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_자소서_최종_최종_최최최최종.pdf
자기소개서, 자소서를 쓰려고 앉아서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다 아프다. 얼마나 오랫동안 봤으면. 눈을 10초 정도 감았다가 뜨면, 시간은 지났는데 여전히 백지다. 비어있는 자소서를 바라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았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헛되이 살지 않았다고 말을 할 수 있는 자소서를 낼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친해진 사람들에게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하면, 너도 참 별일 다 겪었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와 동시에 반감이 들며 딱히 별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다 비슷하게 별일 다 겪고 살기 때문이다. 한 다리만 건너도 별에 별일이 다 있다. 친구들끼리조차 대화를 나누면 말도 안 된다, 주작(지어냄)이지? 하는 대화들이 오간다. 예능이 별건가, 인생이 시트콤이다,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참 다들 산전수전 겪고 산다. 이런 이야기를 자소서에 쓸 수 있으면, 자소서에 쓸 말이 차고 넘친다.
1.
성장과정부터 정말 할 말이 없다. 자소서를 쓰다가 짜증이 나서 진짜 자소서를 써보려한다. 우리 모두 힘든 과거사, 불행한 사연, 허브, 실 이야기는 하나씩 있으니 어느 정도 조율해서 쓰면 될 것이다. 실, 허브가 궁금하시다면, <우리가 피시방에 가는 이유> 참고.
우리는 선택하지도 않았던 이런저런 일을 겪고 실제로 이겨냈다. 면접관들은 엄하신 아버지와 어쩌고저쩌고로 시작되는 자소서가 지겹다고 한다. 면접관 입장에서도 앵무새처럼 같은 대답만을 하는 취준생들이 답답하다니까, 읽는 사람이라도 흥미있게, 쓰는 사람도 쓸 말이 있게, 나름 윈윈하는 방법이 아닐까? 내 "진짜 자소서"를 쓸테다.
성장 과정 : 살아오면서 겪은 허브와 실 이야기를 논하시오.
저는 7살 때 실을 처음으로 마주했습니다. (중략) 가족들의 도움으로 풀린 실도 있고, 열여섯 살에 만난 친구로 인해 풀린 매듭도 많습니다. 현재 새로운 실이 생기면 여전히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지만 내성이 생겨 업무에 차질은 없을 것입니다. 허브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저희 집 허브는 한 시간에 한 번씩 물을 주어야 하고, 일주일에 3~4번 정도 함께 밖을 나가야 합니다. 평일 낮에는 동생이 맡고 있고 평일 밤과 주말에만 제가 담당이기에 이 또한 업무에도 차질은 없을 것입니다.
2.
취업을 내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서 겨우겨우, 계약직으로 취업이 됐다. 어떠한 자격증도 일할 때 쓰이진 않는다. 뭐, 여기까진 괜찮다. 어차피 우리는 수능 때 공부한 학문들이 대학에서 1도 안 쓰이는 것을 겪었으니까. 이정도야 속은 기분도 들지 않는다. 처음에는 어디든 내가 붙은게 좋았다. 너무 긴 무직생활은, 사람을 웅크리게 했다.
고작 3년째지만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일을 해봤더니 결국 사람이 제일 힘들다. 이럴거면 사람 자격증이나 따라고 하지. 이런 사람은 이렇게 대해야 되고, 이런 사람에게는 저런 얘기 까진 가능하지만 그런 얘기까지 하면 큰일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에 따라 대해야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자격증이 있었으면 좋겠다. 너는 일이 터지면 고래들 사이에서 등이 터지다 못해 세 번 정도 꿰매야 하는 타입이니 이런 유형은 피하라고 말해주는 자격증이 필요하다. 나는 어떠한 레벨의 사람까지만 버틸 수 있으니, 나의 게이지를 초과하는 레벨을 가진 사람이랑은 협업할 수 없다고 증명이라도 받고 싶다. 그런 자격증이 있다면 이 취업난에 왜 일을 못 구하는지, 왜 그만두는지 쉽게 이해해주겠지.
성격의 장단점 문항이 제일 웃기다. 이 문항은 쓰고 있으면 여기저기서 활용이 된다. 어느 회사에는 장점으로 적히고, 어느 회사에선 단점으로 쓰인다. 단점을 적어내는 것도 스트레스다. 단점을 적을 때는 단점이지만 단점으로 보이지 않게 써야 합격한다고 한다. 뭔, 내거인듯 내거아닌 내것같은 너 같은 느낌이다.
요새 우리 세대가 면접관인 면접들에서는 MBTI를 물어보는 곳도 많다고 한다. 처음에는 듣고 당황스러웠다. 세상이 참 빠르게 변하네. 그러나 적응의 세대 답게 또 금방 납득이 됐다. 그래. 뭐, 자소서에 혈액형이나 생년월일을 적어야 하는 곳보단 차라리 나은 것 같다. 수혈을 해 줄 것도 아니고, 사주를 봐 줄 것도 아니면서. 차라리 뽑을 때 성격이 본인과 맞는 사람을 뽑는 게 본인들한테도 낫지 않겠나 싶다. 애초에 성격이 맞는 사람을 뽑으면 친해지기도 쉽고, 서로 없는 말 지어내지 않아도 되고. 지원자 입장에서도 불합격해도 이해는 될 것 같다. 아, 이 회사 사람들은 나랑 성격이 안 맞을 뿐이겠구나. 그래 뭐, 납득. 끝.
성격의 장단점 : 사람을 겪으며 제일 힘들었던 일을 서술하시오. (온라인 포함)
오프라인 : 2n 살 때 겪었던 일입니다. (중략)이 사람들로 인해, 인내심을 배웠고 내가 이렇게나 오래 참을 수 있는 사람임을 처음 알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뒤통수를 칠 수 있기에 아무도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고, 그 와중에 곁에 있어 주는 사람들로 치유를 받았기에 지금 곁에 있어 주는 사람들에게만 잘하면 되겠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이전 직장에서는 기가 빨리고 빨려 집에 가면 녹초가 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경험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집에 일을 가져가지 않는 방법들을 터득했고, 그로 인해 제시간에 업무를 끝내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온라인 : 전원 버튼만 누르면 종료되는 온라인 세상에서 친분을 이어나가고, 제가 사는 지역으로 놀러 온 15명 정도 되는 사람들과 함께 숙소를 잡고 논 경험이 있습니다. 만나면 뭘 할지 고민하다가 상금을 걸고 예능프로그램에 나오는 게임들을 했습니다. 게임 아이템과 게임머니를 상금으로 걸어 적극적으로 사람들이 참여하게 했고,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대학 MT처럼 놀아 재밌었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친화력이 강하고 기획력까지 있는 사람입니다.
3.
다들 뭔가에 몰두해 본 경험이 있다. 그런데 다 자소서엔 쓸 수 없는 것들이다. 자기를 소개 하는 것인데, 일이랑 연관 없어서 쓸 수 없단다. 막상 거창하게 쓰고 취업해보니, 뭐하러 그렇게 자소서를 쓰는데 수정하고, 수정했나 싶다. 내가 게임에 미쳤었다는 내용을 적어놨어도 읽어보지도 않았을 것 같다. 프로레슬링에, 아이돌에, 책에, 영화에, 다들 뭔가 몰두한 경험이 있고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삶에 가치를 바꿔준 경험들을했는데. 그 분야에서 큰 역할들을 한 사람들이 있는데 성취로 쳐주지도 않는다. 각박하다.
생활신조 및 인생관 : 무언가 몰입해 본 경험, ‘덕후’라고 불릴 정도로 어딘가에 몰두한 경험을 서술해보시오.
저는 취업이 안되는 기간 동안 피시방에서 게임을 오랫동안 한 경험이 있습니다. 피시방은 다른 공간에 비해 이동에너지가 적으며 끼니를 해결함과 동시에 게임, 자소서 작성, 영화시청, 등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피시방에서의 경험은 저를 멀티형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근검절약 정신으로 생활하며 버티는 습관을 배웠고, RPG 게임을 통해 아이템의 가격의 시세 또한 밤낮으로 매일 점검하며 차액으로 게임머니를 벌기도 했고, 이로 인해 시세 변동과 시장조사의 중요성을 익혔습니다.
또한, 저는 석 달의 기간 동안 메X플스토리 캐릭터를 번갈아 가며 13개를 키웠고 네 개의 캐릭터의 레벨을 200 이상 달성한 경험이 있습니다. 집에서 허브를 봐야 할 때는 컴퓨터를 할 수 없었기에 모바일 게임으로 두 달 만에 X토체스 플래티넘을 찍은 경험도 있습니다. 리X오브레전드라는 게임에서는 하나의 캐릭터만을 꾸준히 하여 숙련도 150만 점을 달성해 타 유저들에게 뭘 해도 될 새X…. 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위와 같은 성과들로 저는 여러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멀티형 인간이자 한 가지에 꽂히면 습관처럼 해나가는 근성조차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경력과 성공을 지어내야 한다. 대학을 나오지 않았으면 전공에 대해 쓸 것도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학을 나와도 전공에 대해 쓸 것이 없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우리들이 성공한 경험이 있다면 얼마나 있겠는가? 성공에 대한 기준은 또 뭐 이리 박한지. 차라리 탈락한 경험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내 인생에 있어 떨어진 시험들 응시목록을 쓰시오, 라는 항목이 있으면 다들 쓸 말은 많을 것이다. 경력란의 빈칸들은 한 줄이라도 억지로 써 넣어야 하는데, 탈락한 경험들은 너무 많아서 대표적인 것 한 두 개만 넣어도 칸이 모자랄 지경이다. 수험생기간, 재수, 삼수, N수 기간, 공무원 시험 준비 기간, 공기업 시험 준비 기간, 토익시험, 면허시험, 컴퓨터활용, 졸업시험, 졸업 작품기간, 떨어지든 합격하든 우리는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도 인정 받을 수 없는 노력들과 시간이다. 남들 다 하는 걸 했을 뿐이라는 말로 쉽게 잊혀진다.
전공 및 경력 사항 : 무엇인가에 실패한 경험을 서술하시오.
저는 남들이 다 하나씩은 있는 ‘좋아하는 것’조차 없어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남들이 하는 대로 각종 자격증을 공부하고 시험을 쳤습니다. 남들이 쉽다는 운전면허는 너무 긴장을 많이 해 두 번 정도 떨어졌지만, 결국엔 붙었고, 어쨌든 저는 면허, 토익, 컴퓨터 활용능력 등의 시험을 친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차는 없고, 토익은 기간이 만료되어 다시 가서 쳐야 하고, 컴활은 실제로 실무에 써본 적이 아직 없습니다. 액세스는 구경도 못 해봤고 엑셀은 매일 같은 수식만 사용합니다. 제가 선택한 모든 것들은 실제로 쓰이지 않으니 제가 쳤던 시험들은 모두 실패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열심히 살아내고 있습니다. 실패했음에도 좌절하지 않고 살아내는 저는 귀사에 적합한 인재입니다.
5.
무한도전, 선택 2014편에서 후보자들의 검증시간 장면이 생각난다. 무한도전 멤버들이 차세대 리더가 되기 위해 선거를 하는 편이었는데, 자신의 학력, 경력, 활동 사항을 쓰고 검증하는 시간이었다. 정준하는 노량진 다수의 단과학원 수료, 사생대회 입선, 장기자랑 대상, 곰취나물 홍보대사 등을 기입해서 멤버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하하는 집중력대회 입상, 독일 신문에 4.9kg 동양아이거인 기재, 웅변대회, 환타 요요대회 입상, 개근상, 무도 작은 키 큰마음 연합, 수많은 홍보대사 활동에 대해 적었다. 유재석은 수상경력이 2003년부터 한해도 빠짐없이 있었기에 종이가 모자라 개별적으로 멤버들에게 나눠줬다.
다들 어렸을 때 부터, 자의든 타의든 이렇게나 한 게 많은데 자소서만 쓰면 작아진다. 부모가 해준, 학교가 시킨, 얼떨결에 하게 된, 내가 선택한, 어쨌든 많은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게 된다. 요요대회 입상이, 동양아이거인 기재, 곰취나물 홍보대사는 살면서 몇 번이나 해보는 경험이겠는가. 그런데도 나를 소개 하는 란에는 쓸 수 없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문항은 지원 동기 및 포부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넣을 문항이 없어서 넣은 것 같다. 왜 우리 회사에 지원을 하냐니. 돈 벌려고. 날 불러주는데가 없으니까 지원하지. 나는 이 회사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무슨 지원 동기가 있겠는가. 면접을 보러 갔을 때 5년 뒤에 내가 이 회사에서 뭘 하고 있을 지 물어 본 사람들도 있었다. 당장 내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5년 뒤를 어떻게 아냐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래도 최대한 절실한 척 했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을거고, 뭘 할거고. 열심히 이야기하고 떨어졌다.
지원동기 및 포부 : 얼마나 절실한지 한 번 써보시오.
일한 지 3년이 지났는데 계약직의 꼬리표는 벗어나질 않습니다. 경력이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우리 세대는 취업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기에 대부분이 계약직입니다. 모르는 분들은 우리가 실업급여를 받으려고 일부러 계약직을 하는 꼼수를 쓴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저희도 실업급여 안 받고 그냥 계속 일하고 싶습니다. 설날이 다가오고 연말이 다가오면 친척들이 무슨 일 하는지를 물어보는 것이 두려웠는데, 이제 명절이 돼도 친척들이 물어보지도 않으십니다. 모두가 힘든 걸 알기에, 오히려 침묵을 해 주시고 그로 인해 알 수 없는 죄책감마저 듭니다. 저는 전 직장에서 친아빠한테도 안 해본 상사의 신발 꺼내주기, 커피 타주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이정도는 돈만 주신다면야 할 수는 있습니다. 일하고 있는데도 내년에 먹고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는 저는 지금도 계약직입니다. 귀사에 입사하게 된다면, 귀사에 계약이 만료하는 날까지 저는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책임감 없이 잠수 탈 일도 없습니다. 제가 이정도로 절실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자소서에 쓰지 못한다. 못 쓰는 이유는 나에 대한 편견이 생기고, 약점이 되니까 못 쓰는 것이다. 내 사생활만 알려주고 불합격되어도 문제고, 합격되면 주홍글씨가 찍힌 채로 일을 해야겠지. 구설수에 오르겠지. 그런 생각들 때문에 적을 수 없다. 내 진짜 자소서에는 쓸 말이 이렇게나 많은데, 결국 숨기고, 숨기고 다 숨겨야 살아 갈 수 있다.
직접 작성을 다하고 보니 뿌듯하고, 현실자각시간이 온다. 마치 예술을 하는 사람이 "도대체 왜 세상은 내 작품의 가치를 몰라주지?" 하고 한탄하는 것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도, 일말의 가능성으로 그 예술가의 작품이 어마어마한 값어치가 있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염세적이라 생각할지 몰라도 자소설을 쓰고 있으면 다 이렇게 된다. 나중에라도 내가 헛되이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려면, 가끔은 이런 뻘짓으로 창조되는 고퀄리티의 자기위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아. 뻘짓으로 창조되는 이 "진짜 자소서"가 필요한 날이 오길 바라며, 이제 자소서를 쓰러 가야겠다. 계약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올해가 끝나가니 또 내년 밥벌이 걱정을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