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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욱 Mar 02. 2021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 스케치

<마음으로 보는 그림 이야기>


∙ 단상_핑크의 애환


  지하철을 타면 임산부 배려석을 살펴본다. 좌석이 비어있는지 누가 앉았는지, 앉은 사람이 있다면 과연 임산부인지 의심을 한다. 임산부 배려석이 제대로 활용되기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가끔 피로할 때 그 자리에 앉고 싶다. 그러나 노약자 보호석에는 빈자리가 있어도 앉고 싶지 않다. 몸이 불편한 사람이 앉았다가 그 좌석이 오직 경로석으로만 생각하는 노인에게 호되게 욕먹는 모습을 목격했고 그런 기사를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반면 임산부 배려석은 그 주체가 당당한 목소리로 요구하지 않기에 사람들이 임산부도 아니면서 거리낌 없이 앉는 것 같다. 차별이나, 역차별, 특별대우라 생각하지 말고 가족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엄마, 누나, 여동생, 딸, 손녀가 겪어야 하는 문제니까 배려해야 한다.    

  임산부 배려석의 핑크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핑크가 상징하는 범위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상징하고, 모성을 의미하고 사랑이나 포르노그래피까지 포괄한다. 또한 핑크는 유방암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회는 핑크색에 부드럽고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한 수동적인 이미지를 심어 놓았다. 요즘 진취적인 여성들은 이런 핑크의 이미지를 좋아할 리 없다. 인도에서는 핑크가 점잖고 보수적인 색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색은 사회 문화적으로 전혀 다른 색깔로 받아들여진다. 앞으로 개발하는 지하철 객차의 임산부 배려석은 정말 임산부가 아니라면 감히 앉을 엄두가 나지 않게 독립된 좌석 배치에 컬러도 핑크색이 아닌 적극적이고 강렬한 빨간색으로 했으면 좋겠다. 지금은 일반 좌석에 컬러만 다르기 때문에 은근슬쩍 앉거나 모르고 앉기도 한다. 

  나는 핑크가 지닌 의미와 상관없이 분홍색을 좋아한다. 집안에 분홍색 물건이나 꽃이 있으면 마음이 느긋하고 편안해진다. 책상에 앉아 일하다가 주변의 분홍색을 바라보면 나를 묶어 놓았던 그물에서 풀려나는 기분이 든다. 핑크는 신비롭고 고상한 색인 것 같다. 핑크는 여성의 이미지보다는 헌신, 노력, 존중, 감사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또한 핑크는 달래주고 보호해주는 에너지를 발산하기 때문에 난폭한 행동이 나타날 수 있는 장소에 사용하면 안정제 효과가 있다고 한다. 실제 스위스 페피콘 교도소에서는 실내를 분홍색으로 칠하자 수감자들의 공격성이 낮아졌다고 한다. 

  가끔 분홍색 옷을 입는다. 분홍색 옷이 몸을 감싸는 필터가 되어 빛에너지를 조절해 주는 것 같다. 상대방이 분홍색 옷을 입으면 부드럽고 상냥한 느낌이 든다. 몸에 필터를 걸치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핑크를 감상하면 에너지가 충전된다. 10월 중순 지나 종로에 있는 조계사에 갔더니 정원에 국화와 어우러진 핑크뮬리 만발했다. 벼과에 속한 식물이 내는 가을의 핑크빛은 선명한 핑크가 아니라 탈색하여 염료가 빠진듯한 색상이다. 핑크뮬리를 바라보면 핑크빛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것 같아서 몽환적이다. 줄기 마디에 난 털과 줄 모양의 입 때문에 안개 같은 형상을 만들어낸다. 바람이 불면 햇살을 반사하는 줄기가 반짝거리며 품 안으로 들어오라고 유혹한다. 핑크의 이미지는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핑크가 감사와 응원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밤이 되면 핑크로 치장한 서울의 명소를 감상할 수 있는 서울 핑크라이트 캠페인이 2020년 10월12일부터 11월11일까지 진행됐다. 코로나19를 함께 이겨내는 서울 시민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서울 곳곳에 핑크빛 조명을 밝힌 것이다. 역시 핑크는 에너지를 충전해 주는 색이다. 시청 신청사 유리 벽에 보라에 가까운 핑크빛이 들어오자 투명한 괴생물체의 몸에 피가 흐르는 것 같아 웅장해 보였다. 세종문화회관은 처마 밑만 단청을 그리듯이 핑크빛으로 치장해서 포인트를 준 것처럼 강렬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우주선 같은 건물에는 핑크 띠를 두르듯이 건물에 절제된 여덟 줄의 핑크빛 라인조명이 들어와서 마치 건물이 갈라지면서 핑크빛 용암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세빛섬은 전체적으로 핑크빛으로 연출하여 세 개의 연꽃이 한강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멀리서 바라본 남산 서울타워는 언 땅을 뚫고 나온 새순 같았다. 줄기 같은 원형 기둥이 핑크 빛을 내면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모습 같았다. 이렇게 술을 마시지 않고 서울의 밤거리를 신나게 돌아다닌 것은 처음이었다. 서울의 명소를 돌아다니며 그 건축물과 공간이 핑크빛으로 이야기하는 희망에 흠뻑 취해 집으로 왔다. ■



∙ 스마트소설_ 유 오케이, 아임 해피, 한잔해


  스크린도어가 열리고 열차의 문이 열린다. 열차에 오른 그녀의 배는 볼록하다. 열차 중앙에는 하얀 셔츠를 입은 흑인 남성과 그의 아들 또는 조카로 보이는 흑인과 동양인 혼혈 남자아이가 승객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양복 상의를 벗어 한 손에 들고 있는 흑인 남성은 길고 미끈하다. 구김 하나 없는 하얀 셔츠의 질감과 초콜릿보다 진한 피부의 오묘한 조화는 전철과 어울리지 않는다. 흑인 남성은 기사가 딸린 검정 세단 상석에 앉아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녀는 고개를 빼고 열차 안을 둘러본다. 그녀를 위한 빈자리는 없다. 좌석에 앉아 흑인 남성과 혼혈 아이를 쳐다보던 사람들은 이제 스마트폰으로 눈을 돌린다. 그녀는 숄더백의 어깨끈을 끌어올린다. 반쯤 열린 가방 지퍼 사이로 노란 책이 보인다. <랩으로 배우는 생활영어> 그녀는 출입문 바로 옆 파이프 기둥이 있는 좌석 앞에 자리 잡는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피어난 땀 송이를 두드린다. 이마에 솜털이 가득한 그녀는 제 나이보다 앳되어 보일 것이다. 옆에 오십 대 아줌마가 그녀의 볼록한 배를 보며 몇 개월이냐고 묻는다.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손수건으로 목에 피어난 땀 송이를 계속 두드린다. 눈을 크게 뜬 흑인 남성이 혼혈 아이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 다가온다. 스마트폰을 보던 몇몇 승객의 시선이 흑인 남성과 그녀의 볼록한 배로 옮겨진다. 객차 천장에 달린 스크린에 다음 정거장 안내 자막이 나온다. 그녀가 서 있는 앞 좌석의 여자 승객이 몸을 꼬며 천천히 일어난다. 승객이 앉았던 자리는 핑크색이다. 혼혈 아이가 자리에 앉으려하자 흑인 남성이 혼혈 아이의 손을 잡아당긴다. 흑인 남성은 웃으면서 그녀에게 핑크색 좌석을 권한다. 흑인 남성의 가지런한 앞니는 셔츠보다 하얗다. 좌석을 가리키는 흑인남성의 손은 길고 손톱은 엷은 밤색이다. 그때 열차가 정차하고 문이 열린다. 헐레벌떡 객차에 오른 오십 대 아저씨가 잽싸게 핑크색 좌석에 앉는다. 아저씨는 엉덩이가 크다. 옆 좌석 이십 대 아가씨가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가 다시 앉는다. 흑인 남성은 영어로 오십 대 아저씨에게 뭐라고 한다. 오십 대 아저씨는 흑인 남성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녀는 흑인 남성을 진정시키며 영어로 중얼거린다. 흑인 남성은 그녀의 말을 듣고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오십 대 아저씨는 흑인 남성을 빤히 바라보다가 팔짱 끼고 눈을 감는다. 흑인 남성은 이해할 수 없다는 몸짓으로 오십 대 아저씨와 그녀를 번갈아 본다. 객차가 정차하고 문이 열리고 스크린도어가 열리자 그녀는 볼록한 배를 안고 내린다. 그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볼록한 배를 만지며 중얼거린다. 


지하철은 만석, 내 배는 만삭

사람들 시선을 한몸에 받지

용감한 아줌마 내 배 만지네, 몇 개월이야?

핸섬한 black man 내 배 보고 웃네! oh my gosh!

이건 너무하지, 날 구원해 줄 pink seat, 그마저 채가는 발 빠른 한남충 자비란 없지

다가오는 black man, 눈썹이 꿈틀 입술이 씰룩, Hey man look!

숨이 차올라 열이 타올라, 고막을 울리는 화려한 블라블라

That's ok! That's ok! I'm so so ok! 터져 나와 본토발음

나 이제 프리토커, 기다려요 영어티쳐

Are you ok? That's ok! I'm happy now.


  무척 맑은 날이다. 삼겹살집 창문 위로 드리워진 차양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선글라스와 모자를 쓴 김 여사와 박 여사가 가게 안으로 들어온다. 식당 주인인 칠십대 할머니가 사십 대 아들을 부른다. 오늘따라 돼지기름에 전 식당 테이블이 유난히 번질거린다.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던 식당 아들은 못 들은 체한다. 음식 재료를 다듬던 할머니가 주방에서 나와 물병을 들고 가서 주문을 받는다. 김 여사가 박 여사에게 묻는다. 술은 뭐로 할래? 참이슬 후레쉬. 할머니가 아들에게 소리친다. 그제야 아들은 일어나서 숯불을 피우우고 냉장고에서 참이슬 후레쉬를 꺼낸다. 술상이 차려진다. 할머니가 방금 무친 겉절이, 오늘 들어온 국내산 생삼겹살을 보고 입맛을 다시던 박 여사가 소주병을 딴다. 김 여사가 달궈진 불판에 생삼겹살을 올린다. 하얀 연기와 함께 살점이 불판에 달라붙는다. 파 무침을 깨지락거리던 박 여사가 소주잔을 든다. 김 여사도 소주잔을 든다. 잔을 부딪친다. 불판에 떨어진 술이 수증기를 뿜어낸다. 역시 낮술이 맛있어. 이게 얼마 만이니 우리 자주 만나자. 어디 고장 난 데는 없니? 말도 마, 딸 시집보내고 적적해서 홀로된 친정엄마 모시고 산다. 일찍 결혼한 딸은 잘사니? 말도 마 그년은 배가 남산만해가지고 영어회화 배우러 다닌다. 요즘은 태아 때부터 영어공부 시킨 데. 김 여사가 고기를 뒤집고 박 여사는 새 고기를 올린다. 엄마랑 살면 반찬 걱정 안 하겠네. 무뚝뚝한 남편은 엄마가 아침마다 야채주스 챙겨주니 불만 없어. 보기 좋다. 엄마는 내가 퇴근하면 웃음꽃 피워. 반기는 사람 있으니 얼마나 좋아. 요리책을 보고 만든 반찬 먹지 않으면 엄마가 삐져. 술만 마시지 말고 고기도 먹어. 옷 살 때 엄마 것도 같이 사고 나면 한숨 나와. 그게 한숨 나올 일이니.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 엄마도 함께 늙어갈 자식 필요. 나랑 바꿀래? 엄마 집은 어떻게 했어? 

  여기 참이슬 후레쉬 하나 더요. 식당 아들은 계산대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할머니가 주방에서 머리를 내밀고 소리친다. 장사하기 싫으냐. 그제야 아들은 일어나서 처음처럼을 들고 온다.

  아저씨, 우린 후레쉬야. 아들은 처음처럼을 들고 냉장고로 간다. 넌 좋아 보인다. 요새 관리받니? 혼자 다니지 말고 같이 다니자. 아들이 참이슬 후레쉬를 가져온다. 박 여사는 소주를 단숨에 들이켜고 빈 잔을 든다. 김 여사가 잔을 채운다. 박 여사는 잔을 든 채 입안에 든 고기를 마저 씹는다. 삼겹살과 같이 싸서 먹은 마늘이 맵다. 잔을 내려놓고 냉수 한 컵을 들이킨다. 내가 좋아 보이니? 김 여사가 새카맣게 탄 고기를 불판에서 집어낸다. 박 여사가 집어낸 고기를 뒤집어 보더니 한숨을 쉰다. 삼십 년 넘게 버럭대니 속이 새까맣게 다 들어간다. 남편이랑 아직도 싸우니? 아직 애정이 남아있구나. 박 여사가 소주 반 잔을 마신다. 멀쩡한 직업 가진 아들이 왜 결혼 생각이 없는지. 요즘 결혼 다 늦게 하잖아. 네 딸은? 걔는 특이한 애고. 살아생전 며느리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을 수 있을까. 넌 꿈도 야무지다. 손자 보고 싶다니까 아들이 말티즈 암컷을 사왔어. 요즘 프린츠 불도그가 유행인데. 드러누워 티브이 보는 아들과 남편 보면 한숨이 절로 나와. 큰일이다. 우리 남편 내년에 퇴직인데. 언제까지 뒤치다꺼리해야 하는지. 딱 한 병만 더 마시자. 여기 참이슬 빨간 거요. 

  오후의 햇살이 기름진 테이블을 떠난다. 식당 아들이 물어보지도 않고 숯불을 뺀다. 김 여사와 박 여사는 스타벅스 아이스아메리카노가 간절하다. 반이 넘게 남은 소주병에 맺힌 물기가 흘러내린다. 이십 대 다정한 연인이 들어와서 수입산 냉동 삼겹살을 주문한다. 술은요? 처음처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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