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방송 제작은 노동 강도가 세기로 유명한데, 지금까지 그 '빡센'분위기가 문제로 지적되기보다 낭만화되어 온 게 사실이다. 과로는 젊음을 불태운다는, 영혼을 바친다는, 사명을 다한다는 식으로 포장되었다. 영웅담이 방송사에 넘쳐났다. 조연출 때 며칠 동안 몇 시간밖에 못 잤다는 것으로 입씨름이 붙었다.
나도 입사했을 때 이 일이 적당히 해선 안되는 일이라고 배웠다. 죽어라 해야 남들만큼 한다고 들었다. 이 일이 낭만화될 수 있었던 것은 재미있는 일이었고 보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편집을 하다 시계를 보면 서너 시간이 지나 있었다. 시청자 반응이 좋으면 가슴이 뜨거워졌다.
과로가 일상화되니 여러 기행들이 넘쳐났다. 어느 PD는 며칠 만에 집에 돌아가 샤워를 하곤 입고 있던 옷을 다시 입고 나왔다. 수염을 자르지 않는 사람도 있었고 집에 가지 않고 숙직실에서 사는 사람도 있었다. 과로가 ‘장려’되면 과로를 인정받아야 마음이 편해진다. 다들 휴식과 퇴근을 숨기고 ‘계속 일하고 있는 상태’에 있으려 했다.
나는 조연출 시절 주로 바지를 갈아입지 않았다. 건빵바지 하나로 버티고 상의를 몇 개 갈아입으며 일을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려 했다. 늦으면 국장실 앞 소파에서 주로 잤다. 다들 하는 이런 설정의 목적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최대한 알리는 데 있다는 것을 일찍 간파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국장과 부장들이 회의하러 모이며 나의 자는 모습을 시청했다. 그리고 각 부서에 돌아가 나의 과로를 많은 이들에게 알렸다. “쟤는 왜 집에 안 가고 일만 하니?” 그건 칭찬이었고 다른 이에게는 압박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설정은 돌아서 나에게 왔다.
일하는 데 ‘전념’할수록 소속감이 강해졌고 통과의례를 거치고 있다는 점에 자부심이 생겼다. 일을 많이 하니 빨리 또 많이 배웠다. 사회 초년 인정 욕구가 충족되니 되도록 무리해서 일을 했다. 시키면 거절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런 게 참 어리석은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많은 이들이 죽음의 문턱을 경험했다. 지금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을 나 역시 몇 번 느꼈다. 지병을 얻는 사람도 생겼다. 회사가 그런 분위기를 강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스템이 강제되지 않는 공간에서 전력을 다하려는 PD에게 브레이크를 걸기는 쉽지 않다. 도제식으로 일을 배우고 평판이 중요한 사내 환경에서 후배 PD들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제작을 요구하기 쉽지 않다. 또 프리랜서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과로가 낭만화되었던 시간은 다른 누군가에는, 또 그렇게 생각한 이들에게도 사실 잔인한 시간이었다.
과로는 페미니즘 관점에서 남성중심사회를 공고히 하는 기제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문제였다. 육체적으로 ‘나약한’ 사람이 소외되었고 일할 때건, 술 마실 때건 ‘최선을 다하는’ 후배가 대접받았다. 선배들은 자기 밑에 있을 때 과로를 마다하지 않고 헌신한 후배에게 기회와 편의를 더 제공하려고 했다. 규정된 시간 안에서 일을 할 경우 생기지 않을 편향이 자리 잡게 된 거다. 남자들이 입사 후에는 더 유능하다는 인식도 착시가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소모적으로 일했을 뿐이고 솔직히 돌이켜보니 그럴수록 더 후져졌다.
일을 오래 해보니 스태프의 과로는 PD의 무능과 준비 부족에 기인함을 차츰 알게 되었다. 스태프가 과로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리더는 나태해지기 쉽다. 시간 제약이 강화될수록 PD에게 필요한 것이 막연한 근성보다는 치열한 고민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나아가 제작 시스템과 산업의 규제 환경이 노동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느꼈다. 직책이 높은 선배 중 현명한 이들은 디테일한 간섭보다는 환경 개선에 관심을 쏟았다. 비효율은 고민하지 않으면 당연하게만 보이기 마련이다.
이한빛 PD가 세상을 떠나면서 과로가 문제라는 인식이 더 자리를 잡았다. 후배에게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도 창피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방송계에도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이 가까이 왔다. 방송사도 환경에 맞는 세부적인 규칙을 합리적으로 짜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건강한 환경이 강제되면 긍정적인 효과가 많을 것 같다. 적응할수록 더 좋은 결과를 얻으리라 믿는다. 아마 다른 분야도 다른 듯 비슷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