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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변 Dec 14. 2019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2019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를 읽다

퇴근 후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로브를 두르고 앉아 좋아하는 과일에 맥주를 곁들이는 것은 가장 좋아하는 일과 중 하나다. 이 책은 한창 무화과가 제철이었던 어느 날에 이렇게 좋아하는 일과와 함께했던 것인데, 브런치에 업로드가 조금 늦은 감이 있네.



스웨덴 한림원 지난 10월 10일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폴란드의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를,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오스트리아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페터 한트케를 각 선정하여 공개한 바 있다. 노벨 문학상의 2018년 수상자가 한해 늦은 올해 발표된 것은 지난해 5월 한림원의 지원을 받은 사진작가가 여성 18명을 성폭행했다는 폭로가 터져 나오자 한림원의 종신위원들이 이에 책임을 지고 대거 사퇴하면서 2018년도 수상자를 선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인데, 이후 한림원은 종신위원과 수상위원회를 새로운 구성원으로 꾸려 금번 수상자 선정과 함께 지난해 수상자 역시 발표하게 된 것다.


2019년 수상 작가인 페터 한트케의 주요 작품에는 1969년 작인 희곡 『관객모독』과 1972년 작인 장편 소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등이 있는데, 금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공개 소식을 접하고, 두 명의 수상 작가 가운데 페터 한트케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인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사실 이 글은 회사 블로그에도 기고했던 글이어서, 당시에는 아래와 같이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를 참 대외적이고 상냥하게도 적어 놓았다.


두 작가 가운데 페터 한트케의 작품을 먼저 선택하게 된 것은, ‘전위적인 문제 작가’로 불리는 페터 한트케가 써내려 갔을 그 ‘전위적’ 문장이 궁금했기 때문이에요. 스웨덴 한림원이 꼽은 페터 한트케의 수상 이유도 “독창적인 언어로 인간 경험의 주변부와 그 특수성을 탐구한 영향력 있는 작품세계를 보여 주었다”는 점이었다는 것도 한몫을 했습니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선정 이유가 “백과사전적 열정으로 삶의 한 형태로서의 경계 넘나들기를 묘사하는 데 있어 서사적 상상력을 보여줬다”였던 점과 비교했을 때, 서사적 상상력보다는 독창적인 언어에 대한 호기심이 좀 더 컸다고 할까요


저 말이 거짓말이라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분명 저런 이유도 있었지. 하지만, 사실 사람 사는 데 항상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당시에는 그냥 '2019년이니까 2019년 수상 작가 먼저 읽지 뭐'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의 정치적 행보와 관련된 논란을 찾아보지도 않을 만큼 게으른 이유였다. 페터 한트케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라는 이름하에 비 세르비아인에 대한 인종 청소를 자행한 밀로셰비치와 가까운 관계로, 그 '인종 청소'를 부인하고 그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읽기까지 한 자이다. 이런 이유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 늘 이름이 오르내렸음에도 1990년대 들어서는 수상 후보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전술한 것처럼 금년 노벨 문학상 심사위원은 외부에서 초빙된 새로운 구성원으로 꾸려지면서 페터 한트케가 수상하였고, 이에 일부 심사위원은 페터 한트케의 수상자 선정에 항의하여 자진 사퇴하거나, 시상식에 불참하기도 하였으며, 1988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크리스티나 독타르는 자신의 메달을 반납하였다고도 한다.


이에 대한 한림원의 입장은 "Win is endorsement of literary merit, never an indorsement of political view". 즉, 노벨 평화상이란 문학적 가치에 주어지는 것이지 정치적 관점으로 평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되나? 사실 관계를 전하는 기자들조차 어떠한 견해도 담기지 않은 사실 보도가 아닌 그 나름의 진실을 보도하는 것이고, 역사를 기록하고 연구하는 사람들만 보더라도 기록된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는 말이 왜 있겠어. 페터 한트케가 부고 기사나 쓰는 사람이 아닌 이상 그의 시대 정신과 정치적 관점을 그의 문학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보고 평가하는 것이 가능하거나 옳은 일일지?


어쨌거나, 나는 그의 책을 읽어 버렸고 간단히 남기는 감상은 아래와 같다.


페터 한트케는 인간 경험의 섬세하고 소외된 측면을 탐구하였다고 평가받는 작가다. 하지만, 그의 수상에 극명하게 갈리는 반응처럼, 등장인물의 감정과 주관에 대한 과몰입이라는 혹평이 공존하는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이기도 하다. 내 감상은 (수상 스캔들을 차치하고서라도) 혹평에 가까운데,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글을 써야 하나 싶지만, 이런 글에 대한 수요는 명백할 것이라는 것. 나는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어쩌다 페터 한트케 작품이 인간의 자기 정체성과 자아에 이렇게까지 몰두하는 특징을 지니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표현론적 관점을 한껏 동원해야 했다. 회사에 기고했던 대외적이고 상냥한 버전에서 그 노력의 흔적을 아래에 일부 복붙 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해 본다. 올가 토카르추크 읽을 걸.


페터 한트케는 세계 제2차 대전 중이었던 1942년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이민자였고, 페터 한트케는 그 어머니와 오스트리아에 주둔 중이던 유부남인 독일 병사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죠. 게다가 페터 한트케의 어머니와 결혼하여 한트케라는 성을 붙여 준 것은 생부가 아닌 다른 독일 병사였습니다. 훗날, 페터 한트케의 어머니는 노년의 건강 악화와 불행한 결혼생활을 비관하여 51세의 나이로 자살합니다. 그리고 페터 한트케는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벽촌에서 보냈습니다.
전쟁 통에 태어나 안정적이지 못한 가정에서 외로움과 가난을 겪으며 아무런 인프라 없는 고립된 작은 마을에서 한창 호기심 많고 감각적으로 예민할 시기인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면, 결국,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주관에 깊은 관심을 가지다 보면, 현실에 존재하는 지금의 나 자신만으로는 관심의 떡밥이 부족하게 되고, 결국 과거 회상과 허구의 공간 속에서의 나 자신으로까지 자아를 다층위로 바라보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러한 페커 한트케의 삶을 떠올리며 이 책을 표현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페터 한트케라는 작가가 탄생하게 된 배경, 그리고 그 배경에서 탄생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를 읽기가 좀 더 쉬워질 것 같습니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주인공은 페터 한트케와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가이기도 합니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의 ‘이별’은 이 책의 서사 측면에서 우선, 주인공의 아내 ‘유디트’와의 이별을 뜻합니다. 이 책의 주인공이 뉴욕으로 떠나버린 유디트를 찾아 나서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죠. 그리고 이후 주인공이 유디트와 다시 만나 결국 평화적으로 이별하기로 하는 과정이 주인공의 시점에서 그려집니다. 책을 읽고 나서 가장 곱씹게 되었던 부분은 주인공이 책의 끝 무렵 만난 영화감독 존 포드가 했던 말인데요. “선생님은 왜 항상 ‘나’라는 말 대신에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세요?”라는 유디트의 질문에 존 포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함께하는 공적인 행동의 한 부분으로 작용하기 때문일 겁니다. 일인칭은 한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을 대표할 때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아라는 것은 으레 외부와 접촉하는 행동 주체로서의 ‘나 자신’만을 뜻한다고 여겨집니다. 반면 페터 한트케는 존 포드를 통해 행동 주체로서 어느 ‘집단’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 나아가 ‘나 자신’의 범주를 넘는 자아 개념을 제시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으레 집단의 평균점이 오히려 그 집단 내에서 달성되기 어려운 현상을 종종 발견하고는 하지요, 즉, 개별적 자아가 하는 행동이 곧바로 집단의 자아를 구성할 수 있다는 의견으로 읽혀져서,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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