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을 봐야하는 이유 3가지,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 3가지
한국 넷플릭스 상반기 최대 기대작이던 <지금 우리 학교는>이 드디어 공개되었다. 좀비물을 사랑해 마지않는 나로서는 정말 손꼽아 기다리던 개봉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 프로모션 기사를 읽고, 메이킹 영상을 보며 기대감을 예열하기까지 했다. 막상 정주행을 마친 지금, 어딘가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 글에는 은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학교는>을 봐야하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학교의 높은 활용도이다.
이 작품을 연출한 이재규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껏 학교를 배경으로 한 좀비물이 많이 없었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다고. 맞다. 지금껏 학교를 주요 배경으로 하는 좀비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한 점에서, <지금 우리 학교는>은 ‘학교’라는 차별화된 설정을 잘 활용했다고 느꼈다.
교실, 방송실, 급식실, 음악실, 과학실, 체육관 그리고 운동장까지, 학교만이 가지고 있는 공간의 특수성이 좀비와 만나며 참신함이 극대화되었다. 복도 곳곳에서 마주치는 좀비가 모두 같은 학교 친구들인 절망스러운 상황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초록색 칠판, 낡은 책걸상, 핸드폰 수거함 등의 소품이 모두 극의 몰입도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
이 작품을 봐야하는 두 번째 이유는, 위기 상황에 대한 다양한 해결 방식이다.
<지금 우리 학교는> 속 주인공들은 매번 다른 방식으로 좀비를 쫓아냈고, 매번 다른 방식으로 좀비에게 쫓겼다. 앞서 언급한 배경의 매력을 잘 활용한 덕분이기도 하다. 평소 좀비물을 즐겨 보셨던 분들이라면, 이러한 변주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계실 것이다.
좀비물은 기본적으로 ‘좀비를 만난다 > 좀비를 피해 도망친다 > 숨는다 > 다시 탈출을 시도한다 > 좀비를 만난다..’로 계속해서 반복되는 무한 굴레 속에서 극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워킹데드와 같은 긴 호흡의 좀비물은,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봤던 장면을 보고 또 보는 것 같은 데자뷰가 느껴지기도 한다)
따라서 학교 안의 배경이 다채롭고 소품이 다양했던 것은 매번 다른 위기감과 탈출법을 보여주기 좋은 도구였다. 물론, 다같이 뛰어서 도망치는 게 빠를 것 같은 상황에서 꼭 누구 하나가 희생양을 자처하는 등의 답답한 상황도 꽤.. 펼쳐지지만, 이건 시나리오의 문제라기보다는 연출의 문제라고 느꼈기에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우리 학교는>을 봐야하는 마지막 이유는, 역시 한국적인 정서이다.
아무리 맛있는 햄버거와 파스타, 라멘과 팟타이를 먹어도 김치찌개 한 입을 먹었을 때 차오르는 벅찬 감동은 비할 곳이 없는 심정이랄까. 아무리 잘 만든 해외 좀비물을 봐도 채워지지 않던 리얼리티에 대한 욕구가 이 작품에서는 푸짐하게 채워진다. 외국 작품에서는 좀비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활발한 성 생활로 분출되거나 총기 사고로 이어지던데,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는 고3에 대한 수능 걱정으로 이어진다.
학부모 운영위원이 보낸 식품으로 끼니를 때우고, 고작 한 살 차이인데 선배라고 허세를 부리는 학생들의 모습이,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딱 대한민국이다. 구독과 좋아요를 외치는 유튜버, 재난 상황이 되자 유무선 통신을 끊는 정부, 그리고 5.18 이후의 첫 계엄령이라는 뉴스 속보까지. 자연스레 '한국에서 정말 좀비 사태가 발생한다면'이라는 상상을 하게 만드는 흐름이 한국인 시청자로서 만족스러운 부분이었다.
이렇게 추천할 이유가 많은 <지금 우리 학교는>이지만, 반대로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아주 명확하다.
첫 번째로는, 바로 주연 배우들의 아쉬운 연기력이다.
높은 현실감으로 극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신예 배우들을 중심으로 배역을 꾸렸다는 이재규 감독. 덕분에 풋풋한 감성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오히려 신인 배우들의 적은 연기 경력이 현실감과 몰입도를 낮추는 아쉬운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좀비로 변한 사람을 처음 마주쳤을 때도, 죽은 줄만 알았던 친구를 마주쳤을 때도 ‘지금 이게 되게 극적인 상황인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적인 연기가 거듭되었다. 친구가 좀비로 변하는 걸 지켜볼 때도, 좀비에게 집단으로 쫓겨 도망갈 때도, 그다지 다채롭지 못한 표정이 과몰입 방지턱으로 작용했다. 연기를 잘한다, 못한다라는 평가의 의미보다는, 몸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채 연기한 바가 카메라에 담겨 아쉬운 느낌이었다.
물론 회차가 거듭될수록 배우들은 캐릭터에 완전히 녹아든듯한 모습을 보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힘이 강해지는 연기인 만큼, 마지막회까지 시청한 다음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불만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작품 초반의 실망감이 옅게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었다.
두 번째 포인트가 이 작품을 추천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인데, 바로 감독의 어설픈 사회 고발 정신이다. 이 작품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사회 문제가 등장한다. 학교폭력, 왕따, 사이버 성폭력, 운영기금을 비롯한 학내 부조리, 그리고 10대 미혼모 문제까지... 청소년을 둘러싼 왠만한 사회 문제는 모조리 작품 속에 녹여버렸다.
사회적인 메세지를 담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신중해야 하는 주제를 한없이 가볍게 풀어내는 감독의 오만이다.
이 작품 속에서 10대 미혼모는 길을 걷다가 양수를 ‘주르륵’ 흘리고, 공중 화장실에서 ‘스스로’ 아이를 낳는다. 아이를 화장실에 유기하지만, 좀비 사태가 터진 것을 보고 곧 아이를 피신시킨다. 그리고 자신이 좀비로 변하는 순간까지 아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결박한다. 이 학생이나 아이가 그 후로 극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일은 없다.
감독은 이 학생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미혼모의 모성애? 비극 속에서 태어난 희망? 치킨집에서 만난 어린이를 형사가 구출하는 것만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은 충분히 나타낼 수 있지 않았나? 감독은 이 에피소드로 정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성폭력 에피소드 역시 마찬가지다. 피해 학생이 스스로 옷을 벗고 무릎을 꿇는 장면은, 그래, 학교 폭력의 잔인함을 고발하기 위한 설정이었다고 치자. 그런데 심각한 트라우마로 자살 직전까지 갔던 그 학생이 각성하고 난 뒤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이 ‘틴트 바르기’라니. 이게 무슨 황당한 경우인가. 성폭력 피해자가 힘을 얻고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이 스스로를 꾸미는 것이라니. 캐릭터에 대한 감독의 얕은 이해도가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극 초반에 여학생들은 그저 남학생 뒤에서 겁에 질린 채 서 있는 역할을 담당하고, 부족한 신체능력을 보완하기 위한 그 어떤 주체적인 노력도 하지 않는다. 좀비를 물리치고 기쁨에 차 자신을 끌어안는 남학생의 포옹을 이성적인 포옹으로 받아들여 질색하는 모습까지 보고 있자면, 이게 2022년 작품인지 2002년 작품인지 헷갈리게 되는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사회 문제를 꺼내놓기만 하는 것은 정의 구현이 아니다. 사회의 아픈면을 전시한다고 작품이 지닌 메세지가 짙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지금 우리 학교는>은 1화부터 12화까지 내내 ‘교훈이 되는’ 대사를 늘어놓지만, 그닥 ‘교훈이 되는’ 행동은 보여주지 않는다.
<지금 우리 학교는>을 추천하지 않는 마지막 이유를 가볍게 말하자면, 잔인함의 수위가 꽤 높은 편이다. 사람이 사람을 물어뜯고, 살점을 질겅질겅 씹고, 살가죽을 씹어 장기가 배 밖으로 나오는 장면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고어한 영상물을 잘 못 보는 편인 나로서는 맨눈으로(?) 보지 못할 장면들이 다수 있었기에, 잔인함에 대한 면역치가 낮은 분들은 시청에 주의하시길 당부드리고 싶다.
작품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여튼 12회까지 긴장감있게 시청한 <지금 우리 학교는>이었다. 다른 분들은 이 작품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어떤 아쉬움과 만족감을 느꼈는지 궁금해지는 밤이다. 좀비로 가득해진 세상. 어리지만 결코 여리지 않은 10대들이 치열한 사투를 벌이는, 지금 우리 학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