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236) 임채욱 사진전 《BLUE MOUNTAIN》
16년 동안 미술 기자로 일하면서 수많은 전시회를 취재해 뉴스로 소개했다. ‘사진’에만 한정해도 기억할 만한 일들이 많다. 스티브 맥커리, 맥스 데스퍼, 마이클 케나, 주명덕 등 굴지의 사진가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한 건 더없는 행운이었다. 하지만 내게 ‘사진’이 가진 놀라운 힘을 보여준 단 하나의 사례를 들라면 주저 없이 2021년 자하미술관에서 열린 임채욱 작가의 사진전 《블루 마운틴》(2021.4.2.~4.25)을 꼽겠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집어삼켰다. 정부의 방역 지침에 따라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문을 열고 닫기를 반복했다. 뉴스는 온통 코로나 소식으로 뒤덮였다. 다른 걸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미술 기자인 나도 헤매긴 마찬가지였다. 미술관, 갤러리가 문을 닫는데 무슨 수로 뉴스를 만들 것이며 방송에 낸단 말인가. 부질없는 일이었다.
2021년 4월, 임채욱 작가가 전시회를 한다며 나를 초대했다. 2015년 설악산 전시부터 쌓은 인연이라 당연히 가볼 생각이었다. 코로나 팬데믹 한복판이었다. 허구한 날 코로나 취재에 매달려 전시회는 언감생심이었다. 전시도 보고 인사도 할 겸 혼자서 조용히 다녀올 요량이었다. 그러다 기왕 갈 바에야 촬영팀과 같이 가서 정식으로 취재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빛으로 물든 산. 끝도 없이 굽이치고 겹쳐지는 능선들. 첩첩산중. 오직 우리 산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장엄함마저 느끼게 했다. 대둔산에서 바라본 덕유산. 다시, 덕유산에 올라 바라본 대둔산. 임채욱 작가에게 쪽빛을 처음 보여준 건 2009년 초겨울의 덕유산이었다.
쪽빛이었다. 바람 없는 맑은 겨울날, 오전 9시에서 12시 사이에만 볼 수 있다는 눈부신 쪽빛. 거기서 임채욱 작가는 마음먹었다. 푸른 산 연작을 해보자! 그래서 블루마운틴이란 이름이 붙은 연작이 탄생했다. 임채욱 작가가 포착한 쪽빛이 더없이 깊고 그윽한 건 흔한 인화지가 아닌 우리 전통 한지에 사진을 뽑아냈기 때문이었다. 사진이 아니라 한 폭의 산수화였다.
전시회 소식이 다행히 KBS 9시 뉴스 전파를 탔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뉴스를 본 사람들이 앞다퉈 전시장으로 몰려들었다. 미술관이 인왕산 중턱에 자리한 까닭에 전시를 보려면 마음먹고 산을 올려야 했다. 그런데도 관람객이 쉴 새 없이 몰렸다. 나중에 들으니, 새벽부터 지팡이 짚고 산을 오른 노인도 있다고 했다. 그 노인은 미술관이 문을 열 때까지 한 시간을 넘게 밖에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런 분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나도, 작가도, 미술관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상을 잃어버린 시절이었다. 사람을 못 만나고, 외출도 못 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답답하게 지내다가 어느 날 텔레비전 뉴스를 본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미술관을 찾았다. 숨 쉴 공간이 필요했을 게다. 조용한 위로가 절실했을 게다. 그래서 텔레비전에서 우리 산의 눈부신 쪽빛을 보곤 한달음에 달려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게다. 사진이 사람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할 수 있다는 걸 그때 나는 알았다.
그때로부터 4년 반 만에 임채욱 작가의 《블루마운틴》이 다시 돌아왔다. 다른 산 작업을 하느라 전시를 못 해온 것일 뿐, 작가는 2009년 이후 줄곧 무거운 카메라를 짊어지고 새벽 산에 올라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오래, 진심으로 산에 올랐건만, 정작 산은 쉽사리 쪽빛을 내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전시장에 걸린 사진은 무수한 노력과 수고와 실패 끝에 얻어진 값진 결실이다.
이번 전시의 백미는 지리산에서 포착한 신비로운 새벽빛을 머금은 사진이다. 임채욱 작가는 해가 뜨기 직전까지 하늘색이 변화무쌍하게 달라지는 시간에만 사진을 찍는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풍부한 색의 변화를 사진에 담기 위해 노출을 길게 해서 찍는데, 그 과정에서 먼 새벽하늘이 무지갯빛으로 곱게 물들었다. 저토록 신비로운 색의 조화를 사진에 담아낼 수 있다니. 작가는 비 없이도 무지개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이 작업으로 알게 됐다고 했다.
전시는 덕유산에서 바라본 지리산을 출발점으로, 덕유산을 한 바퀴 돌아 지리산에 이르러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는 여정처럼 꾸며졌다. 캔버스 세 개를 이어 붙여 가로 길이만 5m에 가까운 파노라마를 선사하는 <Blue Mountain 2514>는 지리산 노고산에서 멀리 남해를 바라본 풍경을 담은 대작이다. 굽이치는 능선 사이로 도도하게 흐르는 섬진강의 물줄기가 끊어질 듯 이어지며 먼바다에 이른다.
그 감흥, 그 여운을 생생하게 느끼려면 모름지기 작품 앞에 서야 한다.
전시 기간이 짧다. 서두르지 않으면 놓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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