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모든 오빠들에게 #2
탈출구가 필요한 시기들이 삶에는 어떤 주기도 없이 찾아오는 것 같다. 이 암흑기는 대개 커다란 변화 혹은 선택을 앞두고 있어서 눈앞은 캄캄하고 숨 막히고 정체된 것 같은 기분이 들던 때다. 좀 숨 쉬고 살만한 시기들이 있는가 하면 이 암흑기에는 단순히 쳐다보면 웃게 되는 어떤 존재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시기 나를 구원한 건 아이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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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땀 뻘뻘 흘리며 열심히 무대를 했고, 예쁘게 웃었으며, 가끔 명언 혹은 격언 같은, 하지만 사실 잘 들어보면 어제 엄마가 한 것 같기도 한 말들을 예쁜 눈웃음을 곁들여 날려주었다. 그럼 나는 그런 말들을 가슴에 새기고 하루를 일주일을 극복할 인생 격언 급으로 삼아 섬기곤 했다.
처음 탈출구가 절실히 필요했던 시기는 고3 때였다. 이 때는 탈출구가 필요한지도 모르고 탈출구를 열망했었던 것 같다. 물론 모든 결과는 11월 둘째 주 목요일 수능이 끝나고 대입이 끝나면 해결되는, 데드라인이라는 것이 있는 탈출구였다. 그렇지만 인생의 가장 큰 변화를 앞두고 나는 아주 혼란스럽고 두려웠으며, 열아홉이 가진 에너지와 수험생이 가진 스트레스를 방출할 곳이 필요했다.
그때 나에게 벌컥, 와르르, 쏟아진 것이 엑소였다.
처음 엑소를 유심히 본 건 역시 2013년, 늑대와 미녀 때였다. 반에서 친구들이 '아 싸랑해요!'라는,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희대의 여흥구를 따라 하며 놀리고 있었다. 고상한 척 앞에서는 "아 뭐야 진짜 이상하다 크크"라며 비웃었지만, 리패키지로 돌아온 엑소의 타이틀곡 '으르렁'은 모두를 휩쓸었다. 물론 나도 휩쓸어갔다.
으르렁의 포인트를 잠깐만 꼽아보자면, 일단 모두가 교복을 입은, 사실상 교복 컨셉의 시초다. 약간의 날티가 섞인 멤버들과 모범생같아 보이는 멤버들이 다 같은 교복을 입어서 마치 정말 다같이 어디 학교 다니는 옆 동네 학생들 같다. 뮤비는 원테이크 뮤비로, 그렇게 이어붙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원테이크로 촬영되었다. 그리고 곡 자체가 중독성에 멜로디까지 갖춘 이 시대의 명곡이다.
이렇게 시간이 지난 지금도 으르렁 찬사를 단숨에 쏟아낼 수 있는 것과 달리, 나는 으르렁으로 엑소가 활동할 때까지만 해도 스스로를 엑소 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음~ 엑소 잘 생겼네. 그렇지만 난 딱히.. 팬은 아니고..."의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으르렁 안무를 따라 하며 무릎에 멍들기 직전까지 기숙사 바닥을 쓸고 다녔다. 게다가 기숙사를 같이 쓰던 룸메이트들이 댄스동아리에서 한 자리하는 친구들이었다.
나는 양철인간처럼 삐그덕거렸지만 친구들 옆에서 대충 동작을 흉내 내며 3인조의 일원이라고 우길 수 있었다. 우리는 여자 기숙사 복도를 무관중 인기가요 무대로 삼았다. 그러니 이때가 나의 입덕 부정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서도 130818 인기가요 전설의 안경 무대를 기억하는 걸 보아서는 와중에 핵심 무대는 쏙쏙 골라먹었나 보다.
그러다 엑소가(정확히 말하면 EXO-K가) 2번째 미니앨범을 발매하면서 타이틀곡 '중독(overdose)'으로 컴백했다. 그쯤에 선거일이 겹친 황금연휴가 있었다. 나는 주말마다 아침 새가 지저귈 때까지 밤새 유튜브를 서핑하고 페이스북을 돌아다녔다. 여기에 연휴까지 시간이 주어졌다면? 며칠밤은 으르렁에 휩쓸려간 내 마음이 중독 비트에 맞춰 두둥실 떠다니며 태평양 찍고 대서양 찍고 인도양 찍기 충분했다는 뜻이다.
그날부터 볶음밥 프라이팬 바닥 박박 긁듯이 모든 그들의 흔적을 주워 먹기 시작했다. 지나간 모든 순간들이 아쉬웠다. SM 소속의 신인 그룹이니 꽃길만 걸었을 줄 알았는데 작은 지역 쌀 축제 행사도 가고 여기저기 많이도 다녔다. 마음이 아팠다. 너희... 고생 많았네, 하면서 더더욱 사랑을 쌓았다.
게다가, 알고 보니 사촌동생과 같은 중학교를 나온 멤버가 있었고, 그 멤버가 데뷔하고 나서 교무실에 왔었단다. "그 얘기를 왜 이제 해!" 하면서 사촌 동생을 원망했다. 물론 알았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지나간, 내가 모르는 엑소의 모든 순간이 아쉬웠다.
으르렁과 중독은 나의 마음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었기 때문에 엑소는 커리어 하이를 찍고 많은 콘텐츠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나는 쏟아지는 영상과 사진들을 쫒았다. 한국 케이블 예능부터 중국 예능, 음악방송 무대, 그 무대의 비하인드, 그리고 많은 직찍 사진들까지.
나는 이들의 스케줄을 하나하나 검색해서 네이버 블로그나 다음 티스토리를 찾아갔다. 올라오는 고화질 사진 모음들을 마우스 우 클릭 -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를 클릭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이 가장 일반적인 접근 방식이지만 2014년에는 아니었다. 그땐 데스크톱이나 노트북에 저장해야 했다.
그래서 그때는 하나하나 '어쩌고저쩌고' 파일 이름으로 저장했다. 치밀한 사람들은 날짜와 행사명으로 저장했지만 나는 '귀여워' '개귀엽다' 하아오늘도귀엽네' 같은 이름으로 저장하다 보니 나중엔 '귀여워123' 같은 혼종도 생겼다. 요즘 덕질을 할 때는 그냥 꾹 눌러서 저장하거나 캡처하면 된다. 훨씬 편해졌지만, 한 편으로는 내 마음대로 파일 이름을 저장할 수 없는 건 좀 아쉬운 일이다.
그렇게 고3의 상반기를 보내고 초조해진 '수험생 자아의 나'는 다시 잠시 세상을 끊어내고 보다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산울림과 인디 밴드 음악을 들으며 심신을 맑게 하며 수능을 쳤다. 그렇게 서서히 멀어졌던 아이돌과의 인연은 수능 후 논술, 면접, 다시 원서 접수를 거치면서 점점 흐려져갔고, 정신없는 생활 속 관심사는 다시 아이돌로 돌아가 불타오르지는 않았다. 잠시 인디밴드 빠순이 길을 걸었고, 인디밴드 판의 약간 메마른 듯한 떡밥에 만족하며 생활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대학생활에 적응하느라 바빴고, 그 생활이 새롭고 즐거웠기 때문이다. 대학 생활의 시작은 적응해야 할 것 투성이었다. 새로운 친구들, 고작 한 살 많지만 엄청나게 어려웠던 선배들, 소주와 맥주의 콜라보 사이에서 아이돌 오빠들은 잠시 기억에서 멀어졌다.
친구와 함께 소주와 맥주를 앞에 두고 서로의 흑역사 목격을 담당하고 침묵을 유지하는 우정 증명 릴레이가 벌어질 때쯤은 아이돌 적당히 좋아하는 삶을 살았다. "나 ㅇㅇ 좋아하지~ 노래 좋잖아!" 정도에서 멈출 수 있는 수준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때마침 동아리 오빠가 눈에 들어와 거기에 온 신경을 쏟았다. 알아가야 하는 사람과 알고 싶은 사람이 넘쳐나던 스무 살이었다. 잠시 찾아온 빠순이 휴식기였다.
돌이켜보면 쉬었던 덕질을 시작하는 데에는 크게 3가지 요소가 필요한 것 같다. 첫째, 기깔나는 구/신오빠들의 컴백. 둘째, 같이 소리 지를 친구들. 마지막 요소는 있으면 좋은 것인데, 바로 시간 혹은 마음의 여유다. 이건 기준이 좀 애매하긴 하다. 고3 때에는 사실 전혀 여유가 없을 때였는데, 어떻게든 시간 틈을 만들어낸 거니까.
스물한 살은 이 황금의 삼요소가 딱 들어맞은 때였다. 라디오 중간 광고가 시작될 때 디제이가 외치는 '멀리 가지 마세요~'를 오빠들에게 들은 것도 아닌데, 나는 어디 멀리 가지도 못하고 스물한 살에 다시 멱살 잡혀 음악중심이 방송되는 티비 앞에 앉게 된다. 앞서 이야기한 3요소 공식에 따라 거꾸로 하나씩 확인해보면 이유는 다음과 같다.
비교적 덜 중요한 세 번째 조건, 시간과 마음의 여유. 절절했지만 화르륵 불타오른 것과 달리 시시하게 꺼졌던 짝사랑의 불씨는 나의 시간과 마음에 여유를 안겼다. 대학 생활도 어느 정도 적응했고, 친한 친구들도 생겼다.
두 번째 조건, 같이 소리 지를 친구 - 덕질 메이트. 무작위로 배정된 동갑내기의 기숙사 룸메이트가 고등학교 때 엑소를 좋아했다. (여담이지만 그 친구와 나는 생일도 같았다. 지금은 연락을 하지 않지만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친구야.) 2집의 최애 곡 El dorado의 도쿄돔 영상을 수십 번 같이 돌려봤다. 같이 소리 지를 친구 겟.
그리고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조건, 기깔나는 컴백. 오빠들이 기깔나는 컨셉과 타이틀곡 그리고 명반으로 컴백했다. 엑소의 'Monster'였다. 기깔나는 컴백 겟! 테크웨어와 비슷한 검정 밀리터리룩에 약간의 체인, 화려하고 깊은 스모키 화장, 칼 같은 군무, 돈 냄새 가득한 비트. 이건 잘 될 수밖에 없는 곡이었다.
엑소의 정규 3집 EX'ACT는 애플뮤직에서도 엑소의 첫 정규앨범 XOXO 다음으로 엑소의 대표 음반으로 꼽을 만큼 정교하게 만들어진 명반이다. 거를 타선이 하나도 없다. 게다가 이 해에 진행된 콘서트는 물로 하는 무대에 지팡이로 하는 무대에 아주 사람을 돌아버리게 하는 무대가 참 많은데.. 이 콘서트에 가지 못한 건 두고두고 내 팬질에 한으로 남는 일이다.
이때부터 야금야금 엑소를 다시 좋아했다가, 시들해졌다가, 다시 좋아하는 일을 반복했다. 한 트위터 계정에서 몇 년 동안 한 팀만 좋아하는 멋진 팬들은 공감이 되지 않는 일일 지도 모르지만 그냥 내가 그렇다. 항상 마음 어딘가에서는 '저 엑소 좋아해요'라고 생각했지만 어떤 시기에는 무대 하나하나 찾아봤고, 어떤 시기에는 괜히 시들한 마음에 다른 곳도 보고 했다. 철새라고 놀리지 말아요~
더 어린 시절에는 이 그룹 저 그룹 다 좋아해 봤지만, 사진도 저장하고 앨범을 사고 잡지를 모을 만큼 좋아했던 아이돌은 엑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 그룹 저 그룹 돌아다니다가도 추석이 되면 고향에 내려가듯 찾게 되는 아이돌도 엑소였다.
나의 암흑 같은 고등학교 3학년 때 한 줄기 빛이 되어준 그들은 취업준비 시즌이 되어서 또 기깔나는 컴백(템포)로 돌아와 나의 혼술을 함께했다.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일을 이야기할 때 꼭 한 번 따로 짚어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후회 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성인이 된 이후 꽤 오랜 시간 동안 서울에 살고 있고, 서울은 정말 휘황찬란하고 재미있는 시끌벅적 특별시다. 그렇지만 나는 인천 출신이니까, 스스로를 인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덕질도 비슷하다. 지금 세븐틴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 제일 웃기고 재미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나의 근본이 엑소엘이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스친다. 리더 수호의 말을 빌리면, 이 광활한 우주에서 엑소와 엑소엘로 만난 건 내게도 참 소중한 일이었다.
기깔나는 컴백, 덕질 메이트, 시간과 마음의 여유라는 덕질의 삼박자는 그 이후로도 내 인생을 여러 번 더 뒤흔들면서 나를 또 다른 오빠들에게 인도했고, 지금은 여러 오빠들에게 평생을 약속한다고 부르짖고 있다.
왜 엑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갔냐면... 그건 뒤에서 얘기하기로 하자. 미리미리 미성년자는 깡생수를, 성인은 알콜 음료를 준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