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과 작업
정서경, 서유미, 홍한별, 임소연, 장하원, 전유진, 박재연, 엄지혜, 이설아, 김희진, 서수연
일하는 엄마의 이야기는 많이 읽었고,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나, 라고 나이브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모두 힘들게 육아와 커리어를 병행하지만 육아는 행복이고 커리어를 지킬 수 있어서 성취감도 넘친다는 뭐 그런 얘기들. 일과 가정을 모두 지켜내는 슈퍼맘들의 이야기.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감흥이 크게 없었다. 어차피 자기 일 열심히 잘 챙겨 가면서 육아도 잘 해내는 엄마의 이야기일 뿐이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돌봄과 작업>은 단순히 그런 개인의 경험의 나열이 아닌 사회를 관통하는 거대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책이었다. 바로 '돌봄'의 중요성과 개인으로서의 자아를 잃지 앟는 것이었다.
<공정 이후의 세계>와 함께 읽었기 때문인지 이 문장이 퍽 마음에 와 닿았다. 능력주의의 또다른 모습이자 허상과 같은 '공정성'에 집착하는 사회 속에서 어떻게 이를 극복하고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던 나에게는 속 시원한 해답처럼 느껴졌다.
책에서 주로 언급된 돌봄은 주로 각자의 가정을 향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가정을 돌보는 일을 하며, 아이를 양육하며 각자가 느꼈던 것들을, 서로의 일, 커리어, 작업 속으로 돌아가 사회로 돌봄을 환원하려는 움직임이 분명 있었으니까.
읽으면서 즐거웠던 지점은, 문과적 글쓰기와 이과적 글쓰기의 차이를 아주 또렷하게 볼 수 있다는 것에도 있었다. 다양한 필드에서 활동하는 필진들이기에 글쓰기 스타일이 서로 너무 달랐다. 문과적 글쓰기는 감성을 촉촉하게 적시는 아름다운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이과적 글쓰기는 분석적이고 사실적이며 명료한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문과적 글이 좀 더 취향이지만 이과적 글은 그 나름의 매력이 또 있어서 읽는 맛이 있었다.
P. 110. 아이를 돌보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쌓이고 아이라는 낯선 존재를 어떻게 돌봐야 할지 함께 고민하는 사람이 늘어날 때, 양육의 무게는 조금 가벼워지고 돌봄의 분배는 조금 더 정의로워질 것이다.
정말 당연한 말이었지만, 사람들은 자주 잊고 사는 것 같다. 더 많은 담론이 형성될수록 더 나은 방향성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앞서 '일하는 엄마 이야기는 지겹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지겹다고 여겨져도 누군가는 계속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그리고 꾸준히 사람들에게 양육의 중요성을 주지시켜야 한다.
한국에서는 연일 노키즈존 문제가 이슈다. 어린이를 환영하지 않는 환경을 조성해놓고 '아이를 낳지 않아 문제'라며 여성들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에 화내는 것도 지칠 정도다. 그럴 때일수록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한다. 개인에게 지워진 양육의 짐을 사회가 나눠들어줄 준비가 되어야 비로소 그 사회는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P. 158. 오로지 내 입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닌, 타인을 위해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는 사람은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다를 수밖에 없다. 염려와 책임 속에 살아가는만큼 성숙할 기회는 배가 됐다.
양육 뿐만이 아니라 타인을 돌보는 것 자체에는 그만한 힘이 있다. 나 혼자를 먹여살리는 것도 충분히 대단하고 훌륭한 일이지만, 가족 혹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들어있는 타인, 또는 가족이 아닌 타인을 돌보는 것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분명 있다. 그러니 돌봄의 가치를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알아주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리디북스에서 대여 이벤트를 하길래 호로록 빌려서 반나절만에 읽을 정도로 흡인력이 있던 책이었다. 신기한 일이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도 빨리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도 양육, 돌봄, 커리어 다 챙길 수 있어, 하는 이상한 자신감이 샘솟았달까. 같은 책을 읽은 다른 친구는 반대로 자기는 아이 낳아 기를 엄두가 더 안 나게 됐다고 혀를 내두르었지만. 역시 같은 책이어도 사람마다 감상이 다르다는 것도 재미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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