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기록으로 나를 소개해보기
필자는 이 글을 통해서 필자 자신을 대상으로 자기소개서의 ‘형식’에 대한 글쓰기 실험을 해보자 한다. 자기소개서를 쓰다 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 속에서 나의 모습(과거)에 대해 쓰는 것을 기대하지만, 대개 쓰다가 보면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미래)이 섞여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올빼미형 인간인 필자가 과거 자소서에서 ‘저는 누구보다 아침을 일찍 시작하는 근면 성실한 사람입니다’라는 뉘앙스를 주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문장이 필자를 소개하는 문장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발자취로 사람의 현재의 위치와 가능성을 짐작해볼 수 있고, 미래의 목표를 미루어 보아 이 사람의 가치관과 방향성을 엿볼 수 있으므로 두 내용 모두 필자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이 둘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내가 아직 이루지 못했으나, 이루고 싶은 미래의 모습이 현재의 모습 혹은 이미 달성한 과거처럼 쓰이는 것은 ‘거짓말’이 되기 쉽다. 특히 개인의 성격이나 특성을 나타내는 주관적인 내용의 문장은 학력이나 학점과 같이 명확히 수치화될 수 있는 내용과는 달리 분석적으로 명확하게 쓰기 어려운 성질을 가진다.
필자는 이번 글에서 철저히 과거의 기록에 의존하여 자기소개를 해보고자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단어는 ‘과거’와 ‘기록’이다. 과거는 앞서 말했듯 철저히 ‘이미 존재한 바 있는 나의 모습’만 담겠다는 의미이다. ‘기록’은 나의 모습 중에서 ‘기록된’ 모습을 담겠다는 의미인데, 필자의 미래계획 목록, 초등학생 때 찍은 가족사진,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 즐겨 듣던 노래 플레이리스트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중 세 가지 기록으로 나를 묘사해보고자 하는데, 이는 핸드폰 사용시간 기록, 유튜브 시청기록 그리고 필자의 지난 작업들이다. 이 기록들은 필자의 해석을 필요로 하지만. 필자의 소개 글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해주며, 설득력을 실어준다. 여러 과거의 기록들 중에서도 이 세 가지 기록을 선택한 이유는, 가장 나와 가까운 기록들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록이지만 비교적 가까운 과거의 기록이고, 필자의 생각의 기록뿐만 아니라, 행동의 기록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자료들로 선별하였다.
코로나 이후 집에만 시간을 보내는 날들이 많아졌다. 사람들 마다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제각기 다르겠지만, 혼자 자취를 하고 있는 필자는 이러한 시간들이 너무 지루할 뿐이다. 이럴 때는 핸드폰 만한 게 없다.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인터넷 세상을 비집고 돌아다니다 보면 창밖의 해는 언제 졌는지도 모를 만큼 시간이 잘 간다. 아래는 필자의 지난 일주일 간 핸드폰 사용시간 기록이다. 일일 총 사용 시간과 함께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사용분야 세 개를 보여준다.
2월 28일 5시간 59분 (엔터테인먼트 3시간 17분, 소셜 미디어 56분, 게임 26분)
3월 1일 6시간 23분 (엔터테인먼트 3시간 46분, 게임 35분, 소셜 미디어 28분)
3월 2일 7시간 24분 (엔터테인먼트 3시간 3분, 소셜미디어 1시간 8분, 생산성 및 금융 1시간)
3월 3일 5시간 55분 (엔터테인먼트 3시간 41분, 소셜미디어 1시간, 쇼핑 및 음식 12분)
3월 4일 5시간 53분 (엔터테인먼트 3시간 23분, 소셜미디어 39분, 게임 23분)
*각 분야에는 다음과 같은 앱이 포함됩니다. 엔터테인먼트(유튜브, 유튜브 뮤직, 넷플릭스, 사운드 클라우드 등) 소셜 미디어(인스타그램, 네이버 블로그, 카카오톡, 메시지 등) 게임(루미큐브, 동물의 숲 포켓 캠프 등) 생산성 및 금융(가계부 정리 앱, 토스, 카카오페이, 인터넷 뱅킹 등) 쇼핑 및 음식(마켓 컬리 등)
** 애플의 스크린 타임에 수집된 정보를 활용하였습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필자는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되어 활동량이 줄었고,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열람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게임을 하는 시간이 길지 않고, 유튜브나 넷플릭스 시청을 좋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마치 도서관에서 다양한 책을 구경하며 쏘다니는 것과 같은 형태로 여러 자료들을 구경 혹은 감상하는 것을 좋아함을 알 수 있다. 이는 필자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찾아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음도 보여준다.
내가 관심 있게 보고 있는 주제들은 필자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필자가 몰랐던 세계를 보여주며 새로운 목표를 세우게 한다. 다음 단어들은 각각 필자가 어제(3월 4일)와 지난 일주일(2월 25일-3월 4일) 동안 가장 많이 본 영상들의 키워드이다. 단, 70퍼센트 이상 시청한 영상들만 통계에 반영하였다.
3월 4일 뮤직비디오 5편, 숨어 듣는 명곡 4편, 학교 폭력 뉴스 3편
2월 25일-3월 4일 아트/디자인, 댄스 각 31편, 뮤직비디오 23편, 뉴스 19편
이를 통해 필자는 아트/디자인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 뮤직비디오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트/디자인에서는 조명 설치법과 현대 미술 아티스트의 인터뷰 영상이 주를 이뤘고, 뮤직비디오는 대부분 Joji의 뮤직비디오와 미셸 공드리의 뮤직비디오였다. 또한 가장 오래된 취미인 춤 영상도 꾸준히 시청하고 있는데, 원 밀리언 댄스 스튜디오의 영상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영상의 내용들은 다른 인풋들과 합쳐져 내가 유(무) 의미한 아웃풋을 내도록 유도한다.
아트 디렉팅을 공부하며 다양한 디자인 프로젝트나 작업을 해왔다. 주제와 형식을 설계할 때에는 필자가 당시에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었던 문제나 생각들이 큰 영향을 준다. 영감은 먼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닌, 재미있게 읽은 책, 친구와의 대화, 아이디어 노트 그리고 앞서 말했던 웹 서핑에 있다. ‘굳이 이 프로젝트를 왜 진행해야 하는가? (그럴 가치가 있는 주제인가?)’ ‘내가 디자이너로서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내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주제인가?)’ 와 같은 질문의 대답이기도 한 작업의 결과물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 준다. 그래서 작품을 공개할 때면 자주 벌겨 벗겨진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고, 필자의 작업은 필자와 분신과 같은 존재이다. 필자에게 있어 작업을 함은, 업무와 같은 개념이 아닌, 자신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작업을 통해 드러나는 모습은 필자의 자아정체성의 큰 부분을 차지하며, 지속적인 작업활동은 건강한 삶을 위해 필수적이다. 다음은 내가 지난 일 년 동안 해온 작업의 이름과 그 주제이다.
프란체스카 뮤직비디오
주인공 남자는 자주 가는 카페의 아르바이트생, 프란체스카에게 한눈에 반해, 집에 돌아와 그녀를 본 기억을 기억 기록장치를 이용하여 레코딩하고 다시 재생해서 본다. 어느 날 비디오 속 그녀의 모습이 없어지고, 그는 그녀를 찾기 위해 기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러닝타임 4분 10초
팝콘 행성
팝콘 행성이라는 가상의 행성을 묘사하고 있는 책을 쓰고, 이 책을 바탕으로 사회적 담론이 이루어질 수 있는 온오프라인 플랫폼을 디자인한 프로젝트. 책에 언급되는 팝콘 행성이 가지는 사회적인 구조에 대해 이야기하는 워크숍을 열고, 그 담론 내용을 영상, 설치 등으로 표현하며 사변적 디자인을 실천하는 프로젝트.
러브 팰리스
사랑의 어두운 면을 포함한 다양한 면들을 모두 보여주는 설치 작업. 사랑이 가지고 있는 여러 모순적인 모습-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 사랑이라고 포장되는 데이트 폭력, 귀여운 것들은 사랑하고 혐오스러운 것은 싫어하는 차별적인 사랑, 여러 비현실적인 사랑을 베풀 것을 요구하는 성경 속의 사랑 등-을 사진과 그래픽으로 제시한다.
러브콤보
한국의 독특한 성매매 양상인 ‘룸싸롱’을 손으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슬라임에 빗댄 영상작업. 다른 나라와 다르게 여성을 캐릭터화 하여 다양한 컨셉을 가진 성매매 업소(란제리 룸, 셔츠 룸 등)와 초이스 문화는 우리나라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문화이다. 여성이 캐릭터화 되듯이, 슬라임을 취향에 맞게 커스텀하여 가지고 노는 영상. 러닝타임 12분.
이를 미루어 보아 필자는 다양한 매체로 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으며, 사소한 일상 속의 문제부터 사회문제까지 다양한 인문학적 이슈를 디자이너로서 접근하고자 함을 보여준다.
우리는 자기소개서를 쓰는 과정에서 자신을 어떠한 관점에서 분석해야 하는지, 분석하여 얻은 결과 중 어떠한 내용을 포함시켜야 하는지 등 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이 글쓰기 방법은 선택지를 제한한다. 제한된 자료(과거의 기록)를 제한된 방식(이미 존재한 바 있는 나의 모습을 성찰적으로 돌아보며 제시함)으로 나를 소개해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방법론에 대하여 피드백을 주었던 한 학우*의 말을 빌리자면 이 글은 '사람은 행동하는 만큼만의 사람이다'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준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나를 행동한 만큼만의 모습으로 바라보자면, 생각보다 초라해 보일 수도 있고, 혹은 생각보다 꽤 열심히 멋지게 살아온 모습일 수도 있다. 아니면, 기록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나의 숨겨진 모습이 있을 수도 있겠다. 이 글쓰기 과정이 필자에 따라 다른 성찰의 경험과 새로운 모습의 발견을 가져다주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이 글은 서울대학교 인문학 글쓰기 수업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에 언급된 장정인 학우를 포함한 다른 학우들의 피드백들을 참고하여 결론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