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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문화 제96호 선우풍월(扇友風月)을 읽고

석기자미술관(181) 《간송문화: 선우풍월》(간송미술문화재단, 2025)

by 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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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컬렉션 3개년 기획전의 세 번째 전시 <선우풍월扇友風月: 부채, 바람과 달을 함께 나누는 벗>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부채 그림과 글씨 133점 가운데 54건 55점을 엄선해 선보이는 자리다. 1977년 선면(扇面)이란 주제로 연 전시에서 부채 48건을 공개한 이후 처음이다. 간송미술관의 후의로 기자간담회 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귀한 부채 유물을 오래,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아울러 전시 도록 《간송문화》 제96호를 건네받아 정독하며 배움에 깊이를 더했다. 받은 고마움은 글로 보답한다. 이것이 내 철칙이다.


지난해 읽은 최고의 미술책 가운데 하나인 미술사학자 이인숙의 《선면화의 세계: 우리 부채그림의 역사와 미학》(눌와, 2024)을 읽은 것이 꼭 1년 전이다. 그리고 꼭 1년 만에 귀한 부채 그림과 글씨를 실물로 볼 기회를 얻었으니, 공부라는 것이 이렇듯 연속성이 있어야 제대로 내 것을 만들 수 있다.

지금은 문화부에서 잠시 나와 있어서 방송 뉴스를 만들 순 없지만, 만약 내가 문화부에 있었다면 봄이란 계절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서두를 열었을 것이다. 부채 그림과 글씨 그 자체만으로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어렵다. 그러니 부채 그림 중에서 봄꽃이 보이는 작품으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한 뒤에 본론에서 간송 컬렉션 본연의 가치를 부각하면 좋을 것이다. 지난번 전시 리뷰를 그렇게 썼다. 간송미술관에 가시거든 한용간의 <서호육교>와 유한지의 <도홍계촌>에서 복숭아꽃을, 정대유의 <고매신장>과 김은호의 <백매>와 유진찬의 <묵매>에서 매화를 감상해 보시기 바란다. 그림에 향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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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넘기다가 전시장에서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던 부채 그림 한 점에 시선이 머물렀다. 이번에 최초로 공개되는 이당 김은호의 <고루미인(高樓美人)>이란 작품이다. 넓고 부드러운 잎을 지닌 파초(芭蕉)를 본떴다고 해서 파초선이라 불리는 화면에 그린 작품으로, 제목처럼 높은 누대에서 밖을 내다보는 여인의 모습을 담았다. 부채 위쪽에 적힌 시는 이런 내용이다.


높은 누각에 머무는 여인, 두 눈썹 그리지 않았다네.

아름다운 용모 본래 남다르니, 머리에 바르는 기름이 어찌 있겠는가?

봄을 맞아 문득 그리움 생겨 손으로 꽃나무 가지 잡아 꺾네.

한창나이로 혼인이 늦으니 감정의 위로가 삿된 생각은 아니로다.

시집가고자 하나 좋은 중매 없어 따뜻한 봄 지나감을 앉아서 탄식한다네.


한마디로 요약하면, 노처녀의 슬픔과 외로움이다. 감상용 부채에 이런 소재를 쓰고 그린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은데, 작품 해설에도 그 연원이나 까닭을 알려주는 내용은 없다. 그저 이당이 생전에 미인도를 비롯한 여성 인물화를 즐겨 그렸다는 점에서 그중 하나겠거니 짐작할 따름이다. 게다가 그림 속 여인은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으며, 심지어 나이 든 여인처럼 뒷짐까지 지고 있으니 더 의아할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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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 출품된 또 한 점의 파초선 그림이 있으니, 베 짜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 춘곡 고희동의 <직포(織布)>다. 혹시나 해서 비교해 봤더니 두 작품의 모양과 크기가 거의 똑같다. 아마도 두 사람이 함께 활동하던 서화협회 전이나 나란히 출품하게 된 어떤 전시를 위해 미리 주어진 화제(畫題)에 맞춰 그린 게 아닌가 싶다. 이당은 노처녀, 춘곡은 노동하는 여성을 그렸다.


한동안 책 읽기에 게을렀다.

읽어주기를 기다리는 책이 그새 하나둘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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