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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나 Sep 26. 2021

내가 사랑한 모든 오빠들에게 - 프롤로그

너 지금... 남자 때문에 우니...?

"너 지금.. 남자 때문에 우니?" 별에서 온 그대 (2013, SBS)

이 나이 먹고서까지 아이돌에 울고 웃을 줄 몰랐다. 아주 어리다고 말할 수는 없고 그렇게 많은 나이도 아니지만 아무튼 나 어릴 때만 해도 아이돌 좋아하고 그런 건 10대 여자에게만 허락된 취미 같은 거였다. 실제로 내 덕질은 10대 시절 시작되어 20살에는 처음 맛본 대학과 술맛에 잠시 뜸해졌다가, 스물한 살부터 다시 불타올랐다.


대학생인데.. 내 친구들은 다 연애하는데... 나는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모니터 너머로 고개를 내밀면 새로운 티저와 떡밥이 떴다. 그렇게 다시 멱살 잡혀 가면서도 종종 '이 나이 먹고까지 아이돌을 좋아하다니... 정말 나잇값을 못하는 어른이 되고 있는 건가'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떤가? 우리 팀장님도 아이돌 신곡 나온다고 점심시간에 파트 회식하다 말고 뮤비 보시고, 10년 넘게 많은 초등학생 여러분들의 방과 후 영어를 책임지고 계시며 내 인생 최고의 김치찌개를 만드시는 우리 어머니도 방금까지 브이앱을 보다가 끄셨다. 큰일이다. 나는 아마 평생 아이돌 좋아하다가 죽을 것 같다. 그렇지만 나쁘지 않아. 오히려 좋아.




야구팬 쌍딸 작가님의 책 <죽어야 끝나는 야구 환장 라이프>에서 누군가의 인생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고, 그게 첫사랑일 수도 야구 선수 일수도 있다고 했다. 그 책을 읽고 친구는 바로 얘기했다. “킴나 인생에 등장할 수많은 오빠들…”


내가 사랑한 모든 남자들에게 (2018, Netflix)

영화 [내가 사랑한 모든 남자들에게]는 주인공의 동생이 총 세 명의 남자 캐릭터들에게 묵혀두었던 언니의 어린 시절 연애편지를 보내면서 시작된다. 이 동생은 우표 값 얼마 들지 않았겠지만, 내 동생이 내가 사랑했던 모든 오빠들에게 편지를 보내려면 우표값 꽤 들 것이다. 게다가 그 사랑은 언제 어디로 넘어갈지 몰라서 편지를 계속 보내야 한다. 보자, 우리 누나가 06년에 좋아한 사람들.. 12년… 19년 8월…


이렇게 찾아온다면? 내가 사랑한 모든 남자들에게 (2018, Netflix)

만약 그 남자 캐릭터들이 주인공의 집에 찾아와 초인종을 눌렀듯이 오빠들이 우리 아파트 주차장에 찾아온다면..? 일단 자리가 비좁다. 우리 아파트 오래돼서 지하 주차장도 없는데 조금 곤란하다. 주민 신고 들어올지도 모른다. 밴들이 몇 대야. 자 줄 서세요 줄!


만약 2열 종대로 모두를 욱여넣었다면 그야말로 세대를 아우르는 토토가이자 컴눈명이자 가요대축제 엔딩 무대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상황 정리를 위해서는 김연자 선생님이 오셔서 아모르파티 불러주셔야 한다. 만약 모두가 저희 집 앞마당에 모인다면 공익을 위해 제가 인스타 라이브 켜겠습니다. 아쉽지만 제가 데뷔를 하지 못해서 브이라이브는 어렵습니다. 아 참, 집행유예 이상의 형을 받은 오빠들은 참석 금지이니 돌아가 주세요.




십 년이면 요새는 강산이 수십 번도 더 바뀔 시간인데,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열렬하게 오빠들 혹은 그냥 명칭만 오빠들이라고 부르는, 나보다는 늦게 민증을 발급한 사람들을 좋아하고 있다. 울고 웃고 화내고 사랑하고 있다. 버디버디와 싸이월드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으로 사람들이 각자의 인생을 전시할 때 내 피드에는 꾸준하게 오빠들이 자리했다.


그때 그 시절은 찬란했는데, 마지막은 참 가지각색이었다. 사회면에 나와서 내 과거를 창피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더 이상 오빠라고도 부르지 않는 놈들도 있고 여전히 그 자리에서 빛나고 멋지게 살고 있는 오빠들도 있다.


내가 천재아이돌이 될 상인가 - 관상 (2013)


사람 많이 만나봐야 보는 눈이 좋아진다던데 나는 이쯤 되면 관상 사주 카페를 차려야 하지 않나 싶다. 자네는 데뷔 4년 차에 여자운이 많이 꼈네. 사생활 좀 정리하고 살아! 자네는... 내가 뭐라고 해도 회생 불가네. 돌아가시게. 가능한 공인이 되지 말고 사시게. 뭐라고요? 실제로 만나본 사람만 쳐준다고요? 이 글로벌 비대면 세상에서 참 세상 빡빡하게 사시네. 흥.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뜬금없이 명언 읊기를 좋아하셨던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은 사랑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랬다. Despite. Nevertheless. 세상의 모든 편견과 현생의 압박, 그리고 종종 날아오는 오빠들의 강렬한 뒤통수 스파이크에도 불구하고 오빠들을 사랑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나의 지난한 사랑의 결과물이고, 내 사랑을 좀 알아달라는 상소문이며, 나와 우리와 너희의 평안을 비는 기도문이다. 내 인생에서 스쳐 지나갔다고 하기엔 깊은 추억과 피딱지 앉은 상처와 포토 카드와 책갈피와 앨범 더미를 남기고 간 오빠들을 추억한다.



+

약간의 미련으로 언니들에 대한 이야기도 얹어본다. 많은 언니들도 분명 가슴 한편에 자리했고 아직도 자리하고 있다. 그렇지만 언니들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지지와 사랑은 오빠들을 생각했을 때의 감정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건 아무튼 좀 지랄 맞고 아슬아슬하고 현타 오는 일이었다. 눈이 언제 훼까닥 돌아서 팬 알기를 똥으로 알고 사회면에 나오는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공포는 여전히 은은하게 존재한다. 나쁜 짓만 하지 말라고 선우정아가 <순이>에서 그렇게 애처롭게 노래했지만 어떤 놈들은 들을 생각도 안 하는 것 같다.


언니들은 항상 사랑하고 있다. 언니들의 만수무강, 행복한 삶을 마음속 깊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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