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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상 Mar 09. 2021

그걸 기억하자고

믿음. 어쩌면 그건 맹목적이면서도 실체가 없는 것. 말로는 수 백번 수 천 번 외칠 수 있어도 막상 증명하기는 어려운 것.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의심의 티 하나는 경우에 따라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도 있는 것. 나는 나를 믿지 못했다.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든 동력이라 본다면 일정 부분은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지. 내가 만든 성과들, 성취, 결과는 전부 운으로 생각하며 과정과 노력은 부정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에 몰두하고 집중하고 시간을 쏟고 나면 돌아오는 허탈감이 컸다. 꼭 누가 알아줘야 하는 게 아니라면 나라도 알아줘야 했을 텐데 그러지 못한 시간들이 참 길고 많았네.


아, 지난 시간들에 대해 후회하고 반성하려고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이제는 한 아이의 부모가 된 고등학교 친구는 내게 항상 재수 없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때는 그 말이 고민이 되는 순간들도 있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수긍하는 편이다. 맞다. 나는 재수가 좀 없는 타입이다. 까탈스러운 부분도 있고 예민한 부분도 있다. 다들 누구나 다양한 면을 갖고 있겠지만 나는 좀 유난스러운 부분들이 있지. 그러면서 또 표면적으로는 지극히 개인주의자이다. 그래서 때때로 무심하기도 한데 사실 그건 그런 척하는 경우가 더 많다. 신경을 쓰게 되면 내가 힘들어질 걸 아니까 애써 모른 척한다. 그리고 모른 체하는 동안 또 힘들어한다. 이건 거의 바보네. 바보.


우리 때만 해도 성적표에 부모님 사인을 받아와야 했고 담임선생님은 코멘트를 한 줄씩 남기셨다. 아직까지 기억이 나는 멘트가 하나 있는데 정말 얄미울 정도로 관리를 한다라는 말이었다. 담임선생님 과목이 국어였는데 기말고사 때 시험이 좀 어려웠다. 그럼에도 중간고사와 별반 다르지 않게 성적을 잘 유지했다는 의미였다. 그런 아이였다.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욕심도 있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떻게든 노력해서 해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예상대로였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야.


어른의 세계는 중고등학교 시험과는 달랐다. 노력으로 되는 부분과 재능으로 되는 부분이 극명했다. 지금까지 내 세상은 노력으로 되는 것들이었다. 어느 정도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도 시간을 투자하면, 관심을 가지면, 다른 것들을 참고 기다리면 가지진 못하더라도 만져보거나 손을 댈 수 있는 세계였다. 근데 그게 아니더라. 발버둥 칠수록 수렁에 빠지고 나락에 빠질 수도 있더라. 혹은 손짓 하나로 날아가기도 하고. 더 이상 노력은 내가 알고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재능 역시도 내가 모르는 뜻이 많았다.


그렇다 해서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모든 걸 놓아버리지도 못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 안에서 괴로워하면서도 끊임없이 발버둥을 쳤다. 단, 표정만은 조금씩 온화해지기로 한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이 시간들은 내게 큰 의미가 없는 것처럼 가면을 썼지. 원하지 않는 척. 애초부터 그렇게 가지고 싶지 않았던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한 척, 시크한 척. 그리고는 가끔씩 크게 무너졌다. 신을 원망하다 용서를 구하고 다시 욕을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작년쯤 마음을 고쳐먹었다. 적어도 나의 세계에서 요행은 없다는 믿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달리기와 등산이 좋았다. 물론 여기에도 타고난 신체적인 능력이 뒷받침될 수는 있겠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오롯이 내가 한 걸음씩 내딛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경험이다. 그 누구도 한 번에 두 발을 나아갈 수가 없다. 잊고 있던 성취감을 많이 느꼈다. 달리기와 등산에는 절대적으로 요행이 없다. 모두 공평하게 달리고 올라간다. 이제 다음 달이면 달리기를 시작한 지 1년이 된다. 그때쯤 해서 달리기 예찬에 대해 한 번 써봐야겠다.


결국 이 글을 쓴 이유는 그런 거다. 적어도 내가 사는 세계에서 요행은 없다고. 꾸준히 하더라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은 고스란히 나에게 남을 거라는 말을 해주기 위해서다. 꼭 뭔가를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재밌어서 달리는 것이다. 그걸 기억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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