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노래의말들 166화 방송 후기
안녕하세요. 김숲입니다. 긴 연휴의 시작이군요. 연휴 동안 밀린 후기를 좀 써보려 합니다. 166화 방송은 원래는 개인 방송을 할 차례였는데, 가족들의 동시다발적인 병치레로 휴방 후, [플리 듣는 마음] 코너로 함께했습니다.
종종 한 가수의 가사를 집중 조명하는 특집을 진행했는데요. [플리 듣는 마음]에서 나진경 교수님과도 한번 진행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중, 열애설...을 보고 영감을 받아 잔나비의 노래로 주제를 잡아보았습니다. 교수님도 저도 처음엔 '잔나비 좋죠!', '좋은 노래 많죠'라고 생각하고 가사를 찾아봤는데요. 생각보다 시적이고 한 번에 이해되지 않는 가사가 많더군요. 분명 노래의 공감이 되는데 어떻게 말로 풀어야 할지 고민이 되는 방송이었습니다.
# 별처럼 빛나는 노래라면
잔나비의 노래에는 밤이 참 많이 등장해요. 제목에 직접 밤이 들어간 노래만 해도 '가을 밤에 든 생각', '밤의 공원',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그 밤 그 밤' 등이 있고요. 밤과 연관된 제목도 '신나는 잠', '나쁜 꿈', '새 어둠 새 눈', '꿈나라 별나라', '달' 등이 있죠. 가사는 이렇습니다.
서둘러 도망친 이곳은 밤의 공원
그대와 나의 비밀을 눈감아줄
너그러운 밤이 사는 곳
- 밤의 공원
기억은 쏟아버린 구슬처럼
밤하늘 별 이 밤도 아련하게 빛을 내니
외면할 수 있나요 바라볼 뿐
- 그 밤 그 밤
새까만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마저
불어오는 바람 따라 가고
보고픈 그대 생각 짙어져 가는
시월의 아름다운 이 밤에
- 가을 밤에 든 생각
그러다 밤이 찾아오면 우리 둘만의 비밀을 새겨요
추억할 그 밤 위에 갈피를 꽃고선 남몰래 펼쳐보아요.
-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하루하루가 참 무서운 밤인 걸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 꿈과 책과 힘과 벽
어떠신가요? 잔나비가 그리는 밤은 '더 이상 무섭지 않은 밤'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부터 안 무서웠던 것은 아니고요. 별 이나, 달이나, 우리의 비밀이나, 당시이나, 꿈으로 무섭지 않게 된 것이죠. 깜깜한 밤 하늘의 어둠이 아니라 어두워 더 빛나는 별로 시선을 옮기는 느낌입니다. 아마도 잔나비의 노래가 누군가에게는 그런 역할을 하지 않을까요? 아침이 멀게만 느껴지는 밤을 떨며 보내는 이들에게, 노래가 주는 위로는 별과 같습니다. 별의 빛이라는 것이 그리 그리 대단하지 않잖아요. 그럼에도 자리를 지켜주는 별 덕에 밤이 아름다워지고요.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힘든 시기를 보낼 때, 내 맘 같은 노래가 주는 위안이 그렇습니다.
# 청춘이여 안녕, 그리고 안녕의 거리
나교수님께서 고르신 노래는 잔나비의 '슬픔이여 안녕'이었는데요. 방송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잔나비 노래는 청춘들이 노래하는 청춘 같다고요. 그 말을 들으니 잔나비의 노래 전체가 '청춘이여 안녕'이라는 한 곡의 긴 노래 같았습니다. 밤 정도의 길이가 되는 노래요. 한 젊은이가 찌질함과 감성이 섞인 일기를 적으며 청춘의 시절을 보내주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보내 준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청춘에게 보내는 '안녕'은 어떤 안녕일까요? 안녕이라고 인사할 때도 여러 가지 '거리'가 있잖아요. 서로가 작게 보일 정도로 먼 거리에서 손을 흔들며 외치는 안녕이 있고, 작게 말해도 들릴 정도의 거리에서 말하는 안녕이 있죠. 잔나비의 노래를 듣다가 안녕의 거리를 상상해 보게 된 것은 이 시 때문입니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 中
청춘을 지나오며 젋은 시절 자신에게 보내는 '안녕'은 일제강점기, 시를 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던 시인이 자신에게 건넨 '악수'와 닮았습니다. 부끄럽고 못난 자신에게 건네는 '화해의 신호'라는 면에서요.
누군가와 싸우거나 사이가 어색해 본 적 있으시죠? 그때 며칠 말도 안 하고, 쳐다보지도 않고 지내다가 마음이 풀어져 다시 잘 지내보려고 용기 내 말한 "안녕". 평소처럼 자연스러우려 했지만 어딘가 어색한, 어색함에도 마음을 녹일 정도로 따뜻한 "안녕".
이십 대의 저를 상상하면 못나 보일 때가 많더라고요. 잘하는 것도 별로 없고, 열등감은 많고, 그래서 좀 과잉되어 나를 드러내려 했던 적도, 남을 깎아내린 적도 많습니다. 남의 작은 칭찬에도 구름 위를 둥둥 뜨는 것 같았고, 한마디 말에 상처를 받아 스스로를 괴롭힌 적도 많네요.
종종 과거에 떠밀려 사는 것 같기도 하고, 과거에 발 묶여 사는 것 같기도 한데요. 두 가지를 피하고 온전히 현재를 살아가려면, 당시엔 받아들이지 못했던 '과거의 나'와도 화해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 너도 사정이 있었겠지, 그래 앞으로 안 그러면 되지, 그래 그땐 내가 너무 내게 모질었지. 실은 열심히 했잖아. 앞으로 잘 지내보자. 악수를 건넬 정도의 거리에서, 어색하고 용감한 '안녕'을 보내며, 후기를 마칩니다.
잔나비의 노래는 아니지만, 방송 후기 끝 곡은 카더가든의 '의연한 악수'로 할게요. 좋은 밤 되세요.
카더가든 '의연한 악수'
갈 수 없는 좁은 길을 봤어요
쉼 없이 갈망하던 끝에
또 무던히 받아들여진대도
가난한 맘 몫이겠어요
난 멋진 사람이 되어
큰 등불을 켜고 나선
발길 없는 저 큰 나무 아래로
피어오른 아집들이
내려앉길 기다리다
움츠린 손에 다 덜어낼게요
난 그 사람 뒤를 따라갔지만
큰 그림자 푸념뿐인 것을
난 알아도 아는 것이 아닌데
가만히 가만히 둘까요
난 멋진 사람이 되어
큰 등불을 켜고 나선
발길 없는 저 큰 나무 아래로
피어오른 아집들이
내려앉길 기다리다
움츠린 손에 다 덜어낼게요
뒤처진 불행을
또 마주할 때 난, 오히려 더 편해요
난 멋진 사람이 되어
큰 등불을 켜고 나선
발길 없는 저 큰 나무 아래로
피어오른 아집들이
내려앉길 기다리다
움츠린 손에 다 덜어낼게요
또 무던히 받아들여진대도
가난한 맘 몫이겠어요
[166화 방송 듣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