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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네가족 Feb 26. 2020

아빠, 책 보지 말고 나봐요!

돌봐야 할 아이를 가진 덕분에 살아갈 수 있었다


아들 피터와 함께 지내면서 글을 썼던 작가 레싱은 돌봐야 할 아이를 가진 덕분에 살아갈 수 있었다고 훗날 말했다. 아이가 없었다면 1950년대 소호("그곳에는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주로 술을 마시며 자신들의 재능을 이야기했다." 레싱은 이렇게 기록했다.)의 유혹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을 테니까, 레싱은 그 대신 피터를 돌보면서 글 쓸 시간을 낼 수 있게 삶을 조율했다.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1919~2013)

영국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작가, 20세기 후반 각종 문학상을 휩쓸었고, 2007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풀잎은 노래한다, 금색 공책, 생존자의 회고록 등이 있다.


[예술하는 습관, 메이슨 카레 지음/이미정 옮김, 걷는 나무 중에서]



 [아빠, 책 보지 말고 나봐요!!]

 

 얼마 전 서점에서 아내가 좋은 책을 구석 어디선가 골랐다. 좋은 책은 베스트셀러 진열대보다는 어디 구석진 곳에서 꼭꼭 숨겨져 있다. 예술하는 습관이라는 책인데 예술가들, 작가들의 습관과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모아 놓았다. 특별히 그들의 삶 가운데 엄마이기 때문에 양육과 예술을 동시에 해야만 했던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어서 나에게는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비록 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삶을 글로써 풀어내고 싶은 브런치 작가니깐 급은 달라도 같은 부류에 속했으면 하는 소속감을 스스로 부여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지금 나의 상황이 일과 양육과 모든 것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어서 더 책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엄청난 공감과 스스로 소리도 지르면서 책을 읽어갔다.


 아들 녀석이 소파에서 나만의 세계 속에서 황홀해하고 있는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비스듬히 누워서 책을 보고 있었는데, 아들은 내 무릎에 앉아서 책을 넘어서 나랑 대화를 시도하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아들을 무릎에 앉힌 채로 책을 볼 수 있는 상황이어서 지속적으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여전히 나와 작가들을 한 소속감으로 묶으면서 말이다.


갑자기 아들이 한마디 돌직구를 날린다.

"아빠, 책 보지 말고 나봐요!!"


하필이면, 내가 읽고 있는 구절이 돌봐야 할 아이 덕분에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구절이었다. 아 더 읽고 싶은데 어떡하지?라는 생각과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게 지금 아들 덕분에 내가 살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를 외면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럴 때는 진짜 내가 뭘 원하는지 한번 더 고민해봐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순간을 후회할 수 있을 거란 생각과 내 앞에 있는 어린 아들이 계속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내 마음에서 들리는 두 마음에서 어느 쪽이 정말 내 마음인지 확인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책을 더 읽어서 잡히지 않는 세상에서 만족감을 얻을 것인지, 눈앞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실제 세상에서 만족감을 얻을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 결정에 가장 큰 도움을 준건, 역시 아들의 말 한마디다.




책 보지 말라는 말보다 더 강렬한 건 나를 보라는 그 말 한마디.

아들의 말은 힘이 있었다. 책의 글은 죽어있는 문자를 살아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지만 아들의 말은 그 착각도 공허한 세계도 아닌 실제 속에서 실제를 보여주는 강렬함과 따뜻함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 그 누구보다도 나를 가장 필요로 하고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있다는 너무나 단순한 진실 말이다.


결국 나의 시선은 책에서 벗어나서 책 뒤로 보이는 아들의 얼굴로 옮겨졌다.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그의 눈, 코, 입 그리고 머리카락, 말, 감촉, 향기(?)까지 모든 것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고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초등학교 2학년이라 어린이의 순수함과 부모를 향한 사랑이 넘쳐나는 이 시기를 놓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그 순간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시간이 있다면 책을 보거나 글을 쓰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그래서 이 시간을 확보하려고 노력을 하지만 때로는 자녀들이 이 시간을 방해하는 것처럼 느껴져 짜증이 날 때도 종종 있다. 그런데 오늘의 경험은 다시금 내가 진정 무엇을 좋아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를 사랑해주는 자녀들과의 순간을 즐기고 느끼는 것. 이것을 내가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 말이다. 독서와 글쓰기는 2순위로 밀린 듯하다. 아니 2순위로 밀렸다기보다는 1순위와 2순위가 상호보완 작용을 하는 듯하다. 독서를 통해서 나의 생각과 가치관이 이전보다 성숙해지고 그 성숙함이 현재의 삶을 더욱 즐기고 사랑하는 자세로 변화시키는 듯하다. 


독서는 나를 때로는 현실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나를 더욱더 현실로 가까워지게 한다.

그렇지만 그 경계선에서 중심을 지키는 건 오로지 나 스스로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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