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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년대길 김부장 Jul 23. 2021

영업소장 1. 부임 축하 화분 - 영업소장 첫날의 추억

유명인의 축하 문구는나에게 꽃길을 열어 주었다.

2002년 4월,  일산의 한 사무실. 아침 9시, 부임 조회. 

나는 조회대 앞에 서 있고 내 앞에는 너무나 낯선 20명 남짓의 사람들이 책상을 모두 차지하고 앉아 무심코 나를 바라보고 있다. 기대하는 눈빛을 하고 있는 몇몇과 '뭐지?!' 하는 듯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몇몇. 그리고 나에게 누님이나 이모, 형님이나 삼촌뻘은 되어 보이시는 너무나 다양한 연령층의 분들과 마주하니, 전날 2시간만 자면서 준비했던 30분의 데뷔 무대를 잘할 수 있을까. 걱정 반 기대 반이 되었다. 

그렇게, 나의 보험회사 첫 영업소장은 시작되었다.

  

신입사원 때부터 영업소장으로 발령이 나기 전까지 나는 '교육부'에 근무했다.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실천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영업소장 발령 전까지 나름 5~6년을 남들 앞에서 강의며 교육 진행 등등의 노하우를 쌓고 아주 다양한 교육생들 앞에 직접 서 보았으니, 겨우 30명도 안 되는 분들을 대상으로 채 30분도 안 되는 조회를 하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라고 생각했다. '나의 성장과정 영상으로 강한 인상을 먼저 남기고, 우리 영업소의 그라운드 룰을 설명하고, 앞으로 나의 영업소 운영철학까지...' 생각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준비였다.


그런데, 조회대 앞에 서서 처음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쉬는 표시까지 통째로 외웠던 자료의 순서는 물론이고 내용이 하나씩 지워지더니 어느새 하얀 백지만 남았다. 그리고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너무나 뻔한 이야기만 내뱉은 채 나에게는 너무나 길게 느껴졌던 10분을 보내고 말았다. 겨우 10분!

모든 걸 망쳐버린 것 같았다. 정말 임팩트 있게, 좋은 첫인상을 남기고 싶었는데...

새로 온 영업소장을 만나는 첫날 아침, 그래도 조금은 기대를 품었을지 모를 우리 영업소 식구들은 아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야 영업소장이라는 것을 처음 시작하는 날이었지만, 우리 영업소 식구들은 지난 소장들과 나를 쉽게 비교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내가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는 생각에 지금도 그때 기억을 떠올리면 얼굴까지 화끈거린다. 이렇게 처음 시작이 꼬이고 보니, 이후에 그 인상을 지우고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가며 회복하는 데는 너무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최종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일산에서의 작은 실패로 '보험회사의 꽃'으로 활짝 피어보겠다는 패기는 이미 사라졌고 앞으로 성공한 영업소장으로 이름을 날리거나 회사 내에서 좋은 자리의 커리어를 쌓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걱정까지 하게 되었다. 무려 2개월 여의 사전 교육을 받고 정말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나름 준비해서 출발했던 첫 영업소장이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그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아주 우연히 찾아왔다.  

어느 날 회사 연수원 식당에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모 부장님께서 "소장 한 번 더 해야지?!"라며 식판에 무심히 밥을 담으시며 인사를 건네셨다. 그리고 6개월 후, 나는 수유에 있는 두 번째 영업소에서 다시 부임 조회를 할 수 있었다.


다시 얻은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았다. 

2002년 월드컵의 광풍이 대한민국 전 열도에 휘몰아치고 있던 나의 첫 부임 초창기부터 2년 반을 채우고 큰 절을 올리고 눈물을 흘리며 일산을 떠나기까지 많은 노력과 시도에도 내가 목표했던 수준의 성과를 들고 나올 수는 없었던 이유는 뭐였을까? 

나는 이것을 "첫 만남의 실패"라고 생각했다. (부임 조회 내용 준비와는 별개로...)

그래서 두 번째 영업소장 첫 만남에 어떤 것을 준비할지 참으로 많은 고민을 했다. 무슨 전략적 방법이나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없을까? 여러 날을 고민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어 거의 보름을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봤던 것 같다. 우연히 TV 드라마에서 사무실 개소식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때 번뜩 아이디어가 떠 올랐고 고민 없이 "그래 까짓 거 그냥 한번 해 보자. 밑져야 본전이지 머" 이런 생각으로 실행계획을 세우고 좀 유치하지만 부임 날에 맞춰 실행에 옮겼다. 

 

내가 두 번째 영업소로 첫 출근하는 날, 사무실에 여러 개의 화분이 배달되어 왔다. 함께 근무했던 교육부의 부장님과 첫 번째 영업소 식구들 그리고 우리 회사의 회장님, 대표이사님, 영업담당 임원, 그리고 유명한 배우까지... 화분에는 따뜻한 격려와 축하의 메시지가 담긴 리본이 있었고 크기도 모양도 종류도 다양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새로 온 소장은 누군데 저런 게 와?" 

나는 등 뒤의 수군거림을 소심하게 즐기며 여유 있는 미소를 머금은 채 영업소 안을 누볐다. 새로운 분들과 자신감 넘치게 악수를 나눌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유치하고 돈도 제법 들어간 이벤트였지만, 첫 만남의 효과는 그 뒤로도 계속 이어져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성과를 이루었고, 떠난 지 10여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가끔 연락해서 얼굴을 보고 있는 영업소 식구들이 있으니, 더할 나위 없다. 

<당시 "보험신보"에 실린 우리 영업소 기사>



두 번째 영업소를 떠날 즈음, 함께했던 영업팀장들과의 회식자리에서 

"난 소장님이 처음에 무슨 로열패밀리인 줄 알았어요!"

"그러게, 처음 온 화분 보고 다들 놀랐잖아!" 

"그래, 다들 회사에서 엄청 밀어주는 사람이 우리 소장으로 왔다고 기대된다고 했었어..."

모두 거들며 한 마디씩 했다. 

'아.... 그날의 비밀을 밝혀야 하는 건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미스터리를 남겨 놓고 떠나는 것도 재미니까...


그날의 진실은 이랬다. 정말 고맙게도 내가 함께했던 분들이 2개의 화분을 보내주셨고  

그 나머지는? - 내가 직접 주문했다. ㅎㅎㅎ


지금도 이를 모르고 계실, 회장님, 당시 대표이사님, 당시 영업담당 상무님, 그리고 배우님께 명의도용의 사죄와 함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뿐만 아니라, 두 번째 영업소의 식구들에게도...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회사에 입사를 하고 나면 회사에서 승승장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생각을 좇아 행동에 옮기다 보면 회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직군을 꼭 거쳐보고 싶어 할 것이다. 나 또한 그랬고 그래서 영업소장을 잘하고 싶었다.

 

지금도 많은 후배들이 새롭게 영업소장(지금은 이름도 바뀌어서 '지점장'이다. 회사마다 또는 업종에 따라 다양한 명칭을 쓰고 있다.)에 도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업무로 첫 발을 내딛는 많은 직장인이 있을 것이다. 나에겐 추억이 되어버린 이야기지만 무엇이라도 새로운 시도를 해 보고 싶은 모두에게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덧) 회사 술자리에서 회자되던 내 이야기를 듣고 몇몇 후배 소장들이 실제로 실천에 옮겼고 그들도 실패하지 않았으니, 혹여 누구에겐 성공을 바라는 '부적' 같은 것은 아녔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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