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227) 한국근현대미술전 《머무르는 순간, 흐르는 마음》
이름만 남은 화가가 있고, 작품을 남긴 화가가 있고, 이름과 작품을 모두 남긴 화가가 있다. 안타깝게도 나혜석은 이름만 남은 화가다. 남아 있는 작품이 별로 없고, 그마저도 일부는 진위가 의심스럽다. 나혜석은 시대를 멀찌감치 앞서간 선각자였지만, 생의 후반부를 불우하게 살다가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작품도, 자료도 없으니 나혜석 연구는 난망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란 수식어가 무색하다.
나혜석 연구에 가장 공을 많이 들이는 곳은 나혜석의 고향 수원에 있는 수원시립미술관이다. 올해로 개관 10주년을 맞은 수원시립미술관이 나혜석의 세상에 남긴 단 하나의 유품으로 일컬어지는 ‘사진첩’을 전면 공개했다. 나혜석의 사진첩은 앞서 2016년 수원시립미술관의 《시대의 선각자, 나혜석을 만나다》 전시에서 처음으로 공개됐고, 이 전시를 계기로 유족이 기증해 미술관에 소장됐다. 그리고 최근 2년 동안 미술관이 상태 조사, 보존 처리, 영인본 제작, 기초 해제 연구 절차를 거쳐 마침내 사진첩의 전모를 처음으로 대중에게 선보인다.
수원시립미술관이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여는 전시 《머무르는 순간, 흐르는 마음》은 미술관이 10년 만에 처음으로 여는 한국 근현대 미술 전시회다. 모두 네 부분으로 구성되는 전시의 첫 장 ‘한 예술가의 사진첩’이 바로 나혜석의 사진첩을 소개하는 공간이다. 사진첩에는 나혜석 본인과 가족, 주변 인물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 94장과 풍경 사진 두 점까지 모두 98장이 남아 있다.
나혜석의 사진첩에 있었던 사진은 101장이고, 사진 밑에 나혜석이 직접 쓴 사진 설명 101건이 모두 남아 있다. 사진 3장이 비어 있는 것. 심하게 흔들린 필체로 보아 글씨는 나혜석이 수전증을 앓던 시기에 쓴 거로 추정된다고. 나혜석은 자기 모습이 들어 있는 사진에는 羅(라)라는 자기 성(姓)을 썼다. 이 사진들은 남편 김우영의 일본 유학 시기부터 나혜석이 해인사에 머물던 1930년대까지 촬영됐다.
나혜석 사진만으로 꾸며진 첫 번째 전시 공간을 지나 두 번째 공간부터는 나혜석을 비롯해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박수근, 배운성, 백영수, 이중섭, 임군홍, 장욱진, 백남순, 이종우, 서진달, 이응노, 박래현, 천경자 등 화가 13명의 작품 55점을 만날 수 있다. 나혜석의 작품은 미술관의 대표 소장품으로 꼽히는 <자화상(여인초상)>(1928년 추정)을 비롯해 <김우영 초상>(1928년 추정), <나부>(1928년 추정), <염노장>(1930년대)까지 넉 점이 걸렸다.
월북하기 전 마지막으로 그리던 미완성작 <가족>(1950)을 포함해 임군홍 작품이 다섯 점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보면 볼수록 흥미롭기 그지없는 배운성의 <가족도>(1930-35)와 <모자를 쓴 자화상>(1930년대)는 특이하게도 두 점 모두 대전프랑스문화원 소장품이다. 이 가운데 <가족도>는 미술사적 의미가 커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서진달은 흥미롭게도 나혜석 사진첩에 단독 사진이 등장하는데, 전시장에 걸린 서진달의 <자화상>(1940년대)도 개성이 강해서 둘을 비교해 보는 즐거움이 있다. 서진달의 작품으로는 <나부>(1937) 한 점이 더 있다. 이종우의 인물화가 두 점, 화사한 색감이 돋보이는 백남순의 1980년대 작품이 두 점, 이응노의 드로잉과 탁본, 수묵화가 여러 점 나왔다.
마지막 네 번째 전시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박래현의 작품은 7점이다. 현재 서울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천경자의 작품은 채색화 두 점과 드로잉 석 점 등 다섯 점이 걸렸는데, 대한민국예술원이 소장한 천경자의 <여인상>(1985)이 참 좋다. 백영수의 작품 두 점 가운데서는 작은 타원형 액자가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모자>(1985)에 눈길이 간다. 일찍이 성모자상을 이렇듯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린 화가가 있었던가.
이밖에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 등의 그림은 그동안 수원시립미술관에선 볼 수 없었던 것들이라 의미가 있다. 그래서인지 추석 연휴 기간 내내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미술관을 찾은 평일 오후에도 관람객들이 꾸준히 전시장을 찾았다. 좋은 그림은 어디에 가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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