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37) <원석연>(열화당, 2013)
‘연필주의’라는 표현이 허락된다면 원석연(元錫淵, 1922~2003)이라는 화가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표현이 달리 있을까. 과거 KBS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 <달인>의 주인공은 고작 16년을 바치고도 버젓이 달인 행세를 했더랬다. 하물며 원석연은 60여 년 동안 오로지 연필로만 그림을 그리다 갔으니 그 말의 뜻에 부합하는 진짜 달인(達人)이요 대가(大家)라 할 것이다.
필요한 도판을 얻을 목적으로 2013년 열화당이 펴낸 원석연의 작품집을 손에 넣었다.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정식으로 미술을 배우고 돌아온 원석연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미술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석연은 처음부터 그런 데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월급 받는 직장이라곤 미 공보원 미술과 근무 이력이 전부고, 공모전에 작품을 낸 것도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원석연이 평생에 걸쳐 꾸준히 한 일이라곤 연필로 그림 그리고 개인전을 연 것뿐이었다. 그룹전이나 단체전에도 일절 출품하지 않았다. 한국 미술계에 일찍이 있어 본 적 없는 별종(別種)이었다.
원석연의 1959년 작 <보살>을 본다. 이 그림 하나를 완성하려고 원석연은 석굴암에 들어가 두문불출하며 석 달 동안 종이에 연필로 빼곡하게 점을 찍었다. 도판으로만 봐도 입이 떡 벌어진다. 칠십 넘은 나이에 거리에 나가 한 자세로 그림을 그리다가 몸이 굳어 일어나지 못하고 꼼짝없이 길바닥에 누워 있어야 했다는 일화는 차라리 전설(傳說)이라고 불러야 하리라. 그 열정, 그 집념은 실로 경이로운 것이었다. 연필 한 자루에 온 생애를 건 화가 원석연. 그는 가장 값싸고 흔한 연필로 자기만의 커다란 세계, 우주를 창조했다. 전생에 연필과 무슨 인연으로 얽히지 않고서야 어찌.
“연필의 선에는 음(音)이 있다. 저음, 고음이 있고, 슬픔도 있고 즐거움도 있다. 연필선에도 색(色)이 있고, 색이 있는 곳은 따사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기쁨도 있다. 고독도 있고. 연필선에는 무한한 색이 있으며 보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연필화의 선은 리듬이 있고, 마무리가 있다. 그리고 생명이 존재한다. 시(詩)가 있고 철학이 있다. 선 하나하나에서 흐르는 리듬, 연필화의 선에는 우주를 뒤흔들 수 있는 힘과, 반대로 조용한 물같이 잔잔할 때도 있듯이, 선의 조화를 이룬다.”
원석연은 ‘개미 화가’로 불린다. 1960년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발표한 개미 그림으로 일약 유명해졌기 때문. 연필그림이라고 얕잡아 보면 오산이다. 원석연은 우리가 흔히 드로잉 하면 떠올리는 작은 스케치가 아니라 100호, 200호가 넘는 연필화 대작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자고로 개미는 부지런함의 상징. 근대화 달성이란 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그림 속 개미가 새 시대의 일꾼을 상징하는 존재로 인식되는 바람에 원석연의 그림은 군사 정권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기도 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KBS 아카이브에 남은 원석연의 인터뷰는 딱 한 건. 2001년 10월 아트사이드 갤러리 개인전 당시의 모습과 육성이 전부다. 작고 두 해 전이었다. 당시 화가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이룰 수 있는 그것을 끝까지 생명을 바쳐서라도 할 수 있거든요, 개미들은. 그래서 나도 한 번 개미와 같이 열심히 노력해 봐야겠다...” 이 인터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최종태씨.원석연씨 등 가을 화랑가 (KBS 뉴스광장 2001.10.15.)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249335
한 가지에 악착같이 몰두해 끝내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을 나는 원리주의자라 부른다. 그리고 그런 이를 마음 깊이 존경한다.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 하나로 세상에 큰 의미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 일관성, 그 변함없음이 나는 좋다. 원석연은 한평생 철저하게 물질의 유혹과 절연하고 살았다. 후원회를 만들어 돕겠다는 지인들의 호의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물질의 노예가 돼 세상과 타협하는 삶을 끊임없이 경계하며 오로지 그림 그리는 일에서 존재와 생의 의미를 찾았다. 죽는 날까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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