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노라마, 그리고 위버멘쉬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내가 배운 것은

‘이찬혁은 미친놈이다‘


최근 그의 ‘파노라마’를 듣고 든 생각이다. 저 어린 나이에 어떻게 이런 그림을 노래로 그릴 수 있는지 머리를 뜯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우연히 알고리즘에 걸린 이 노래를 듣고 머리가 멍해졌다.


나는 요즘 망망대해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목적지가 있었는데 그 목적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다양한 선택지가 있겠지만 나름의 타협을 했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어디있는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있는 나이가 되면 누구나 다 그렇게 살게 된다. 적당한 타협지를 찾아서 의미를 부여하고 목적지로 삼아 나아간다. 그게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목적지가 내가 갈 수 있는, 가야하는 목적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 순간 나는 길을 잃고 정처없이 부유하고 있었다.


왜 살아야 하는가. 이런 고민을 이전에도 안한 것은 아니지만 이번은 많이 달랐다. 이전과는 다른 심각한 무기력함이 몰려왔다. 나를 만들었다고 믿는 신에게 직접 가서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 나를 왜 만들었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 이 노래를 듣게 된 것이다.


이 노래 가사를 잘 들어보면, 노래의 화자는 준비된 죽음을 맞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노래의 화자는 2명인데 모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되었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 이대로 죽을 수 없는 죽음.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데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 앞에 놓인 화자의 심정이 고스란히, 무겁지 않게, 심지어 신나게 귀와 마음에 꽂이는게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며칠 동안 후렴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다. 친척 누나가 세상을 떠나버렸다.

누나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암으로 투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몸 상태는 너무 좋다고 했다. 올 초 내가 만난 누나는 항암치료때문에 머리가 짧아졌을 뿐이었다. 얼굴과 목소리도 좋았고, 삶에 대한 의지도 강했다.


암 치료도 많이 발전되었다. 약도 많고, 좋은 치료 기계도 많아졌다. 그러나 암은 전이가 되는 순간 괴기한 민낯을 드러내며 사람을 무섭게 말라 죽이려 달려든다. 원래 있던 곳의 암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는데, 간과 폐에 전이된 암이 치료를 해도 자꾸 생겨나고 누나를 지치게 했다. 수차례의 치료 끝에 누나는 치료를 포기했고, 호스피스로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생을 마감했다.


누나는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았다. 아직 어린 아이들을 두고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심지어 두 부모님인 고모와 고모부는 모두 살아계셨다. 장례식장 로비에 떠 있는 망자들의 리스트 중 누나는 가장 젊었다. 황망하다는 말이 어떤 말인지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누나는 나와 마지막 통화에서 암만 아니면 몸상태가 너무 좋아서 뭐라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이야기하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선택하지 않은, 이렇게 갑작스럽게 맞이한 죽음 앞에서 누나는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장례식장에서 내 귀에는 ‘파노라마‘가 계속 울렸다.


내가 좋아하면서도 가장 꼰대라고 생각하는 철학가 니체는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즉, 죽음이 외부의 불가항력적 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주체적 결단으로서 자발적으로 선택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나의 죽음을 추천한다, 자발적인 죽음, 나에게 오는 그 죽음, 내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니체는 궁극적인 인간상으로 위버멘쉬(초인)을 주장했다. 그것은 외부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고통과 한계, 현실을 긍정하며 스스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을 뜻한다. 위버멘쉬는 죽음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즉 죽음도 초월한 존재이다.


우리 집안에는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가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의 이야기이다. 할아버지의 임종을 유일하게 지킨 우리 어머니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본인이 가야 할 때를 결심하시고서는 곡기를 끊으셨다고 한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으로 치면 수액을 한번만 맞으셨어도 충분히 오래 사실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당시는 40년전이고, 시골 촌동네에 수액이라는 개념이 어디 있었겠나. 할아버지는 본인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셨다. 그리고 당당히 죽음을 맞이하셨다. 아마 수액이라는 것을 아셨어도 할아버지는 죽음을 택하셨을 것 같다.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 과거에는 고통스러운 방법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제는 고통스럽지 않게 스스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스위스는 80년 전부터 조력 사망을 허용해왔다고 한다. 치료가 불가능하거나 고통이 참을 수 없거나하는 등 죽음이 가까워져 올 경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 방식은 환자가 스스로 약을 투약하는 것이라고 한다. 비용도 약 1천만원으로 고통없이 죽음을 선택하는 댓가 치고는 저렴한 비용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버튼을 누르면 질소가 나와 1분안에 고통없이 죽음을 맞이할 있는 캡슐도 나왔다고 한다. 마음만 먹으면 고통스럽지 않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황망한 죽음 앞에 다시 한번 삶과 죽음을 생각해본다. 죽음 앞에서 모든 고민은 사치일 뿐이다. 평화로웠던 일상은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어떤 뮤지션의 노래 제목처럼 사람의 평화는 너무나 나약하다. 오늘, 아니 지금 당장, 잠을 자다가 길을 걷다가 죽음이 불현듯 찾아올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인생을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아닐까. 어차피 바꿀 수 없는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인생을 대하는 나의 태도뿐이다. 오늘 내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을 영화처럼, 축제처럼 받아들이고 사는 것, 그것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 태도만이 나로 하여금 나약한 평화가 갑자기 무너지고 죽음이 내 앞에 찾아올 때 당당히 버튼을 누르는 위버멘쉬가 되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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