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티튜드, 알롱제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뻗어주세요

by Soap

언젠가 이런 질문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신은 어디에서 쾌락을 느끼나요?‘ 각자마다 쾌락을 느끼는 순간은 다를 것이다. 그리고 쾌락을 한 번도 느끼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느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봤다. 내가 진정으로 쾌락을 느꼈던 순간은 언제일까.


고민할 거 없이 나의 쾌락은 일을 할 때이다. 더 많이 하고 싶은 내 일. 일을 할 때마다 쾌락을 느낀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안에 풍덩 빠져있을 때 가장 큰 쾌락을 느낀다. 그래서 내 일을 하지 않으면 맛있는 음식도 즐거운 여행도 나에겐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데 자꾸만 현실이 그곳에 풍덩 빠지지 못하게 만들고 나 스스로 한계를 만들게 한다. 한계는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라며 그 한계를 벗어나라는 누군가의 말을 깊이 동의한다 말하면서 결국 나도 그저 이상을 바라기만 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고 있다. 무언가 더 하지 못하게 만들고 주춤하게 만들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들어 버린다. 속상한 마음과 답답한 마음이 돌처럼 꾹꾹 쌓여가기만 하던 날들이 힘들어질 무렵 무용학원을 찾아갔다.


십 년 전 막 연영과를 졸업하고 뮤지컬 그리스 앙상블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 깃털처럼 날아다니는 다른 지원자들에게 자극받아 바로 무용학원을 찾아갔었다. 성인취미발레반으로 가는 게 맞았지만 특기로 배우려고 한다는 말에 원장님께서 나를 입시반으로 넣어주셨고 고등학생 입시반 친구들과 1년 동안 월화수목금 내내 학원을 들락날락했었다. 너무 즐거웠고 그로 인해 변화된 나의 신체와 자세 덕분에 이어서 다양한 운동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운동을 할 수 있던 것도 발레가 시작이었다. 다시 발레를 배우기로 한 첫 번째 목적은 나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운동과 동시에 몸으로 표현하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오랜만에 하는 발레는 쉽지 않지만 여전히 재밌다. 못해도 즐겁고 잘하면 더 즐겁다. 발레 자세 중에 ’ 애티튜드‘가 있다. (말로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워서 책 표지에 넣어두었다.) 한 발로 중심을 잡고 서서 다른 쪽 다리를 들어 뒤로 뻗은 채로 무릎을 살짝 굽힌다. 나는 애티튜드가 들고 있는 다리를 쭉 뻗고 있는 것보다 더 어렵다. 골반이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다리를 구부린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 상태로 발란스를 잡는 것은 더더욱. 순간적인 집중력으로 온몸의 근육을 탁 잡아서 말 그대로 ‘애티튜드’를 보여주어야 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알롱제’는 늘어지다, 길게 뻗다의 의미를 갖고 있어 구부려져 있는 다리를 뻗고 팔도 양쪽으로 끝까지 뻗는 동작이다. 그냥 가만히 애티튜드도 힘든데 또 힘을 내서 온몸을 길게 뻗어야 한다. 고무고무 인간이 될 수 있는 악마의 열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콕 박혔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더 뻗으세요. 안될 거 같지만 할 수 있어요.”


내 힘이 여기까지라고 생각해서 지금 버티는 것도 어려운데 더 뻗었다간 이마저도 다 무너질 거 같은 마음에 뻗을까 말까 망설이다 힘이 빠져 결국 뻗지 못하고 내려오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무너지면 어때-하는 마음으로 해보니 잠깐이지만 뻗을 수 있었고 그 시간들이 쌓이다 보니 점점 더 버티는 시간은 길어지더라. 당연한 이야기지만, 늘 그런 마음으로 산다고 생각하지만 순간순간 눈앞에 다가온 현실 앞에서는 나도 결국 손을 뻗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까지인가 했던 잠깐의 마음이 조금은 우스워졌다. 스스로 창피하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열심을 내봤다고 감히 그런 마음을 가져?라고 말이다. 나는 조금이라도 손을 더 뻗기 위해 힘을 내야 하는 순간이다. 나의 에너지를 더 과감히 써보지 않은 걸 잘 알면서도 스스로 연민하는 일은 너무 어리석다.


넷플릭스에 원피스 시리즈가 오픈되었다. 원피스 만화책을 다 보는 게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사람으로서 만화를 드문드문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반가웠다. 오픈이 되자마자 정주행을 했다. 해적왕이 꿈인 어린 루피를 모두가 무시한다. 넌 해적왕이 될 수 없다고. 그럼 루피는 웃으면서 말한다. 내가 될 수도 있잖아?



수배자가 된 것을 행복해하던 루피가 조금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