃 간의 정이 없었다면 우리 가족이 엄동설한 같은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대학교때 선교단체 선배들은 내 인생의 질곡을 꽤 많이 듣고는 말하곤 했다. 어떻게 그런 환경에서 이렇게 반듯하게 자랐냐고, 상처나 우울감까지도 다 털어낸 지금은 어떻게 그렇게 밝고 따뜻한 사람이 되었냐고도 한다. 절대자의 은혜와 정말 많은 분들의 희생과 도움 덕이었다.


브런치 마을에서 나는 내가 받은 수혜를 되갚는 빚진 마음으로, 앞으로도 시간을 내서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이다. 도시 재개발이 앗아간 이웃간 정을 이곳에서나마 풀어 보고자 한다. 우리 모두의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되어 많은 기쁨이 알알이 맺히도록 말이다










어부 (김종삼)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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