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엔드는 선하지 않다
사진을 좋아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진을 찍기 위해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그 번거로운 물리적 의식들을 좋아한다.
외출 전, 좋아하는 향수를 가볍게 뿌리고 가방 한구석에 렌즈를 마운트한 캐논 R50V를 조심스레 챙겨 넣는다.
"왜 굳이 그 무거운 걸 들고 다녀요?"
어깨를 짓누르는 카메라 스트랩을 볼 때면 사람들이 으레 던지는 질문이다. 그들의 시선에서 카메라는 ‘미련한’ 물건이다. 쇳덩이와 유리알을 뭉쳐 놓은 이 기계는 태생부터 무겁고, 가방 한구석을 뻔뻔하게 차지하며, 보폭을 둔탁하게 만든다. '착한 가격'이나 '편의성' 같은 현대의 얄팍한 미덕과는 철저히 동떨어져 있다. 그것은 절대로 친절하지 않다.
반면 스마트폰 카메라는 친절하다. 가볍고, 편리하고, 주머니에 들어갈 만큼 작다! 사진을 찍으면 알아서 색감이나 초점도 맞춰준다. 하지만 나에겐 그 값싼 친절이 달갑지 않다. 모든 것을 떠먹여 주는 편리함에 길들여지는 순간, 뾰족했던 나의 감각은 무뎌지게 되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카메라를 목에 건다. 비록 그것이 무겁고 불편하고 번거로울지라도, 결국엔 그 모든 단점을 감수하기로 결심한다.
렌즈의 오만함, 시선을 통제하는 권력
스마트폰 카메라는 철저히 대중적이고 민주적이다. 누구에게나 평균적인 결과물을 '봉사'하듯 내어준다. 반면, 카메라는 지독히 오만하다.
특히 화각이 고정된 단렌즈의 불친절함은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손가락 하나로 줌을 당겨 프레임을 구겨 넣는 얄팍한 속임수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원하는 구도를 얻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뒷걸음질 치고, 피사체 코앞까지 다가가야 하며, 때로는 무릎까지 꿇어야 한다. 어느새 나는 기계의 엄격한 물리적 법칙에 복종하는 노예이며, 카메라는 그러한 법칙을 종용하는 주인이 된다.
근데 어이없게도 이 고단한 노동 속에서 비로소 '사유'가 탄생한다. 빛의 각도를 베어 물고 피사체의 미세한 균열을 치밀하게 계산하는 찰나의 침묵, 셔터를 누를 타이밍 등, 그것은 나를 사유하게 만든다.
사유는 곧 치열한 선택으로 이어진다. 뷰파인더 너머의 세계를 그저 주어지는 대로 수용하는 대신, 나는 렌즈의 조리개를 조절해 무엇을 선명하게 살려두고 무엇을 흐릿한 배경으로 지워버릴지 결정한다. 오토포커스가 무작위로 잡아채는 피사체에 만족하는 대신, 손끝으로 링을 돌려 오직 내 시선이 닿는 곳에만 정확히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마치 매일 밤 빈 노트 위에 펜을 꾹꾹 눌러가며 나만의 문장을 정교하게 고르고 다듬는 일처럼, 지극히 의도적이고 주관적인 개입이다. 기계의 알고리즘이 풍경을 적당히 해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빛의 양과 셔터의 속도를 기어코 내 의지대로 조율해 내는 이 고집스러운 과정.
그 불친절함은 나를 세상의 방관자에서, 세상을 내 방식대로 재단하고 통제하는 지배자의 위치로 끌어올린다. 철저한 통제와 물리적 발품으로 빚어낸 한 장의 사진은, 나의 뾰족한 주관을 증명하는 날 선 기록이 된다. 스마트폰 카메라가 적당히 버무려준 수백 장의 사진들은 덧없이 휘발되는데 반해, 진짜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나의 머리와 가슴 안에 깊숙한 잔상으로 남는다.
촌스러움을 거부하는 잔혹한 미학
스마트폰의 사진이 소프트웨어의 복잡한 연산으로 빚어낸 매끈하고 평면적인 가상의 이미지라면, 카메라가 담아내는 결과물은 빛과 그림자가 유리를 통과해 센서에 직접 새겨지는 물리적이고 원초적인 흔적이다.
하이엔드 미학은 잔혹하리만치 솔직하다. 거대한 물리적 센서와 정교한 광학 렌즈는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타협 없이 도려내어 센서에 박아 넣는다. 어두운 곳에서 간신히 끌어올린 빛의 묵직한 입자감, 피사체의 서늘한 표정, 그리고 얕은 심도 사이로 무너져 내리는 배경의 질감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관조하게 만든다.
본질이 가진 우아함과 그늘을 가장 세련된 형태로 끄집어내는 것. 피사체를 향한 이 지독한 집착과 예의는, 카메라가 제공하는 잔혹한 사실주의를 통해서만 완성된다.
취향이 불편함을 소유하는 방식
스마트폰 하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시대에 카메라를 고집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어깨를 짓누르는 묵직한 감각은 오히려 나를 현재의 시공간에 흔들림 없이 단단하게 붙들어 맨다.
무거운 카메라를 감당하는 이 모든 수고로움은 결국 '취향'이라는 본질로 귀결된다. 취향은 단순히 무엇을 좋아하는가에 대한 가벼운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뚜렷한 가치를 위해 기꺼이 대가와 불편을 지불할 수 있느냐를 묻는, 삶을 대하는 묵직한 윤리다.
본래 귀하고 수준 높은 것들은 다루기 까다롭고 손이 많이 간다. 가벼운 플라스틱 렌즈와 편의주의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나만의 확고한 미감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쇳덩이의 무게를 감수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쉽게 얻어낸 것들에는 결코 나만의 고유한 냄새가 배어들지 않는다.“
취향은 선택이 아니다. 취향은 결국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잔혹한 질문이다. 가벼움을 택한 사람들은 결국 가벼운 세계에 머무르고, 무게를 견딘 사람들만이 비로소 세계의 결을 만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기꺼이 이 불편한 쇳덩이를 짊어진다. 그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나를 평범한 세계로부터 분리해내는 가장 확실한 장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