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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숙의 그림에서 내가 본 건 유년의 나였다!

석기자미술관(215) 학고재 기획전 《흙으로부터》

by 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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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2세 출신의 디아스포라 지식인 서경식 전 도쿄경제대 교수의 책 《나의 조선미술 순례》(반비, 2014) 뒷부분에 부록으로 실린 ‘붓질: 송현숙’을 다시 읽는다. 1951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송현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72년 간호보조원 교육을 받고 독일로 간다. 브레멘의 정신병원에서 근무하던 시절,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미술 치료 과정을 보고 미술에 관심이 생긴다. 야간 근무를 하며 대학 입시를 준비해 함부르크 미술대학에 들어간다. 서경식과의 인터뷰에서 송현숙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미술기법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도 다양한 색과 표현을 통해 자신만의 작업이 가능하다는 점을 브레멘의 정신병원에서 보았습니다. 또 그곳에서는 고향에 대한 생각을 포함해 저의 내면을 표현할 수 있다는 자극도 받았습니다.”


20250828_120804.jpg 송현숙, <붓질의 다이어그램 IV>, 2023, 캔버스에 템페라, 130×142cm
20250828_120610.jpg 송현숙, <9획>, 2024, 캔버스에 템페라, 160×115cm



1981년 대학을 졸업한 뒤 독일에 정착해 화가의 길을 걸었다. 2003년 학고재에서의 첫 한국 개인전 이후 고국에서는 2006년, 2008년, 2014년까지 네 차례 개인전을 학고재와 함께했다. 어느 전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학고재에서 송현숙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우찬규 학고재 대표가 좋은 작가라고 말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러다 최근에 와서 부쩍 송현숙의 작품에 관심이 생겼다. 이따금 전시장에서 우연히 송현숙의 그림을 보면 마음에 와닿는 무언가가 있었고, 서경식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작품 세계를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던 와중에 마침 학고재 기획전에 송현숙의 작품이 여러 점 출품돼, 아쉬운 대로 송현숙의 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얻었다. 화가를 소개한 글로는 2023년 한겨레 기사가 훌륭하다.


■“나는 농부의 딸…말로 표현 힘든 순간을 그림으로 표현하죠” (한겨레 2023-10-30)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1114244.html


20250828_120717.jpg 송현숙, <1획 위에 6획>, 2024, 캔버스에 템페라, 160×115cm



일정한 간격으로 화면 위에서 아래로 다소곳이 그어 내려간 붓질의 흔적. 그것은 고향 담양의 시골 마을에서 어머니와 누에를 기르고 명주실을 뽑던 기억에서 비롯됐다. 마당 빨랫줄에 걸린 눈부신 흰 천의 이미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뒤로 비스듬히 기운 나무가 보일 듯 말 듯 아련하게 존재를 드러내며 묘한 긴장을 자아낸다. 저 뒤엔 과연 무엇이 숨어 있을까.


송현숙은 유화 물감이 탄생하기 전에 화가들이 쓰던 템페라 기법으로 그린다. 달걀노른자에 안료를 섞은 뒤 아교에 개어 화면에 바른다. 처음엔 일정한 길이의 서양화 붓을 쓰다가 한국 붓을 써보라는 이태호 교수의 제안으로 2008년부터는 분청사기를 장식하는 데 쓰는 귀얄 붓을 사용한다. 그래서일까. 그림에 바짝 고개를 들이밀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번들거림 없는 담박한 질감이 흡사 분청사기의 무늬를 보는 듯했다. 송현숙 특유의 그 질감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20250828_120645.jpg 송현숙, <5획>, 2025, 캔버스에 템페라, 130×170cm
20250828_120751.jpg 송현숙, <5획 I>, 2023, 캔버스에 템페라, 100×100cm



‘붓질’이라는 측면에서 요즘 가장 주목받는 이가 바로 이배 작가다. 미술시장에서 워낙 인기가 좋다 보니 경매 전시장에만 가도 언제든 작품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배의 작품에서 어떤 이끌림을 느껴본 적은 없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달리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으로선 잔잔하게 스며드는 송현숙의 그림에 훨씬 더 끌린다.


송현숙의 그림에서 내가 본 건 동네 친구들과 흙 만지면서 뛰놀던 유년 시절의 나였다.


■전시 정보

제목: 《흙으로부터》

기간: 2025년 9월 13일(토)까지

장소: 학고재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50)

문의: 02-720-1524~6 / info@hakgoja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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