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귀여운 것들을 좋아할까

Korean Kitsch: 한국의 미학, 욕망, 그리고 정체성 ①

by 김무늬

전자기기 케이스, 필통, 볼펜, 키링, 컵, 그릇…

한국에서 독일로 가져온 내 물건들에는 표정이 있었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표정들 말이다. 웃고 있거나, 화내고 있거나, 울고 있는 표정들.

내 물건들을 유심히 관찰한 친구들은 한 번쯤 물었다. “도대체 이건 뭐야?”


독일에 산지 약 5년이 지나가면서, 내 물건들은 점점 건조해지고 있다.

아쉽게도 우스꽝스럽고 귀여운 표정들은 더 이상 내 주변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단색의 단정하고 조금은 해진 물건들로 가득 차버렸다.

내 취향이 변한 것일까, 아니면 환경이 나에게 영향을 미친 것일까?

혹은 자연스럽게 선택의 폭이 줄어들었기 때문일까?




어느 날 한 교수님이, 캐릭터 가방을 멘 아시안 학생을 보고 나에게 물었다:

아시아 문화권(특히 동아시아)의 미감은 우리와 좀 다른 걸까?

왜 ‘예술을 공부하는, 충분히 성숙한’ 학생들이 저런 가방을 메고 다닐까?


80년대 말 그리고 90년대, 학회를 위해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다는 교수님은, 이어서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우연히 대학 축제 기간이었는데, 캠퍼스 광장에 젊은 가수들이 와서 공연을 하고,

학생들은 수업을 빼먹고 줄을 서 있었다고 했다.

학교는 학교일뿐인데, 왜 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해 가수를 초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페스티벌이나 클럽에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왜 학교에서 제공해야 하냐는 것이다.


흠. 한국에서는 이상하다고 느낀 적이 없는 점들이긴 했다.

물론, 나이가 많은 백인 남성으로서 교수님의 말에는 아시아 문화에 대한 편견이 섞여 있었다.

인종차별적인 뉘앙스로 들릴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순수한 궁금증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저 다름에 대한 궁금증이랄까 그런 것으로 말이다. (이런 받아들임의 과정은 추후에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다.)


다 큰 어른들이 왜 온갖 귀여운 것들을 수집할까? 왜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느끼지 않을까?

왜 학생들을 위한 축제에 유치한 대중가요를 부르는 가수들이 방문할까? 그리고 왜 그들을 찬양하는 것일까?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귀여운 것들을, 반짝이는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단지 취향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귀엽고 단순하며 유치한 것들은 때로 담요처럼 우리를 덮는다.


복잡한 일들—불안정한 일자리, 과속하는 시간표, 예측하기 어려운 날씨와 소식들—을 잠시 멀리 밀어내는 방법.

유치할 정도로 단순한 색과 모양이 마음을 가볍게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어떤 하루에는 손바닥만 한 캐릭터 스티커 하나가 의외로 큰 위로가 된다.


이 연재는 그 위로의 얼굴을 ‘키치(Kitsch)’라는 말로 불러보는 시도다.

(또 다른 말로 하자면, 일종의 자기변명이다.)

오래전부터 키치는 흔히 싸구려, 모조, 과장으로 번역되며 고개를 젓게 만드는 단어였지만,

나는 이 단어를 다른 쪽에서 잡아당겨 보고 싶다.


키치는 물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미지를 소비하는 태도, 어떤 감정의 공식을 믿고 싶은 마음,

복잡한 것을 단순한 이야기로 바꾸어 안심하려는 습관.


한국의 거리에서 보이는 반짝임은 그 태도들의 총합 같은 것이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표면들, 과장된 친절, 그리고 즉각적인 위로.


독일에서 수업을 들으며 (그리고 내 오래된 라이언 필통을 떠올리며)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한국의 ‘키치’는 단순한 모방의 결과가 아니라, 아주 빠른 속도와 불안 속에서 만들어진 감정의 언어가 아닐까.




이번 연재는 〈예술로서의 키치, 키치로서의 예술〉 세미나에서 쓴 나의 Hausarbeit(소논문)을 바탕으로 한다.


그 서문에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한국에서의 키치는 문화적 정체성의 표현인가, 아니면 사회 변화의 부산물인가.

‘한국적 키치’라는 말로 묶일 만한 공통의 감정 구조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에 생겨났고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나 스스로에게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기존 연구들이 서구의 시선에서 키치를 정의하는 경향이 강했다면,

나는 한국의 구체적인 장면들—이발소 벽의 그림, 결혼식장의 천장, 캐릭터 숍의 질감, 인스타그램 포토존—을

따라 걸으며, 그 표면들 사이에서 움직이는 마음을 기록해 보려 한다.


키치를 사전적으로만 이해하면 자꾸 ‘물건’을 보게 된다.

하지만 나는 사람을 보고 싶다.


헤르만 브로흐가 말했듯, 키치는 사물의 성질이라기보다 인간의 성향에 가깝다.

복잡한 현실 앞에서 명쾌한 감정의 공식을 원하는 순간, 우리는 키치적인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생각보다 자주, 생각보다 다정한 방식으로 우리를 구한다.)


반짝이는 장식은 단지 장식이 아니고, 귀여움은 단지 유치함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견디는 방식의 일부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 회로가 유난히 빠르게 닫히고 다시 열린다.

압축 성장의 속도, 밀도 높은 도시, 오래 지속된 경쟁의 피로, 그리고 ‘뒤처지지 않기’의 강박.


그 사이에서 우리는 즉각적인 위로와 확실한 표정을 원한다.

귀여움은 친절하고, 과장은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어떤 표면들은 두껍고, 어떤 색들은 너무 선명하며, 어떤 공간들은 사진 속에서 더 잘 작동한다.


나는 그 장면들을 비난보다 관찰의 거리에서 보고 싶다.

비평이 때로는 꾸짖음처럼 들리는 순간에도, 그 표면 안쪽에서 작동하는 인간적인 이유들을 먼저 듣고 싶다.




물론, 키치는 언제나 위험도 품고 있다.


과장된 표정은 언젠가 진짜 표정을 삼킬 수 있고,

즉각적인 위로는 사유의 시간을 빼앗을 수 있으며, 귀여움의 경제는 곧바로 소비의 속도를 재촉한다.


그렇다고 해서 등을 돌릴 수만은 없다. (우리는 이미 그 세계의 주민이니까.)

차라리 더 자세히 보고, 더 느리게 이름 붙이고, 더 정확히 웃어보자.


그게 내가 이 글에서 해보려는 일이다. 나의 언어로, 나의 속도로, 나의 자리에서.


정리하자면 결국 키치는 한국 사회의 미학적 과잉을 설명하는 유용한 단어이며,

그 과잉은 사회 변화와 감정의 구조가 만든 결과다.

우리는 그 표면을 통해 스스로를 말하고, 서로를 알아본다.


그러니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우리는 왜 귀여운 것들을 좋아할까에서, 우리는 왜 이 감정의 언어를 필요로 하게 되었는가로.


답은 아마 여러 조각으로 흩어져 있을 것이다.

이발소 그림의 오래된 유화 질감,

짝퉁 자유의 여신이 서 있는 모텔 옥상,

결혼식장 천장의 장식 몰딩, 캐릭터 숍의 촉감,

인스타그램 포토존의 조명값.


그 조각들을 한 편씩 주워 담아보려 한다.

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