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아홉수] EP.4 짬바 do it again

기회가 아닌 자격의 시대,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아니! 생존의 기록

by 김수경

19살이든, 29살이든, 39살이든. 아홉으로 끝나는 나이에 오늘 따라 유독 무게감이 느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 힙합의 태동기였던 1998년 마스터플랜, 그곳에서 처음 마이크를 잡았던 1세대 래퍼 원썬. 사람들은 그를 '밈(Meme)'으로 기억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똥통에서 기어 나오는 중인 사람'이라 부릅니다.

화려한 조명 아래 샴페인을 터뜨리는 힙합이 아니라, 낮에는 배달을 하고 밤에는 클럽 간판을 닦으며 20년을 버텨온 기록. 스스로를 '이룬 게 없는 뮤지션'이라 자평하면서도, 사실은 은퇴 직전까지 '스스로를 음악을 증명하겠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비트를 조각처럼 깎는 한 예술가, 원썬 님의 지독한 자기 객관화에 관한 내용입니다.




I. 아무도 봐주지 않던 '똥통'의 시간

아무도 안 봐줄 때, 그 시간을 어떻게 버티는지에 따라 결국 나의 전부가 드러난다고 합니다. 원썬님이 말하는 '똥통'은 실패의 공간이 아니라, 자격을 만드는 공간입니다. 20년째 그 안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Q. '똥통의 철학'이라는 비유가 굉장히 강렬한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

음악 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우리는 스스로를 어려운 상황 속에 밀어 넣는 거예요. 한 순간이라도 진심을 담아서 음악을 했다면, 결코 쉬운 길이라 말할 수 없을 거예요. 그게 제가 말하는 '똥통'이에요. 근데 거기 잠겨 있는 시간이 단순히 고생하는 시간이 아니거든요. 내 음악, 내 콘텐츠, 내 자격을 만들어가는 아주 중요한 과정이에요. 간신히 숨통이 트여서 밖으로 상반신이 드러날 때까지, 사람들은 더러운 모습의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아요. 그게 현실이죠. 그래서 그 집요한 노력이 계속되면 결국 똥통을 벗어나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올 자격이 생기는 거예요.


Q. 쇼미더머니 때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엄청난 유행어가 됐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진짜 '짬'의 실체는 뭘까요?

짬이라는 게 단순히 오래 했다는 게 아니에요. 변화무쌍한 판에서 살아남아 본 경험이에요. 아날로그 릴 테이프에 녹음하던 시절부터 지금의 스트리밍 시대까지, 그 파도를 다 맞으면서도 아직 마이크를 놓지 않은 것.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내 자리를 지키면서 '자격'을 깎아온 시간, 그게 제가 생각하는 진짜 바이브예요.


Q. 쇼미더머니 출연 당시 '악마의 편집'이나 밈으로 소비되는 것에 대해 서운함은 없으셨나요?

서운해서 뭐 합니까. 방송사도 결국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집단인데. 저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요. 제가 표현력이 부족해서 떨어진 건 사실이고, 그걸 어떻게 편집하든 제가 한 작업물 자체는 변하지 않으니까요. 떨어지고 나서 수치심이 좀 들어서 당시에는 SNS 다 끊고 일에만 몰두했어요. 그랬더니 어느 날 제가 '초특급 밈'이 되어 있더라고요. 그것조차 제가 버텨온 시간의 부가가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II. Let me do it again : 자격의 시대

천재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단, 자격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천재인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이전에 내가 자격을 갖췄는지를 끊임없이 돌아보고 결과물로 보여줘야 합니다. 자격은 준비된 자로부터 온다고 말한 원썬 님. 기회는 준비된 사람한테만 잡힌다는 걸, 이미 20년의 짬바를 거친 감각이 알고 있었습니다.


Q. 기회의 시대가 아니라 자격의 시대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기회는 모든 사람한테 찾아와요. 근데 그걸 낚아채서 내 걸로 만들 수 있는 건 준비된 자격을 갖춘 사람뿐이에요. 요즘은 힙합이 대중화 되면서 힙합에 대한 지식도 늘어나고, 실력 또한 상향 평준화가 됐잖아요. 옛날처럼 열정 하나만 가지고는 안 돼요. 기본을 몸에 익히고 자신만의 표현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아주 높은 수준의 역량이 요구되는 시대거든요. JYP나 SM 같은 기획사들도 결국 그 '자격' 있는 사람들 모아놓는 곳이고요. 그 자격이 뒷받침 될 때 대중의 시선이 꽂히는 거죠.


Q. 'Let me do it again'이라는 말 한마디가 밈이 됐지만 그 안에 진짜 간절함이 느껴지거든요. 내가 '자격' 갖추기 위한 다양한 경험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음악만 해서는 기본적인 생활이 안 되니까 보일러 기사, 목수, 인테리어 실장까지 다 해봤어요. 지금도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있죠. 알고 보면 세상에 궂은일이란 없어요. 그 마음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려 노력하죠. 그런 경험들이 저를 '잡학다식한 놈'으로 만들었고, 그 생존력이 결국 제 음악의 토양이 된 거거든요.


Q. 홍대에서 클럽 <인투딥>을 거쳐 지금까지 꽤 오랜 시간 클럽을 운영하고 계시잖아요. 그 공간이 본인의 음악과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2011년부터 1년 반 동안 매주 공연을 올리기도 했고, 지금까지 참 오랜 시간 홍대 클럽 씬을 지켜왔죠. 그게 제 음악의 소중한 소재가 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제가 운영하는 공간에서 여러 래퍼가 공연하다가 좋은 기획사를 만나 계약하는 걸 꽤 많이 봤어요. 넉살 같은 친구들이 대표적이죠. 그렇게 신진 아티스트들을 위해 교두보 역할을 해온 것도 제 자격 중 하나였다고 생각해요. 비록 홍보가 부족해서 제 개인적인 인지도는 낮았을지언정, 그 판을 유지해온 시간은 절대 헛되지 않았습니다.


III. 멈추지 않는 8톤 트럭, 1세대의 마지막 비트

20년 전 초안을 잡아둔 곡의 샘플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원썬 님. 40대 후반, 누군가는 늦었다고 하겠지만 어쩌면 지금이 가장 새로워 보일 수 있는 시기일 지도 모릅니다. 멈추지 않는 8톤 트럭처럼 정면으로 들이받겠다는 말이 꽤 오랜 시간 동안, 여운이 짙게 깔렸습니다.


Q. 올 여름에 새로운 앨범을 준비 중이시라고요. 어떤 음악을 기대하면 될까요?

붐뱁(Boom-Bap)의 근본은 지키되, 원초적인 즐거움을 주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힙합이 너무 상업화되면서 화려함만 남았는데, 저는 힙합의 본질이었던 '겸손하고 낮은 분위기'를 다시 가져오고 싶습니다. 20년 넘게 아껴둔 샘플들을 꺼내서, 제가 믿어온 방식이 충분한 자격이 있었음을 증명해보일 예정입니다.


Q. 패스(PASS)를 포기라고 표현해주셨는데, 1세대 래퍼로서 떠나는 동료들을 많이 봤을 거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스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한테 패스는 없어요. 조종 장치 고장 난 트럭처럼 그냥 가는 거예요. 55세에 은퇴해서 쉬기 전까지는 멈출 생각 없어요. 나이가 드러나기 전에, 제 안의 그 서늘하고도 뜨거운 기량을 음악으로 확실히 보여주고 싶어요. 그게 제가 이 판에 남아 있는 이유니까요.


Q. 원썬에게 '아홉수'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온실을 만드는 시기입니다. 밖이 봄이든 겨울이든 상관없이 내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구축하는 거죠. 제 나이가 이제 40대 후반인데, 외모가 더 변하기 전에 제 실력을 온전히 보여주고 싶어요. 55세에 은퇴해서 쉬기 전까지, '저 사람 자격 있었네'라는 말을 듣는 것. 그게 제 인생의 마지막 아홉수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인터뷰 내내 원썬 님은 자신을 '이룬 게 없는 사람'이라 낮추었지만, 그가 뱉는 단어 하나하나에는 20년의 세월이 응축된 단단한 뼈가 있었습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아닌, 스스로 만든 똥통에서 묵묵히 자격을 깎아온 시간. '렛 미 두잇 어게인'이라는 그의 외침은 더 이상 밈이 아닌, 다시 한번 시작하겠다는 한 거장의 진심 어린 선언으로 들렸습니다.

당신의 자격은 지금 어느 정도입니까? 혹시 기회만 기다리며 똥통에서 가만히 썩어가고 있지는 않나요? 1세대 래퍼 원썬이 건네는 이 투박한 이정표가, 당신의 막막한 오늘에 확실한 기준점이 되길 바랍니다.

작가의 이전글[마지막 아홉수] EP.3 연기를 멈출 수 없는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