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공연은 무사히 잘 끝났다. 늘 무대에 설 때는 긴장이 되었지만 그동안의 감정과는 조금 달랐다. 누군가 어떻게 연극영화과를 오게 되었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운이 좋아서,라고 대답했다. 거창한 목표가 있었던 게 아니라 타협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노라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수많은 자기 계발서에서는 가슴이 뛰는 곳을 향해 가라는 말을 하지만 나의 순서는 뒤바뀌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그다음 가슴이 뛰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순수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보며 알 수 없는 열등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배우라는 이름은 여전히 쑥스럽다. 내가 배우였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없지만 그 말을 내 입으로 내뱉기에는 약간의 머뭇거림이 필요하다. 무대 위, 카메라 앞에서 느꼈던 감정들은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 생생하게 남아있지만 온전히 내 것이었다 생각하기에는 고개가 갸우뚱거린다. 그래도 즐거웠고 힘들었고 행복하고 불행했다. 그 기억들의 조각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데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혼자서는 절대 해낼 수 없었던 일들을 함께라는 가치로 해냈다. 대견스러운 부분이었다. 작품을 끝낼 때마다 나는 조금씩 성장했고 내 마음에 성취감도 한 칸씩 채워졌다. 비록 배우로서 만개하지 않았지만 하나씩 채워 온 이력 속 무대에서만큼은 난 활짝 핀 꽃이었다.
무대에 가장 마지막에 등장해 관객들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오늘 공연을 보러 와준 관객들에 대한 인사이며 무대 위 나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였다. 영원한 안녕은 아닐 수도 있지만 당분간 이 무대 위의 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씩 멀어지겠지. 배우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은 이 순간으로 끝이 나는 것이다. 박수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무대는 암전이 되었다. 분장실로 들어와 서로에게 수고했다며 격려의 인사를 나눴다. 으레 했던 것들인데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졌다. 이번 공연에 대한 수고가 아니라 지금껏 무대 위에서 조금씩 어울리는 법을 배웠던 나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 같았다.
무대를 치우기 전 텅 빈 객석에 잠시 앉아 무대를 바라보았다. 몇 주 동안 머물렀던 자리였다. 나는 여기에서 멈추고 떠나지만 저 무대 위에서 다른 작품의 다른 배우들은 열정을 쏟아낼 공간이 될 것이다. 비록 이 무대는 떠나지만 이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무대가 있었다. 마치 스무 살 때 처음으로 쭈뼛거리며 연극영화과 선배 앞에서 인사를 했던 것처럼 이제는 아나운서 준비생이라는 새 옷을 갈아입고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는 순간이었다. 처음은 누구에게나 어색하고 부담스럽다. 무엇이 내 가슴을 뛰게 만들지 확인하는 시간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무대 위에서 질투했던 그들만큼 언론인이라는 것이 내 마음속에 무언가를 뜨겁게 만들어 줄 도구일지 한 번 걸어보기로 한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을 마음으로 나아갔다. 무대에서의 모든 기억들은 가슴 한 구석에 단단히 새겨 놓았으니 이제 다른 판에서 한 번 놀아 볼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