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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사원 Jun 14. 2017

[김 사원 #16] 헤겔을 읽는 아이

신경숙 <외딴방>을 읽고 ②

 <외딴방>, 신경숙, 문학동네


김 사원에게도 미서의 헤겔 같은 것이 있었다. 전공을 살려 들어갔던 드라마 편집실을 도망치듯 그만두고 (역시 전공을 살려) 동영상 강의 제작 업체를 다녔을 때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돈이 필요했다. 잠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생각하며 다녔는데 기간이 한 달, 두 달 점점 길어졌다. 지금 회사에서 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바꿀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계속 이렇게 살게 되는 걸까?' 답답하고 막막한 마음에 매일 아침 출근하는 발걸음이 늪에 빠진 듯 무거웠다. 


김 사원도 그들이 싫었다. 자신이 대학교 1학년 때 이미 다 익힌 기술들을 신기해하며 자랑스러워하던 한 살 차이 고졸 직원이, 무기력하게 이상만 좇는 듯한 동갑내기 직원이, 서른몇 살이 되도록 이런 업체를 전전하는 직원이 싫었다. 강사 일정에 따라 들쭉날쭉한 근무 시간도, 격주 토요일 오전 근무도, 형편없는 월급도 싫었다. 고정된 내 자리가 없고, 명함이 없는 것도 싫었다. 


그들과 다르고 싶었다. 영어회화 새벽반을 끊어 출근 전에 학원에 들렀고, 퇴근하고는 다시 학원 자습실에 가서 그 날 배운 내용을 복습했다. 학원 강사는 전날 배운 대화를 줄줄 암기하는 김 사원을 보며 놀랐고 김 사원은 보람을 느꼈다. 회식으로 새벽 3시에 퇴근한 날에도 어김없이 학원 수업을 듣고 정시에 출근했다. 회사 임원이 우연히 이 얘기를 듣고 김 사원을 추켜세우자 피로함마저 뿌듯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해야 동료들과 자신이 달라 보일 것 같았다. 그들과 같았으나 같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영어학원도 쓸데없는 성실함도 뚜렷한 목적은 없었다. 무엇이라도 하면 지금보다는 다른 무엇인가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11개월을 다녔을 때 대학 선배를 따라 회사를 옮겼다(맙소사, 퇴직금을 아까워하지 않았다니!) 다녀보니 면접 때 사장이 했던 번지르르한 말과는 달랐다. 그곳에서 3개월, 그다음 회사는 1주일, 그다음 회사는 7개월을 다녔다. 김 사원이 '경력 방황의 시기'라 부르는, 그들과 같아 보이고 싶지 않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어느 회사 기획팀에서 3년쯤 다니자 더 이상 이력서에 경력 방황의 시기를 이리저리 숨기고 포장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전보다 조금 더 나은 조건으로 회사를 옮기고서야 아주 천천히 한 발짝씩 그들에게서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여전히 주변에 있었다. 나이 많은 신입 사원으로, 대기업에서 쫓겨 나온 가장으로, 콜센터나 다름없다고 무시받는 팀으로.


김 사원은 그들에게서 멀어졌다는 안도와 그들과 다른 처지에 있다는 우월과 자칫하면 다시 그들과 같아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낀다. 자부, 자책, 후회, 수치.... 이 모든 게 뒤섞여 버린다. 


김 사원, 신경숙의 <외딴방>을 읽는다.

감히 그 시절 미서에게서 자신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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