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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상 May 31. 2021

05. 난 나의 규칙을 따를 뿐

쉼 없는 준비가 시작되었다. 디데이가 있는 준비가 아니기 때문에 오로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오래 앉아있는다 해서 승산이 생기는 게임도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연기를 하면서 비슷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가 늘지 않을까, 모니터 속의 나는 왜 저 모양일까, 나는 왜 잘하지 못하는 걸까, 라는 생각들은 이미 질리도록 해봤기에 불안이 나에게 스멀스멀 오는 속도는 조금 느렸다. 그러나 채워 둔 자신감들도 조금씩 시간이 지날수록 바닥을 드러냈다.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언론고시생에게 가장 꺾고 싶은 꽃인 한국방송공사의 공고가 나자마자 빠른 속도로 불안감은 마음을 잡아먹었다.


나는 언제나 그랬다.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나를 끝까지 몰아붙였다.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도록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어 긴장감을 유지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한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심리적인 부담은 있었지만 극도로 몰아넣은 시간들을 겪어내야 원하는 것들 것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희생과 노력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라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삶은 그 공식이 대부분 맞아떨어졌다. 결과는 나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었고 투자한 시간과 희생은 어느 정도의 결과를 보장했다. 잠을 줄이고 밤을 새워 공부를 하면 어느 정도 원하는 점수를 얻을 수 있었다. 틀린 문제가 있더라도 그건 내가 놓쳤던 부분이거나 실수라고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나이를 한 살씩 먹을수록 경험하는 세상은 내가 믿고 있던 규칙과는 달랐다.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들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문제는 그 한계에 부딪칠 때마다 내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스스로를 탓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결과는 나의 노력과 별개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탓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누구의 강요도 권유도 없이 오로지 내가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그 모든 것들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만 그걸 몰랐던 시절, 나는 더 스스로를 다그칠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그랬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뿐이었다. 일주일은 숨 가쁘게 흘러갔다. 어떠한 빈틈도 용납할 수 없었다. 남들보다 늦었다는 마음의 조급함은 나를 더 몰아붙이는 이유가 되었다. 아나운서 시험은 자주 있는 기회가 아니었고 그 기회조차 지망생들에게는 그냥 지나쳐갈지도 모르는 신기루였다. 몇 명을 뽑는다는 명확한 기준은 없었고 그 해 지원자가 마음에 안 들면 안 뽑으면 그만이었으니까. 나보다 몇 갑절의 시간을 언론고시에 매달린 친구들을 따라잡는 건 분명히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내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고 같은 줄에 섰을 때 비슷한 수준으로 보이기 위해 더욱더 고삐를 당겨야 했다. 이 시간이 지났을 때 후회하지 않도록. 암담한 현실을 마주하더라도 적어도 나의 노력만큼은 빛났다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기를 바랐다.


가만히 있는 시간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뭐라도 해서 채워야 했다. 조급함과 불안함을 지워내기 위해서라도 달려야 했다. 혼자 있는 시간은 늘 불안했기에 스터디로 시간을 채웠다. 뉴스 원고를 읽는 실습 스터디부터 한국어 능력시험 준비, 방송국 필기시험 대비, 매일 뉴스를 시청한 뒤 공유하기, 논술 대비 토론, 작문, 면접 등 모든 과정은 방송국 시험 하나만을 바라보고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불안해했던 건 이 모든 것들은 카메라 테스트를 통과해야지만 주어지는 기회라는 사실이었다. 카메라로 보이는 얼굴을 볼 때마다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볼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지어보는 미소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어색해졌다. 처음 아나운서를 준비하면서 잔뜩 채워놓은 자신감은 점점 사라졌고 조급함은 계속해서 나를 잠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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