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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미킴 Jan 09. 2022

학교 과제가 하기 싫은 런던 유학생

제멋대로 미끄러져 버린 하루를 조금이라도 구원해보고자 펜을 들었다. 우선, 쇼팽을 들으며 내 방을 다른 눈으로 보려고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본다. 내 방을 런던에 있는, 내가 돈을 주고 산 나의 고유한 공간으로 바라본다. 내가 앉아 있는 의자도 과제를 하기 위해 책상 앞, 엉덩이를 올려놓을 물체가 아니라 디자이너가 정교하게 디자인한 하나의 가구로 보려고 해 본다. 창 밖에서 비쳐오는 가로등 불빛이 아니라 비행기에서 보일 런던 야경의 작은 일부를 보려고 하고, 창 밖으로 보이는 도로에 고여있는 더러운 웅덩이가 아니라 오늘 오후 내내 빗방울들이 쓸고 내려간 나무의 잎사귀들을 보려고 한다. 그렇게 내 방의 구석구석을 매만지며 바로 세워보려고 한다. 내 방에 삐뚤게 걸려 있던 몇 개의 액자들을 다시 똑바르게 맞춰 거는 과정과 비슷하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난 뒤 책상 앞에 다시 앉으면 나는 아까와는 다른 방에 앉아 있다.


쇼팽의 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는 피아노 건반을 망치고 내려치듯 과격하게 연주하고 있고, 나는  단단한  끝의 힘을 받아 척추를 곧게 세우고 과제를 한번 열심히 해보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대학교 성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은 그만하고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게서 대학교 과제 이름표를 떼고, 개인 작업 이름표를 새로 달아주며 서로 잘해보자고 의지를 다진다. 피아니스트도 동의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아노를 열심히 내려친다.


나의 방 새로 보기와 피아니스트의 열렬한 응원을 받은 나는 오늘 하루 종일 미뤄왔던 과제를 비로소 저녁 열 시가 넘은 시간에 시작해 본다. 12시가 지나가기 전, 과제를 살짝 묻혀놓음으로써 나의 하루는 약간 구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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