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 그림과 짝퉁 자유의 여신이 필요한 이유

Korean Kitsch: 한국의 미학, 욕망, 그리고 정체성 ②

by 김무늬

재미있게도 ‘키치(Kitsch)’라는 단어는 19세기 후반 독일 뮌헨의 미술 시장에서 태어났다.


값싼 그림을 팔던 상인들의 은어였다는 설도 있고,

대충 그린 스케치(sketchen)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Kitsch’는 처음부터 물건의 품질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였다.


진짜 예술을 흉내 내지만, 그 흉내 속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진심을 모방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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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독일의 키치 오브제는 정원난쟁이(Gartenzwerg)다.

독일의 모든 정원마다 하나쯤 있는 이 난쟁이들은 왜 키치의 상징이 되었을까.

처음 그들을 보았을 때, 나는 의문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저 귀엽고 짜리 몽땅한 난쟁이들일뿐인데, 무엇이 이들을 손가락질받게 했을까.


난쟁이는 본래 중세 전설 속에서 땅을 지키는 수호자였다.

그러나 19세기 산업화 이후, 그들은 ‘자기만의 작은 세계’를 꾸미려는 중산층의 욕망 속에서 대량생산되었고,

이들은 곧 노동자의 꿈, 혹은 작고 안전한 행복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 과장된 표정과 플라스틱의 반짝임은,

어느 순간부터 ‘진짜 자연’을 흉내 내는 가짜의 표면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사랑하면서도, 진심과 모조, 순수와 인공의 경계 위에서 부끄러워했다.




정원난쟁이를 보며 느꼈던 낯섦과 익숙함의 이중감정은, 어느새 나의 시선을 내 문화로 향하게 만들었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만들어진 순간은 단순한 미감의 변화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감정의 질서가 바뀌던 시기였다.


그래서 나는 한국이 처음으로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던 시기,
조선 후기에서 근대 초로 넘어가던 그 경계에 주목했다.
그 변화는 단순한 양식의 수입이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를 흉내 내는 일이 어떻게 하나의 감정 언어로 자리 잡았는가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화적 우열을 가르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낯선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욕망과 불안, 동경과 수치가 어떻게 얽혔는가를 되묻는 일이다.


그 감정의 결을 따라가면,
우리가 ‘한국적 키치’라 부르는 표면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키치’는 의외로 오래된 얼굴을 하고 있다.
그 뿌리는 조선 후기의 민화, 그리고 그 민화를 대신한 한 장의 이발소 그림에 있다.


조선 시대의 민화는 늘 사람의 일상 가까이에 있었다.
호랑이가 웃고, 복을 비는 그림이 방 안에 걸려 있었다.
그림은 예술 작품이라기보다, 사람들의 바람과 믿음을 담은 생활의 표정이었다.


시간이 흘러 20세기 초, 서양의 바람이 한반도에 불기 시작한다.
길거리에는 짧은 머리와 양복이 늘고,
서양식 인테리어의 이발소가 새로운 문명의 상징이 되었다.


어렸을 적, 우리 동네 골목에도 하얀색, 파란색, 빨간색으로 열심히 돌아가던 이발소 간판등이 있었다.


신식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오래된 주택들이 사라져 가던 시기,
그런 풍경은 재래시장으로 향하는 골목에서만 드물게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초등학교 앞에는 여전히 몇몇 이발소와 미장원이 남아 있었다.


그 골목을 걷다 보면, 가끔 유리창 너머로 유화 한 장이 보였다.
한글과 한자로 된 큰 달력 옆에 어색하게 자리한 서양식 그림 한 점.


RF 1877.jpg .jpeg Jean-François Millet, L'Angélus (Musée d'Orsay)


그 그림들은 바다와 들판, 노을이 있는 낯선 풍경을 보여주었다.
<밀레의 만종(L’Angélus)> 같은 복제화들.
그림은 어딘가에 존재할 현실을, 마치 이미 본 것처럼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한동안 멈춰 섰다.
바다는 거기 없었지만, 그 부재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작동했다.



이발소 그림이 사라진 자리엔 옥상 위의 자유의 여신이 서 있었다.

손에 횃불을 들고, 먼 곳을 바라보는 표정을 한 레진 조형물.

모텔 입구, 예식장 로비, 쇼핑몰 분수대 위에서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왜 뉴욕의 상징을 그렇게 열심히 동네 옥상에 세워두었을까?


구성수 작가, 자유의 여신 2005


짝퉁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르지만, 조금 더 오래 바라보면 다른 답이 나온다.


아마 ‘자유'에 대한 일종의 선언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평범한 하루가 조금 더 특별해질 수 있다’는 약속이자

멀리 있는 꿈을 가까운 좌표로 바꾸는 간이 등대로서.


그 조형물들은 대체로 작고, 비율이 어색하고, 재료도 싸다.
그래서 쉽게 비웃음을 산다.


하지만 비웃음은 대체로 사치다.
대부분의 작은 가게와 사업장은, 긴 설명 대신 모두가 알아보는 상징 하나를 세워야 했다.

저 횃불은 ‘성공’과 ‘세계’와 ‘자유’를 동시에 불러왔다.
복잡한 서사 대신 번쩍이는 축약.


삶은 통역을 필요로 하고, 키치는 가장 빠른 통역으로 작용했다.



이발소의 그림과 옥상의 여신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원본이 멀리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그 ‘멀리’를 대놓고 표면에 붙인다.


그리고 바로 그 솔직함이, 우리를 부끄럽게도, 또 애틋하게도 만들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멀리 있는 것들을 빌려와 가까운 일상을 버텼던가.

그러나 또 얼마나 자주, 그 서툰 번역을 통해 진짜에 가까워졌던가.


욕망은 늘 거기에 있었다.
우리는 그 욕망을 가능한 만큼의 재료로 조립해 왔다.

페인트, 합판, 레진, 전구 같은 이 도시의 재료들로 말이다.


어쩌면 이발소의 그림과 어색한 미소의 자유의 여신상은, 도시 한가운데 붙여 넣은 작은 피난처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필요했던 건 정확한 역사나 진품의 감정이 아니라, 그 시절의 어둠을 조금 덜 어둡게 만드는 기호였다.


키치는 그 역할을 잘 해냈다.
값이 덜 들었고, 빨랐고, 무엇보다 모두가 알아봤다.




물론 그 표식들은 부작용도 남겼다.

표면의 과장, 감정의 단순화.

바다는 사진 배경이 되고, 자유는 인테리어가 되었다.


그래도 나는 묻고 싶다.
‘왜 그랬을까’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왜 필요했을까’다.


불안정한 속도, 압축된 성장, 조금 더 나아지고 싶다는 집단적 헐떡임.

그 속에서 이발소의 풍경과 옥상의 여신은 각자 역할을 맡았다.
하나는 마음의 안정을, 하나는 영혼의 자유를.


둘 다 완벽하지 않지만, 둘 다 또렷하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키치는 언제나 ‘또렷함’을 선택했다.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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