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보는 그림 이야기>
지하철역 앞에 와서야 스마트폰을 집에 두고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 때문에 집에 돌아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스마트폰 없이 하루를 보내기로 마음먹고 지하철을 탔다. 승객들을 저마다 작은 액정화면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처음엔 그냥 허전하더니 차츰 세상으로부터 고립 당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불안했다. 스마트폰이란 정신없는 나를 대신하여 기억하고 생각하는 도구였고 잠들기 직전까지 함께하는 한결같은 동반자였다. 온종일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사람과 만나 대화를 나눌 때도 스마트폰과 함께 했다.
안국역에서 내려 목적지로 향하는데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던 공중전화 박스가 눈에 들어 왔다. 공중전화는 나를 위해 지하철역까지 마중 나온 고향친구 같았다. 하도 오랜만에 만나 서로 잠시 눈빛을 교환하다 다가가 포옹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동안 땅의 생김새와 땅 위에 있는 모든 물체를 외면하고 스마트폰 스크린만 들여다보느라 공중전화가 항상 그 자리에 외롭게 서있는 줄도 몰랐다. 공중전화 박스는 마음을 열고 누구든 어서 들어오란 듯이 문이 없었다. 어렸을 적 공중전화박스의 추억이 떠올랐다. 접이식 문이 있어 전화를 하는 동안 거리의 소음을 차단해 주었고 겨울에는 친구를 기다리다 공중전화박스 안에 들어가 차가운 바람을 피한 적도 있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공중전화는 동전을 삼키면서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애절함을 가르쳤고, 사랑에 실패했을 때는 그리움의 상징이 되어 자신을 괴롭혔다. 공중전화박스에는 가끔 훈훈한 인정이 남아 있기도 했다. 공중전화를 지나치다가 수화기가 전화기 위에 있으면 남은 통화요금으로 보고 싶은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묵직한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르고 신호가 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 사람에게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안국역에 서있는 공중전화가 반가워서 한참을 관찰하는데 아침에 그녀가 나와 통화하고 싶다고 보낸 문자메시지가 생각났다. 나는 그녀에게 오후에 전화를 달라고 했던 것이다. 점심을 먹고 집에서 나왔으니 오후였다. 그녀가 전화를 했을 수도 있었다. 전화를 했다면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전화를 했을 것이다. 그때 길 건너 운현궁 앞으로 연인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정히 손을 잡은 연인은 모습에서 지난날 그녀와 운현궁에서 전통혼례를 예약했던 일이 떠올랐다. 혼사는 집을 구하는 문제가 발단이 되어 사사건건 의견이 합쳐지지 않아 취소되었다. 그녀와 미련이 남아 가끔 연락을 하면서 서먹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녀가 마음에 둔 얘기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문자메시지는 알맞지 않고 굳이 만날 것 까지는 없는 그런 얘기의 내용을 상상하면서 공중전화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분주한 거리의 틈에 자리 잡은 네모의 공간은 작은 안식처 같았다. 세상은 거의 네모난 것들로 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런 각진 세상에 모나지 않게 살려고 발버둥 치다 보면 신경 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보면 중요한 것을 놓치거나 잃어버리게 된다.
묵직한 수화기를 들지만 동전이 없었다. 다행이 티머니카드를 사용할 수가 있었다. 전화번호를 누르는 버튼은 네모가 아니라 동그라미였다. 금속재질이지만 검지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010 밖에 누를 수 없었다. 애써 그녀의 스마트폰 번호를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동안 음성통화를 했다 해도 저장 된 단축 버튼을 눌렀을 뿐이었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우리의 관계를 함축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와 다시 잘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인지 몰랐다. 그동안 사소한 것부터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들 모두를 스마트폰이 책임지고 있었다.
그녀의 스마트폰 번호를 기억하기 위해 애쓰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와 걸었다. 걸으면서 계속 스마트폰 번호를 생각했는데 생각나지 않았다. 걷는 동안 끊임없이 시선을 액정 화면에 두거나 누군가와 통화하는 사람들이 내 앞을 스쳐지나갔다. 카페 안에서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잠시 서서 관찰했다. 스마트폰을 잡은 팔의 각도에 따라 표정이 달라보였다.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통화하는 어느 여자는 팔꿈치가 몸으로 밀착되면서 몸이 기울어져 쓰러질 것 같아 보기만 해도 어지러웠다.
걷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독도서관 앞이었다. 나를 그곳으로 끌어당긴 것은 추억이었다. 매년 벚꽃이 피면 그녀와 북촌을 거닐다 커피를 사들고 도서관의 너른 마당으로 갔다. 등나무가 무성하여 햇살을 가려주는 길의 벤치에 앉아 같이 책을 보곤 했다. 정독도서관 입구에 공중전화박스가 있었다. 안국역 앞에 있던 파스텔 색상의 초라한 공중전화박스와 달랐다. 짙은 밤색과 금색으로 치장하여 궁중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공중전화박스였다. 공중전화도 두 대가 나란히 붙어 있어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아마 외국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거리라 신경을 쓴듯했다. 화려한 공중전화 박스 안에 들어가 수화기를 들어도 그녀의 스마트폰 번호는 생각나지 않았다. 서둘러 볼일을 보고 집으로 달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와 싸우고 온종일 방에서 뒹굴었다. 다음날 훌훌 털어버리려고 전철역 근처 선술집에 갔다. 처음처럼 한 병, 카스 한 병을 시켜 소맥을 만들어 칼칼한 목부터 축이고 나서 손바닥만 한 반건조 노가리를 한 마리를 시켰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보니 자기께 아니었다. 그날 그녀의 방을 뛰쳐나오면서 그녀의 스마트폰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는 그녀의 생일에 최신 스마트폰을 사주면서 자신도 같은 모델로 바꾸고 케이스도 같은 것으로 끼웠다. 그는 그녀의 스마트폰 케이스 뒷면에 붙은 그녀와 똑 닮은 고양이 캐릭터 스티커를 만지작거리다가 노가리의 바삭한 껍질과 속살이 잘 드러나게 사진을 찍었다. 초장과 마요네즈 종지는 다정해 보였다. 둘이 같이 왔으면 두 마리를 시켰을 것이다. 소맥 석 잔 을 들이키자 노가리 대가리만 남았다. 대가리를 입에 넣고 깨물자 흙을 씹은 것처럼 버적거렸다.
아주 컴컴한 밤에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그녀는 피곤한 몸을 뒤척이다 간신히 눈을 떴다. 손을 뻗어 베개 옆을 더듬어 스마트폰을 잡았다. 자신의 스마트폰이 아니었다. 순간 그의 스마트폰을 집어 던져 산산조각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참았다.
그는 노가리 한 마리에 맥주 한 병을 더 시켰다. 지금까지 먹은 것을 계산해 보니 제법 나왔다. 둘이 만나 이 금액을 각출했으면 든든하게 먹고 마셨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주 한 병과 노가리 한 마리를 시켜 먹고 선술집에서 나왔다. 집으로 가는데 길게 늘어선 불빛이 날리면서 춤을 췄다. 집으로 가는 골목 입구에서 공중전화부스를 발견했다. 순간 과거의 어느 시점에 떨어진 듯했다. 사진을 찍으려고 주머니를 뒤졌는데 스마트폰이 없었다. 그는 그녀와 싸우고 나면 주의력이 떨어지고 건망증이 심해졌다. 그녀를 술집에 두고 나온 기분이 들어 술집으로 다시 가려고 돌아서는데 취기가 훅 끼쳐 올랐다. 가로수와 공중전화부스 사이에는 재활용품들을 담아 묶은 비닐봉지가 쌓여있었다. 공중전화부스도 쓰레기가 되어 수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공중전화가 진짜인지 확인하러 다가갔다. 손을 뻗었지만 잡히지 않았다. 몇 걸음 더 다가가서 공중전화 부스 안에 올라섰다. 손을 뻗어 묵직한 수화기를 들었다. 주머니의 동전을 모두 꺼내 투입구에 집어넣고 그녀의 스마트폰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받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 그녀의 스마트폰은 선술집 계산대 서랍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몸을 일으키는데 그의 스마트폰이 또 진동했다. 그녀는 자신의 스마트폰 번호가 뜨길 기다리는데 아니어서 받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그의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스마트폰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목이 타들어 갈 듯한 갈증이 났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셔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화장실까지 가는 동안 중심을 못 잡아 여러 번을 부딪쳤다. 양변기에 앉았는데 손이 허전했다. 멍하니 있다가 아랫배에 힘을 줬다. 모든 감각이 퇴화한 느낌이었다.
오래전 공중전화는 동전을 삼키면서 사랑에 빠진 그에게 애절함을 가르쳤다. 사랑에 실패했을 때는 그리움의 상징이 되어 자신을 괴롭혔다. 공중전화에는 훈훈한 인정이 있었다. 공중전화를 지나치다가 수화기가 전화기 위에 있으면 남은 통화요금이 자신을 재촉했다. 공중전화의 묵직한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르고 신호가 가면 가슴이 뛰었다. 멀리서 첫사랑이 달려오는 것 같았다. 첫사랑이었는지 첫사랑의 엄마였는지 목소리를 듣자마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공중전화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자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것이 싫어졌다. 이런 천연기념물은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려야 하는데 스마트폰이 없었다.
그녀는 화장실 거울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관찰했다.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말라붙은 여자가 거울 속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눈은 퀭하고 가슴은 쪼그라들어 피부에 윤기라곤 없었다. 그동안 스마트폰을 쳐다보느라 거북목이 되어있었다. 거울 표면을 더듬었다. 차가운 감촉이 좋았다. 얼굴을 가져다 댔다. 조금 정신이 맑아졌다.
그는 취기에 숫자 버튼이 희미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그녀가 가지고 있을 자신의 스마트폰에 전화를 다시 걸었다. 통화 연결 음악이 나왔다. 자신이 설정한 것이지만 낯설었다. 그녀는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재다이얼을 눌렀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삐 소리가 난 후에 메시지를 남겨 주세요.”
“여긴 오늘 발견한 공중전화야. 오늘 거리가 텅빈 것 같아.”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그가 사춘기 시절 즐겨 부르던 남성그룹의 노래였다.
“……떨리는 수화기를 들고 너를 사랑해 눈물을 흘리며 말해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야윈 두 손에 외로운 동전 두 개뿐 라라라…….”
그녀는 거울 앞에서 비눗갑을 귀에 대고 팔꿈치를 몸으로 밀착했다. 팔이 꺾이는 각도를 잘 잡을수록 매력이 있어 보였다. 계속 자세를 잡아보면서 신형 스마트폰을 통해 더욱 매력적인 모습으로 변할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가 사무실에서 어깨와 귀 사이에 스마트폰을 끼운 채 서류를 찾던 모습이 떠올랐다. 꺄우뚱한 그의 모습에 반했다. 그러나 이젠 아무 의미 없었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샤워기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다 물을 뿜었다. 이번엔 샤워하면서도 쓸 수 있는 방수기능이 있는 스마트폰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