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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울 Jun 09. 2022

이제야 신이 없다고 믿겨진다
'종교없는 삶' 책리뷰

모태신앙, YWAM, 30년넘게 교회 다녔던 나


어떻든 하나님의 뜻대로 되겠지


신이 도와주신다거나, 신에게 모든 것이 달려 있다거나 그래서 모든 것을 맡긴다고, 나를 책임져주실 것을 믿는다는 고백은 기도의 단골 멘트다. 그러나 서른 중반에 이르고 나서야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던 것이 패착인 것 같다. 되돌아 갈 수 있다면 종교 없는 삶을 살고 싶다.


행복하건 불행하건 모두 신의 뜻이었고, 나는 신 없이 보잘것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인식을 고백해왔다. 이런 고해성사는 은근히 강력하게 나를 소극적인 성향, 나에 대한 믿음이 없이 무기력하게 이끌어 왔다. 신의 뜻은 나를 편안하게 하기 보다 '해도, 안해도 신의 뜻대로 될텐데 내가 더 할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무책임한 태도로 삶을 살게 했다. 


예를 들어 위태로운 사건에서는 신비한 하나님의 능력을 바랬다. 기도하고 그것이 경건한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했다. 고3때 오르지 않은 수능점수를 가지고 절실하게 기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시간에 한 문제라도 더 풀어야했다. 누군가는 최선을 더 할 수 없고, 노력 이상의 무엇이 필요할 때 였겠지만 내 경우는 노력하지 않고 운이 따라주는 꼼수로 신을 이용하려고 애썼다. 내 힘으로 되지 않는다고 쉽게 결정짓고 당장에 기도함으로 노력했으니 신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그러나 신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내가 교회에 가는 이유, 유대감

유대감을 다른 곳에서 채워진다면?


최근에는 교회에 가는 이유가 예배라기보다 유대감 때문이었다.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또래들이 한 곳에 모여 나름 건전하고 도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안전하게 느껴졌다. 이런 공동체에 속해있다는 따뜻함이 좋았고 외롭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만 따뜻해져도 나머지 일주일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러다 내가 진심으로 이제 종교 없는 삶을 지향하는 이유는 유대감이 다른 곳에서 채워졌더니 아무 쓸모가 없어졌다. 그것이 처음엔 죄의식이 들다가 이마저도 희미해졌다. 종교도 결국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되니까 다니는 건데, 아무것도 없고 다른 곳에서 채워진다면 갈 이유가 없다. 좋은 직장 동료와 주말에 친구를 더 자주만나고 취미나 자기계발, 운동에 집중하니까 나름대로 엄청난 자극과 활력이 생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 유대감은 교회 안에서 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오히려 매일 기다려지는 운동, 하면 할 수록 재밌는 취미 같은 걸 생각하면 그게 더 내면에서 엄청난 힘이 발휘되는 것 같았다.


저는 늘 고차원적인 힘을 다른 사람들과의 유대로 생각했어요. 삶의 한 부분이라는 느낌으로요. 중독의 중심에는 공허감이 있어요. 그래서 중독자들은 흔히 그 공허감을 신으로 채우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죠. 저는 그 공허감을 '유대'로 채운다고 생각하곤 했어요.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로요.  p.270, 종교 없는 삶, 마약중독자에서 임상사회사업자로 변한 41세 여성 인터뷰


고난에 신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고도의 자기 신뢰를 발휘하는 무신론자들


어렸을 때부터 이해가 안갔던 대목이다. 고난 극단적으로 전쟁에서도 이유가 신에게 달려있었다. 쓰라린 죽음과 비참함이 신의 뜻이고 인간은 무력하게 그걸 지켜보고 '신의 뜻'이라고 인정해야하고만 있는 자세가 맘에 안들었다. 크게는 전쟁 작게는 나의 실패에 대해서도 결국의 신의 뜻이면 나란 존재는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정해져 있는데 왜 노력해야하나 싶다. 나에 대한 믿음은 없다. 신에 대한 믿음이 오히려 내가 하는 일, 내 능력을 작게 만든다. 무신론자들은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다. 그보다 죽음 이전의 삶을 믿는다.


그러나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하늘을 향해 도움을 비는 대신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시선을 돌린다. 이로써 무종교적인 극복의 핵심, 즉 거침없고 회복력 강한 고도의 자기신뢰에 이른다...이로인해 더욱 절실하게 삶을 살아가고, 사랑을 중요하게 인식하며, 진실성을 더욱 많이 보여주고, 가족과 친구와 보내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긴다. 무종교적인 감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삶은 환영도 아니고 죄로 점철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 찬란한 천국이나 불타는 지옥으로 인도하는 덜 중요한 전초기지 같은 것보다 아니다. 그보다 삶은 지금 이 수간 여기에 있으며, 실제적이다. 삶은 힘들 때도 있고 평탄할 때도 있지만, 언제나 너무도 유한하다. 눈부시게 빛나는 삶과 그 삶이 가진 소용돌이의 핵심에는 바로 삶의 유한성이 있다. p. 269, 399


간혹 심각한 병에 걸리거나, 삶에서 엄청난 힘겨움에 닥칠때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에서는 그때서야 하나님을 찾지 말고 '평소에 감사하고 잘해야한다'라는 압박도 주어졌다. 그때가서 믿으면 왠지 괘씸죄로 신이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책에서 나온 인터뷰이 중 한 명은 오히려 반대라고 말했다. "애초에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믿음의 위기'를 겪지 않고, 그래서 이런 일이 일어나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요. 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거나 벌을 주기 위해서 이런 일을 일으킨 게 아니기 때문에 왜 내게 이런 일이 있어난거지?하고 생각하는 정신적 위기도 없죠. 영적으로나 실존적으로 낙심하지 않는 겁니다. 대신에 선뜻 인정합니다. '음 그건 사고였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뭐지?'" p. 278


종교가 없는 사람은 비도덕적이고, 

세속적일 것 같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을 만나지도 말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어느정도 수긍했다. 신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으면 더 불결하고 죄를 많이 지을 것 같아서다. 하지만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오히려 교회다니는 사람을 밀어내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이 훨씬 더 배타적인 모습이 의아했다. 누가 누구를 더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조건에 맞으면 사랑할 수 있고 그게 아니면 사이비 취급하는 그들만의 사랑. 종교성이 강할 수록 편견도 더 강하다는 연구결과가 많다. 부시는 죄수들의 고문을 허용했고, 종교가 없는 백인들이 시민평등권운동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종교없는 사람들이 성소수자, 이민자들에 대한 포용이 높았고, 심지어 수감 중인 미국인들 중에서 무신론자는 0.5%도 되지 않는다. 


어릴 적 나도 어렴풋이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 비도덕적이라는 생각이 동조했다. 그러나 사실은 어디에도 그 의견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종교적이지 않으면 세속적일 것 같다. 교회에서 가장많이 언급되는 표현이기도 하다. 세상의 것, 세속적인 것.


그러나 세속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사람은 홀리요크로 1851년에 주장했다. 그는 '세속주의는 종교에 반대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그것보다는 현세 중심적 에토스를 바탕에 둔 개인적인고 긍정적인 성향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과 자연, 삶과 실존, 지금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삶을 이끌어주는 믿음과 원칙에 입각한 이상이 바로 세속주의다.

[세속주의 근본 원칙 세 가지]

1. 물질적인 수단으로 현세의 삶을 향상시킨다.

2. 과학은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섭리다.

3. 선을 행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음 생에 보답이 주어지든 안 주어디느 현세의 선은 좋은 것이며 이 선을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무신론자들이 믿고 행하는 규범

"나를 대하듯 남에게 대할 것"


종교 없는 삶에서 따라야할 선은 '황금률'이라고 불리며 우리가 늘 실천해오던 규범이 있다. 바로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타인을 대한다는 것이다. 이는 세속주의적 도덕의 기반이다. 종교없는 사람들에게 도덕성은 섹스를 자제거나 알코올을 피하거나, 권위적인 인물이 시키는 대로 하거나 내세의 결과가 두려워서 무언가를 하지 않은 것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에 더 가깝다. 본질적으로 사리에 맞고 실천하기 쉽다는 면을 생각할 때 황금률은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다. 


실제로 기독교의 가르침보다 먼저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기원전 600년에 파피루스에 "다른 사람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라고 말했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경 "네가 바라지 않은 것을 남에게 하지말라"라고 했다. 고대 그리스 탈레스는 "타인에게 발견한 허물을 스스로 행하지 않을 때 가장 착하고 바르게 살 수 있다" 기원전 1세기 랍비 힐렐은 "그대가 싫어하는 일을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이 외에도 이슬람교, 불교, 자이나교, 바하이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교에서도 이 표현은 있다. p. 38-39


종교인들은 도덕을 

신에게 아웃소싱한다


종교인들은 그저 순종적이거나, 두려움에 차있거나 탐욕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 말에 가장 공감하는 일이 나는 어릴적부터 하나님이 어디서든지 보고있다고 생각했다. 휴지통에 휴지 하나를 넣을 때에도 그랬다. 내안의 선함을 발견하고 타인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니다. 신에게 버림받을까, 나를 심판대에 세울 항목 중 하나이지 않을까 두려웠다. 인간은 원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악하다고 생각했고 행동 하나하나에 나의 죄가 들어가지 않을지 스스로를 통제했다. 그야말로 신이 두려워서, 순종적으로 행동했고 잘하면 축복을 기대하면서 탐욕스럽게 행동할 뿐이었다.


도덕성이 신에게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덕을 아웃소싱하는 죄를 저지를 수 있다. 도덕성은 본질적으로 사색과 평가, 대안들에 대한 이해, 일어날 수 있는 결과에 대한 수용을 토대로 한 결정과 선택 그리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삶의 복잡한 문제들을 헤쳐 나가는 것과 관련된 문제다. 옳고 그름, 공정과 부정, 연민과 잔인성에 대해 항상 내면의 도덕적 나침반이 전하는 소리를 듣고 지키며,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 소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도덕성인 것이다. 그러나 신을 도덕성의 원천으로 삼으면 내면의 나침반을 찹조할 피룡가 없어진다. 그냥 신이 방향을 알려주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는 도덕석인 숙고라는 힘든 일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신보다 높은 권위자에게 고분고분 따르는 것, 자신이 아닌 외부의 다른 곳에서 도덕적인 인도를 구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p. 41-42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면에서 많은 종교인들이 아주 제한되어 있어요. 이것은 하면 안되고, 저것도 하면 안된다고 가르치니까요. 종교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방식이기도 해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 말해주죠. 저는 제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길 원해요. 제가 초점을 맞춘 것은 바로 이거예요. 아이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갖도록 맡기는 것이지요."  p. 157 


종교 없는 사람들을 정의하기 쉽지 않다.

무신론자, 무종교인, 불가지론자, 무종교인 인본주의자, 종교인, 기독교인 등 모든 사람이 이 표현대로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뒤섞이다. 사회학자 데이비드 보아느는 주어진 종교 전통을 추종하지 않고 다양한 초자연적인 믿음을 지지하는 이들은 '모호한 충신도들'이라고 표현했다. 기독교는 피하면서도 유령이나 환생을 믿는 사람들, 무종교인으로 자랐지만 영적이고 우주적인 실재가 우주에 스며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로버트 퍼트넘은 '경계인들', 그레이드 다비는 '소속 없는 신자'라고 말했다. 문화적으로 종교인인 사람들도 많다. 교리를 믿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철학자 존 슈크는 신에게 냉담하고 무관심한 사람들을 '무관심론자'라고도 말했다.


종교없는 사람들은 개인의 자율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퓨 리처시센터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종교가 없는 미국인들 중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28%뿐이었다. 무종교인은 개별화, 개인주의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1. 개인의 자율성 증대를 강조하고 2. 살므이 다양한 면에서 개인의 선택권을 확보하고 3. 전통적인 세계관을 거부하며 4. 형이상학적인 믿음을 토대로 전통적인 형태의 협회에 가입하거나 일원이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무종교인들은 '사회적 지원을 덜 필요로 한다'



경외감이 신이 있다는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

창조의 신비를 생각하면 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신이 아니고서 설명할 수 없기에 신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히려 모든 것을 신의 능력으로 여기는 것은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탐구하기를 멈춘 자세일 뿐이었다.  찰스 다윈은 기독교 신앙을 버린 후에도 창조의 숭고함을 변함없이 느꼈다. "이런 인식의 기원을 설명하는 일이 아무리 어려워도 이것을 신의 존재를 주장하기 위한 논거로 제시할 수 없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들은 바로 그렇게 할 것이다. 경이감, 황홀한 신비감을 더 나은 어떤 존재, 신성한 존재가 저기에 있다는 증거로 해석하는 것이다. 소설가 조지프 콘래드는 황홀한 상태가 순전히 자연적이고 전적으로 이 세상과 관련된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의 우주가 실제로 신비로 가득 차 있어도...우리의 오묘한 환경과 소통하기 위해 어떤 신화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인격신을 숭배하지 않아도 창조의 광대함과 아름다움에 경외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 샘 해리스


무종교적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해서 미학적인 영감과 신비함을 향한 경이, 감사의 마음, 실존적인 기쁨, 타인과 자연 및 불가사의한 것과의 깊은 유대감 없이 차갑고 무미건조하게 살아갈 것은 아니다. 이와는 정 반대이다. 경외를 느끼고 경험하는데 신은 필요하지 않다. 생명이 필요할 뿐이다. p.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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