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스페셜제너럴리스트 Aug 27. 2021
어서와, 승진 과정은 처음이지?
인생에서 승진이라는 관문을 처음 경험해봤다. 내가 승진이라는 것에 이렇게 몰입하게 될지 몰랐다. 동기들끼리도 가끔 대화를 나누며 '너 먼저 승진해라. 난 괄시하지 말고'라고 웃으며 농담을 할 정도로 사실 승진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나도 시기가 되니 여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건강까지 나빠졌다.
사실 이미 승진 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한번에 붙고 싶었다. 이걸 다시 준비하는 것은 엄청난 고역이라는 것을 익히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 재수 준비하는 수준으로(고3때는 열심히 안했으니까) 준비했다. 1차 시험을 거의 2달을 넘게 준비했고, 1차 시험 이후 2차 면접, 최종 발표까지는 2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으니 약 4개월간 승진 프로세스를 거쳐온 셈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공부를 하는 내 생활 패턴이 다 무너져 내린 기간이었다. 삶의 루틴 마저 다 제껴놓고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준비했지만.
승진을 준비하면서 가장 괴로웠던 것
승진을 준비하면서 제일 괴로웠던 것은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취직도, 승진도 사실 모두가 나를 얼마나 잘 증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경쟁이다. SNS가 나와 잘 맞지 않는 이유는 나는 나를 별로 나를 포장하는거에 능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나를 증명하고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나를 포장 해야 하고 작은 것도 크게 보이게 만들어야 하고 항상 남보기에 괜찮은 모양새를 보여야 한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내 스스로의 자존심을 위해, 나를 지키기 위해 일을 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 내 스스로 존재가치를 찾기 위해 일을 한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내 스스로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더 동기부여가 된다. 그렇게 살다보면 걸어온 길이 알아서 나를 증명해줄 거라 생각했다. 궂이 내가 뭘 했다고 자랑할 필요 없이.
승진 과정은 내가 가지고 있던 이런 신념도 잠시 접게 만들었다. 세상 오만가지가 다 신경이 쓰였고 특히 면접을 준비하면서 최대한 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스스로를 쥐어짜내야 했다.
그렇게 승진 과정은 나에게 괴로움만 남겨줬고 나는 승진에서 누락되었다.
승진이 뭐라고
불합격이란 글자를 본 순간, 멍했지만 괜찮았다.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으니까. 항상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럴 때 도움이 된다. 최상의 상황이 벌어지면 갑절로 좋은 것이고, 최악의 상황이 벌어져도 크게 동요하지 않게 되니까. 분노의 5단계가 부정-분노-타협-우울증-수용의 단계로 되어 있다는데 꼭 저게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이건 죽음과 관련된 이론이라서 그런가?) 오히려 나는 역으로 일단 수용을 해버린 것 같다. 퇴근하는 길에 우울이 찾아왔고, 집에 와서 내 불합격 사실에 분노하고 부정했던 것 같다. 지금은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되었으니 이렇게 글로 정리를 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왜 승진을 하고 싶었을까. 당연한 소리지만 승진과 연봉이 직장인에게 가장 최고의 보상이기 때문이다. 노력한 만큼 인정받고 댓가를 받기 위해 우리는 살아가고, 일을 한다. 직장인으로서는 승진이 가장 최고의 댓가일 것이다. 거기에 지기 싫은 나의 승부욕도 있었을 것이다. 다시는 쳐다보기도 싫은 승진시험 공부 때문도 있었을 것이고, 후배들에게 더 좋은 선배가 되기 위해서는 나 자신도 어느 정도는 승진을 해야 된다는 사명감도 있었다. 직장인으로서의 욕망과 소명이 뒤섞인 그 무언가의 이유로 나는 승진이 하고 싶었다.
결정적으로는 나이가 들어서 내가 이 직장을 계속 다녔을 때 내 스스로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내가 초라해지지 않으려면 난 승진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말로만 듣던 만년 대리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승진을 준비하면서 마음 한켠에서 나를 괴롭혔다.
최반석은 실존하지 않지만 직장인으로서 나의 롤모델이 되었다.
반석이 전해주는 위로
승진에서 누락된 후 마음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준 드라마가 '미치지 않고서야'였다. 이 드라마에서는 동기인 세 사람의 직위와 처지가 비교된다. 보직이 없는 최반석, 구매팀 팀장인 팽수곤, 얼떨결에 센터장이 된 공정필. 승진 과정을 겪으며 나의 20년 뒤는 저 셋 중에 어떤 상황을 맞고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어쨌든 직장 생활을 계속 하게 되면 나도 저 셋 중 누군가의 결말에 가까워 질 것이다. 직장의 승진 구조가 피라미드라고 보았을 때 확률적으로는 최반석의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처한 상황이 그럴 것이다.
나는 최반석처럼 나이 어린 팀장에게 수모를 겪어도 당당할 수 있을까. 만약 엉뚱한 부서로 좌천이 된다고 해도 적응할 수 있을까. 보직을 달고 잘 나가는 동기를 보고도 처지를 비관하거나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심지어 센터장인 동기 옆 탕비실에 앉아 차 셔틀이 되는 나락으로 떨어져도 버텨낼 수 있을까. 저렇게 최반석처럼 굳세게 20년이 넘는 세월을 직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드라마를 보며 내가 내린 결론은 승진에, 보직에 너무 의지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공정필도 사장에게 쪼인트를 까이고, 팽수곤도 후배 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퇴사 압박에 시달린다. 어쨌든 각자의 고충과 어려움은 있는 것이다. 그래도 최반석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그것을 해결하는 능력이 동기들 중 가장 뛰어났고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며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갔다. 껍데기에 의지하지 않고 내 자신을 믿고 자립할 수 있는 힘을 키운 사람이 결국 조금 더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을 그를 통해 배웠다.
승진은 못했지만, 실패에서 인생을 배우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다짐하게 되었다. 앞으로 다시 기회가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지나친 감상과 자기 연민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내 처지를 생각할 시간에 내 스스로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한 길을 걸을 것이다. 견고하고 든든한 반석같은 내가 되기 위해 살아갈 것이다.
일단 무너진 내 루틴부터 다시 회복을 하면서 나를 다독여야 할 것 같다.
스스로를 위로하며 20년이 넘는 시간을 버텨온 최반석처럼.
PS : 어제 마지막회를 봤는데 결국 최반석이 동기 중 제일 잘 나간다. 드라마이지만 인생 모를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