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중도포기 하더라도 남는 장사

<영어 해방일지1>

by 삼분카레


12월이 시작되었다. 열두 달 중 마지막 달의 시작이라니 믿고 싶지 않다.

지난 두 달 동안은 영어공부에 빠져 다른 일들에 시간을 할애하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인생의 숙원사업이었다고 할까, 영어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년 초가 되어 한해의 계획을 세울 때쯤 멀리 도망간 줄로만 알고 있던 영어는 어김없이 다시 내 곁으로 와 맴돈다. 언제 어떻게 집을 나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그리 궁금하지도 않을 만큼 너무 익숙해진 일이다. 그러고 보면 아이러니 하게도 영어의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는 일은 결국 영어를 정복(?)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역설적인 결론이 나온다.


새해는 아니지만, 외국을 나갈 기회가 있어 서둘러 다시 영어공부에 돌입했다. 일을 그만두니 낮 시간에 공공기관에서 제공하는 교육혜택을 다방면으로 볼 수 있다. 사설기관보다는 비교도 안될 만큼 싼 가격에 원어민 수업을 들을 수 있으니 감지덕지하며 부지런히 다녔다. 캐나다인 선생님은 인정사정없이 말을 흘린다. 이건 순전히 내 입장에서다. 왜냐하면 레벨테스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레벨 이상의 반에 나를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반편성에서 인원수를 조절하다보니 아마 내가 희생양이 된듯하다. 아무렴 어떠하랴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일 그냥 부딪혀 보자라는 맘으로 시작했다. 중국어 어학연수를 할 때에도 나는 중국에서 몇 년씩 공부한 외국인들 반에 들어가서도 배겨낸 위인이다. 어학공부 할 때는 오히려 자신의 레벨보다 살짝 높은 반에서 공부하는 것이 더 낫다고 베짱 튕겨 보지만 막상 입도 뻥긋 못하는 날이면 자괴감이 몰려온다. 매 시간 스트레스 왕창 받고, 괜찮다고 달래보지만 주눅 드는 건 어쩔 수 없어 수업 마칠 때마다 무서리 맞아 고개 떨군 잡초 꼴이 된다.


일단 외국인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말을 건네 오면 머리가 새하얘지면서 도통 알아듣지를 못하니 온 몸을 써서라도 대답할 수 있는 나의 뻔뻔함도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원어민과 매일 아침 10분씩 전화영어를 시작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수십 번을 준비하는 과정자체가 공부이다.


EBS 영어는 아침에 알람 대신이다. 앱 EBS반디에서는 김밥천국 메뉴만큼 다양한 영어 과정들이 있다. 심지어 재방송에 재재방송까지 들을 수 있어 책만 구입하면 얼마든지 다양한 컨텐츠를 즐길 수 있다. 방송으로 흘러나오는 영어를 들으며 침대에서 깼다 자다를 반복하며 그렇게 기상을 한다. 아침에 들었던 내용을 토대로 나중에 다시 책으로 정리를 해야 한다.


또 하나, 패턴공부와 프리토킹으로 주도적인 공부를 하는 스터디 모임에 참가한다. ‘Culcom'은 학원이라기 보다 스터디모임을 주선해주는 베이스캠프 같은 역할을 해준다. 그래서 일반 학원보다 가격이 저렴하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회화위주의 공부를 할 수 있어 좋다. 이 방식은 그야말로 말도 안되지만 일단 내 지르고 보는 선행동 후수습 방식이다. 나날이 얼굴이 두꺼워지는 만큼 내 영어실력은 늘겠지라는 근거 없는 논리를 주장하며 나는 오늘도 열심이다.


매일 영어 패턴을 외우고, 단어 수십 개를 외우지만 돌아서고 나면 누군가로부터 탈탈 털리는 허탈한 기분마저 든다. 이런 기분이야 이골이 난 터라 내일 또 외우다보면 언젠가는 외워지겠지 하며 무시한다. 들이는 시간만큼 결과는 금방금방 나타나지 않지만 그것 또한 탓하지 않으려 한다. ‘네까짓 게 뭐라고!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어디 해보자’는 말로 내 박약한 의지를 들키지 않으려 애쓴다.

처음 시작 때와는 달리 두어 달 정도 지난 지금은 적어도 상대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변화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성장해 가는 느낌, 이것이 공부의 맛이다.

작년에도 영어공부는 호기롭게 시작되었었다. 시제와 관계대명사에 관련한 문법으로 엄청난 훈련을 소리 내어 말했다. 시원스쿨의 동영상 강의와 EBS영어의 회화와 쓰기도 병행했었다. 앱 cake를 보며 무한반복으로 원어민의 말투를 따라했었다. 그때는 직장을 다니고 있을 때라 지금처럼 대면으로 이야기해 볼 기회는 없었다. 분명히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영어책에는 또다시 먼지가 앉아있었다. 또 중도 포기였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패배감도 패배감이지만 이러다가는 더 이상 스스로에게도 면목이 서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서야 알았다. 작년에 한동안 그렇게 열심히 했던 내용들이 아예 다 사라져버린 건 아니었다. 새록새록 다시 돋아나는 새싹의 경이로움 같은 것을 느꼈다.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돌탑의 단순하면서도 깊은 원리를 이해했다.

중도포기든 실패든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다. 내가 행동을 취했을 때만이 일어나는 결과들이다. 결코 자랑스럽거나 거창한 일은 못되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운 일은 더더욱 아니다. 이렇게 한두 개 쌓아올리던 돌탑은 언젠가는 정상이 뾰족하게 솟아있는 탑이 될 것이다. 적어도 내가 다시 시작하는 행동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그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새해에도 어김없이 이런저런 일들을 계획할 생각이다. 또 어느새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계획이 될지라도 결코 굴하지 않을 수 있다.

팔아봤자 에누리 없다는 장사꾼의 말은 거짓말일망정, 공부는 중도에 포기하더라도 남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내게 남은 ‘또다시’ 찬스는 무한리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