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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Nov 27. 2019

며느리가 기억하는 화가 천경자, 인간 천경자

유인숙 <미완의 환상여행>(이봄, 2019)

세상 수많은 꽃이 있습니다. 저마다 특유의 빛깔과 향기를 뽐내는 소중한 존재들이죠. 화가들이 꽃을 그린 역사는 미술의 역사만큼이나 깁니다. 특히 꽃 하나를 줄기차게 그린 화가에게는 그 꽃의 화가란 수식어가 붙죠. 장미 하면 너나할 것 없이 으레 황염수(1917~2008)란 화가의 이름을 떠올리게 되듯 말입니다.


그렇다면 화가 천경자의 꽃은 무엇이었을까. 뜻밖에도 장미였습니다. 꽃을 유난히도 좋아했던 화가는 봄이 되면 꽃시장에 가서 갖가지 꽃의 모종을 사다가 화단에 심었다고 하죠. 이 책의 저자인 천경자의 첫째 며느리 유인숙 씨가 결혼 전 서교동 집으로 처음 인사를 갔을 때 들고 간 것도 화사한 장미꽃 바구니였습니다.


“어머니는 특히 장미를 좋아하셨다. 장미는 어머니가 그림의 소재로도 많이 쓰시는 꽃이었다.”


이미지 출처: 유인숙 <미완의 환상여행>(이봄, 2019)


화가에게는 작업실이 따로 없었습니다. 집이 곧 작업실이자 침실이 곧 화실이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방에 무릎 꿇고 엎드려 그림을 그렸습니다. 마치 옛 화가들처럼 말이죠. 상당한 육체적 피로를 수반한 까닭에 주로 오전 시간에 하루 네다섯 시간씩 규칙적으로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이 반복적인 일상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니 놀랍죠.


“어머니는 두방지를 바닥에 펴놓고 엎드려 그림을 그리시곤 했다. 어머니는 평생을 그 자세로 그리셨다. 칠십대가 되신 후 이전보다 그 자세를 힘들어하셨다. 긴 시간 무릎을 꿇고 엎드려 그리는 자세가 몸에 좋을 리 없었다. 어머니는 그림을 그리시고 나면 무릎에 물파스를 바르셨다. 하지만 자세는 바꾸지 않으셨다. 오랫동안 익숙해지신 것 같았다.”


이미지 출처: 유인숙 <미완의 환상여행>(이봄, 2019)


그런 화가에게도 예외는 있었던 모양입니다. 전시회 일정이 잡히면 오전에만 작업한다는 원칙을 깨고 종일 그림에 매달렸던 겁니다.


“어머니의 작업에 대한 열정은 놀라웠다. 새벽에 일어나 하루 종일 일을 하셨다. 원래 어머니는 오전이나 새벽에만 그림을 그리셨고, 다섯 시간 넘게 작업하시지 않았다. 그렇게 작업을 하시고 나면 쪼그린 자세로 그림을 그려서인지 어머니는 쉬고 싶어 하셨다.”


천경자의 인물화에는 모델이 있다


천경자의 모든 그림에는 모델이 있습니다. 모델 없이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하죠. 베트남 전쟁에 종군화가로 다녀온 뒤에 군인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큰아들이 군복을 입고 모델 노릇을 했습니다. 화가의 집안에선 아무 이상할 게 없는 일상이었습니다. 모델 없이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늘 가족 중 누군가가 모델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늘 사실을 근거로 그림을 그리셨다. 반드시 모델이 있었다. 모델을 통해서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셨다는 어머니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 해외 스케치 작품을 제외하면 주로 가족이 모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며느리도 예외일 순 없었죠. 유인숙 씨가 시어머니의 첫 모델이 된 건 1980년이었습니다. 2년에 걸쳐 혼신을 다해 완성한, 그래서 그 뒤로 오래도록 거실 벽에 걸어놓았던 그림 <황금의 비>. 이 그림에 대한 화가의 애착은 남달랐습니다. 절대 팔고 싶지 않다고 했다죠. 며느리는 그 뒤로 숱한 그림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특유의 신비로운 눈빛을 가진 여인으로 말입니다.


이미지 출처: 유인숙 <미완의 환상여행>(이봄, 2019)


천경자는 그림이 한군데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훗날 자신의 그림을 서울시에 기증한 것도 이런 평소의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천경자는 부탁을 받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화첩에도 그림을 그리지 않았죠.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평생 이런 원칙을 어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청탁이나 부탁을 체질적으로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자기 그림에 대한 굳건한 자부심이 있기에 그런 예술가적 고집을 지켜나갈 수 있었겠죠. 며느리 유인숙 씨의 증언입니다.


“어떤 그림을 그려달라고 주문을 받으면 그림이 안 그려진다고 하셨다. 오래전에 청와대에서 미국 대통령 부인을 그려달라는 청이 오기도 했었는데, 어머니는 이때도 정중히 거절하셨다고 했다. 또 어머니는 화첩에도 그림을 그리지 않으셨다. 앞 장에 있는 다른 화가들에게 받은 그림을 보여주면서 어머니께도 한 점 그려달라고 하면 어머니는 거절하셨다. 불가피한 경우에는 화첩이 아닌 곳에 그려주셨다.”


화가로 살아갈 운명이었을까요. 천경자에게 그린다는 행위는 곧 존재의 이유였습니다. 어린 아들의 손에서 크레파스를 강제로 빼앗을 정도로 그림으로 먹고사는 일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자기 작품에 대한 끝없는 열정은 아무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였죠. 어디에 가든 끝없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완벽하게 흡족할 때까지 그림을 매만지고 또 매만졌죠. 화가에게는 1년 365일도 부족해 보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림에 대해서 완벽주의자셨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년이고 붙잡고 계셨고, 완성시켰던 그림도 액자를 떼어내 다시 그리셨다.”


이 책에는 꽤 오랫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미인도>에 관한 이야기도 실려 있습니다. 화가 본인이 아니라면 아니다, 라는 상식적인 말이 상식이 아닌 논란의 블랙홀로 빠져 들면서 천경자는 화가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됩니다. 결국 <미인도> 때문에 절필을 선언하고, 종국에는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죠. 며느리 유인숙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머니는 <미인도>에 그려진 여자의 눈빛이 희미하고 머리의 꽃도 조잡하다고 하셨다. 일부 사람들은 귀 기울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그린 그림도 못 알아보는 사람으로 어머니를 보는 시선도 있었다. 어머니는 계속 담배판 피우셨다. 그렇게 어머니가 아니라고 하시는데 몇몇 사람들은 <미인도>가 위작이 아닌 진짜처럼, 그러니까 어머니가 그리신 그림처럼 만들어버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미인도> 논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게 되겠죠. 손톱 밑에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들러붙은 물감의 흔적. 그마저도 어느 순간 훌훌 털어버려야 했을 정도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에 회의를 느꼈을까요.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간간이 소식이 전해지곤 했던 화가의 별세 소식이 어느 날 느닷없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천경자 화백은 2015년 8월 6일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족조차 두 달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됐다고 하죠. 뒤늦게 고인의 유해가 조용히 서울시립미술관을 다녀간 뒤로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식이 열리고 추모공간이 마련됐습니다. 화가는 떠났어도 그림은 남았죠. 우리 현대 한국화의 채색화에서 이룬 고인의 업적은 눈부셨습니다.


천생 화가였던, 그리고 한 인간이었던 천경자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마치 거울 속 자신에게 말을 걸듯 “잘 있었는가” 안사를 건네던 화가. 파란만장했던 삶만큼이나 안개 속에 가려 미완으로 남은 생의 마지막 시간들. 화가로는 드물게 그림뿐만 아니라 꽤 글을 남긴 덕분에 천경자라는 한 사람의 삶은 비교적 많은 이에게 알려져 있죠.  하지만 글을 써본 일이 없어 보이는 며느리의 소박하고 어눌한 문장들 속에서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화가 천경자, 인간 천경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예술에 대해서는 지독하리만치 철저한 완벽주의자였지만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을 원만하게 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것에 서툴렀던 사람. 관계에 서투르고, 애정에 목말랐으며, 태생적으로 고독과 벗했던 사람. 이 책에서 저는 화가이기 전에 한 인간이었던 천경자를 만났습니다. 꽤 오랜 시간 화가 시어머니와 생을 함께한 며느리의 고백은 어느 순간 잊혔던 천경자라는 화가의 이름을 기억 밖으로 다시 불러냅니다.


“나는 미완성의 작품, 미완성의 인생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완성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실상 있다고 하더라도 그 완성에 큰 매력을 느낄 수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꿈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꿈을 향하여 부지런히 그림을 그리며 현실을 거짓 없이 살았다. 꿈과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곧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나는 불행하지 않다.” - 천경자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랜덤하우스중앙, 2006)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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