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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울 Oct 06. 2020

바닥이 점점 사라지는 엘레베이터

강박과 공존하기

데일리 다이어리보다 일주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다이어리를 선호한다. 한 페이지에 하루치 일정을 몰아넣을 만큼 많은 일을 소화하고 있지도 않고, 적어놓은 일조차 하지 안 할 때, 영영 지우지 못한 페이지가 숨 막힌다. 숨이 안 막히게 계획한 일을 멋지게 소화하면 되는데 그러질 않는다. 미리 실패를 점치고 그 실패를 마주하지 않기 위해 영영 피해버리기 위해서.


좌: 위클리다이어리 우: 데일리 다이어리 / 출처: 몰스킨

하루만 보이는 일정은 다음 페이지에 다시쓰는 작업이 번거롭다. 그렇게 미루기를 예상한다. 그래서 안심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루를 완벽하게 끝내지 못했을 때가 꺼림칙하고 불편하다. 위클리 페이지에서는 몇 개 지우더라도 전체적으로 꽤 많은 할 일 해낸 것 같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정도의 합리화는 정신건강에 이로운 것 같다.


얼마 전 비밀보장*을 듣는데 송은이와 김숙이 지인들에게 자기들 중에 누구처럼 살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나라면 당연히 송은이다. 계획적이고 타의 모범이 되면서, 특별한 위험부담 없이 꿈을 이뤄가는 리더형. 김숙처럼 무모한 욜로 생활이 부럽기도 하지만, 계획 없는 삶에 몸서리가 난다. 계획적인 삶을 산다고 하여 불안을 적게 느끼는 것도 아니고. 계획적이라서 중요한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최소한 지금은 계획하고 이뤄가는게 좋다.

*팟캐스트 송은이와 김숙의 비밀보장


이런 김숙에게 '계획한 것 중 얼마나 이뤄지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그녀는 '50%는 이뤄진다'라고 말했다. 송은이가 그 정도면 엄청난 성취라고 말하자  김숙은 '송은이 씨가 100을 계획한다면 나는 8을 계획한다. 그 8도 명확하게 실현 가능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했다. 자신은 솔직히 10도 하지 않는다며 고백했지만, 계획한 것의 반을 실현시키는 삶이 어쩌면 좀 덜 불안하지 않을까. 


뭔가를 해야 한다는 꾸준한 강박은 할 일을 다 마친 하루의 끝, 잠들기 직전까지 따라온다. 이런 마음을 분석가에게 토로했다. 그는 강박을 안 좋은 쪽으로만 볼 건 아니라고 했다. 약간의 강박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했다. 저절로, 노력 없이, 그냥 되는 건 아무 의미 없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면 가치 있는 것들은 쉽게 얻어지지가 않는다. 친구, 가족관계, 연인, 갖고 싶은 집이나 이루고 싶은 꿈 모두 지리멸렬한 시간이 필요하다. 혹시 나는 모든 강박을 부정만 하진 않았을까. 사실을 불안을 이기고 노력할 자신이 없어서, 그 불안을 가지고 징징거리기 반복하며 위로받기 원했을지 모른다. 이런 나의 요즘 고민이 꿈에서는 엘리베이터로 나타났다.


고층 호텔에서 워크숍이 진행되었다. 28층을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10층 정도에서 탔다. 엘리베이터를 타자 가운데부터 바닥이 점점 사라져 갔다. 곧 떨어져 죽겠다고 생각했다. 겨우 가장자리로 피해서 살아났다.


분석가는 내 안에 원하는 걸 쉽게 얻으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닌지 물어보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김숙이 아니라고 해서 송은이처럼 사는 것도 아니다. 그저 실체 없는 강박에 휩싸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박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늘 회피하고, 그래서 덜 노력했다. 이상은 높아 언젠가 목표를 이루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꿈에서 엘리베이터 바닥이 사라진 것처럼 올라가는 과정을 제대로 밟고 서지 못해 떨어질 위기에 처한 게 아닐까.


강박에서 탈출할 수 없다면 오히려 강박을 이용해서 삶을 나아가는 방향으로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도착한 윈키아 다이어리로 촘촘하게 인생을 그렸다. 그날 밤의 강박은 열정으로 바뀌었는지 새벽 4시까지 정신이 또렷했다. 계획과 꿈을 단어로 적어나가니 정말로 실현될 것 같아서 두근거리고 실패할까봐 두려웠다.


과정 없이 결과에 오르려고 했던 날강도 같은 마음은 어디서 왔을까. 결과가 너무 거대해서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훔치기로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훔치고 나서 온전히 그 마음을 견디지도 못할 주제에. 시도하지도 못한 것은 정상에 도달하지 않으면 평온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꼭 28층까지 갈 것도 아니다. 10층까지 뛰어올라 갔다면 11층까지 걸어 가도 내 힘으로 올라간 것에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11층에서 시원한 물 한잔 마시고 다시 출발해야겠다. 이 시간에 여기까지 밖에 못 왔냐고 자책하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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