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인 실타래도 그대로 괜찮아
좋은 습관인지, 나쁜 습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렸을때부터 마음이 울적해지면 이유를 꼭 찾아내곤 했다. 가만히 앉아서 어제 망친 수학 때문인가? 다음주에 있을 수행평가때문인가? 그 친구가 기분 나쁜 것 같은게 신경 쓰이나? 흘려듣고 싶었던 그 말이 마음에 박혔나. 그렇게 꿈꿈한 구석이 있는 것들을 하나씩 명명해나가다보면 가슴이 쿡하고 찍히는 것이 나오고, 그럼 그것을 해결하면 실은 팽팽하게 다시 당겨진다.
삶이 단순할 때에는 실은 대게 팽팽하게 평화로웠다. 엉킨 걸 푸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동안 그 해결 방법들이 나를 성장시켰다. 시험을 걱정하기 싫어 했던 공부도,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했던 기록도 모두 큰 도움이었다. 하지만 삶이 다양해질 수록 실의 갯수가 늘어나고, 점점 숙제가 되었다. 즐거우려고 나가는 약속이 가끔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울 때도 있었고, 일하는 건 재미있는데 끝나고 허무해지기도 했다. 문제 자체가 복잡해졌다기 보다는, 머리가 커가며 모든 것들이 연결되고, 문제 하나에 해결 하나 연결하던 것들이 여기 저기 얽히며 꼬였다. 엉킨채로 팽팽한 실타래는 풀기가 어렵다.
그렇게 나는 가끔 삶이 견뎌야 하는 존재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래도 팽팽하게 버텨야 한다고, 그럼 언젠간 안정이 오고 어렸을 때 그때처럼 이것들이 다 제자리를 찾아 평행하게 팽팽해질 것이라고. 그 기준을 두고 보면 그 엉킴이 얼마나 갑갑스러운지. 팽팽해 끊어지기 쉽고 엉켜서 어지러운 마음. 연결할 곳을 찾으려고 이리 저리 헤메다보면 사실 단순한 것에도 가는 길이 길어져 버리니까.
혼자 살면서는 그 강박이 좀 더 심해졌다. 불안이 주는 우울이 싫었다기 보다는 안정에 대한 환상이 생겼다. 안정은 조금만 하면 찾아올 것 같았다. 월급은 얼마 이상, 친구는 얼마나, 애인도 필요할 것이고, 그렇게 리스트를 작성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결핍에 집중하게 된다. 나는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나 스스로에게 소리지르는 것 같았다. 자기 개발은 나의 미완성을 확인시키는 것 같았고 첫 사회생활보다 두배는 더 오른 월급은 한없이 부족해보였다.
가슴을 쿡 찌르는 그것이 어떤 하나의 이유가 아니라 내 손이었다는 것을 아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된 손이 점점 세상을 향할 때 비로소 눈에 보이는 것이다. 팽팽하던 실을 놓고 세상에 손가락질을 하려다 발견한, 뭐야. 나였잖아.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그제야 들어보이며 느꼈다. 삶이 엉망이었던 게 아니라, 이 삶이 그리는 문양을 그려가기에 내 마음이 여유가 없었다. 놓고 보면 풀기도 쉬운데. 아니면 놓고 보면 뜨개질을 해도 되는 것인데. 엉킨 것 같았던 것들이 사실 모두 한 코 한 코의 단계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꾸불 꾸불한 그 실타래가 뭐가 어떻다고. 내 고양이는 실타래로 노는 걸 제일 좋아한다. 얼마나 낡았고 얼마나 엉켰고가 중요하지 않고, 그 실타래가 날아다니는 게 재미있고 잡으면 좋고 그런 것이다.
어제 불안했고, 오늘도 불안하다. 그런데 어제도 행복한 일이 있었고 오늘도 즐거운 일이 있었다. 그럼 되었다고 친다. 내일도 행복한 일이 있을 것이다. 오늘 실이 들어간 코가 좀 엉켰어도 괜찮다. 팽팽한 실은 뭔가를 꿰기에 좋아서 채워 묶어 뭔가가 되기도 하고, 어떤 실은 한 코 한 코 올려 만들어지며 구슬이 없이도 뭔가가 되기도 한다. 묶었다고 끝난거 아니고, 만들기에 어렵다고 멈출 필요도 없다. 안정은 뭘 얼마나 잘 만들었나보다도, 그걸 만들어가는 과정에 가깝다. 오늘 코는 좀 엉망이었긴 한데, 흔들며 놀기엔 그럭 저럭 괜찮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