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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Nov 27. 2020

아버님이 지고 가신 깡통 사주

운명을 인간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가? 

  나는 대체로 현실주의에 가까운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신비주의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흔히 말하는 금기, 징크스 같은 것을 우습게 알고, 더구나 미신은 경멸한다. 아파트도 남들이 기피하는 4층, 404호에 거리낌 없이 살고 있고, 이사도 일부러 손 있다는 날을 골라했지만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만족하며 살고 있다. 당연히 성명철학이나 사주 같은 것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점집이나 운명철학관 같은 곳에 가본 적이 없다. 운명보다는 사람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미신을 금지하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신앙마저도 신비적인 교리에는 관심이 적은 편이다. 

  오늘은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45번째 기일이다. 52세에 돌아가셨으니 참 수복(壽福)이 박하신 분이다. 법도 필요 없이, 덕망 높으신 시골학교 교감선생님이 그렇게 일찍 돌아가신 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가혹한 일이었다. 장남인 내가 군에 있을 때 아버님을 여의었으니까 나도 역시 복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사회에 발을 들여놓기 전부터 집안을 책임져야 했다. 그러나 이제  칠십이 코앞이니 아버님에 비하면 수복만큼은 괜찮은 셈이다. 살아온 지난날을 생각하면 수복만이 아니라 운수가 썩 좋은 편이었다. 나는 비록 현실주의자이지만 내 일생이 내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기보다는 하늘의 도우심이 컸다고 확신한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신앙심이겠지만 코웃음 치던 사주에 대한 신비스런 기억도 잊히지 않는다.

  전역을 하고 친구가 운영하는 양복점에 앉아서 한가한 시간을 보낼 때였다. 동네 마실집이었던 양복점에는 어떤 아저씨도 끼어 있었는데 사주에 대해서 잘 아는 분이라 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내 사주도 말해 보라고 했다. 심드렁했지만 심심풀이 삼아서 사주를 댔더니 대뜸 아버지가 안 계시다고 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그렇다고 했더니 내가 태어난 사주의 날짜를 고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아버님이 내 액운을 몽땅 가지고 가셔서 내 사주가 크게 개선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아버님이 돌아가지 않으셨다면 내 사주로는 깡통 차기에 바빴을 것이라고 했다. 몇 달 쉬면 교사 발령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아버님과 관계없이 깡통 팔자는 아니었겠지만 그 뒤로도 내 사주가 원래 나빴다는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도 들은 적이 있어서 그 말이 예사롭지 않았다. 허망한 미신이라고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절실했고, 내 일생을 돌아보면 하느님과 아버님의 도움이 아니라면 이루어낼 수 없는 일이 너무도 많았다. 내 능력과 노력만으로는 도저히 이 정도의 인생을 살아낼 수 없었을 것이니 아무래도 사주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나에게는 또 하나의 신기한 출생담이 있다. 나를 임신하신 어머님께서 길을 가는데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일부러 길을 막고 당부를 했다고 한다. 뱃속의 아들이 태어날 때 얼굴에 표를 찍고 나올 것이니 잘 기르라고 했다고 한다. 나중에 나를 낳고 보니 이마에 콩알 만한 검은 점이 있어서 그 예언의 신통함에 놀라셨다고 한다. 그래서 내 이름을 '성수'보다는' 점수'로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래서 시험을 보면 '점수'가 더 높아졌는지도 모르지만 그 별명이 매우 싫었다. 지금도 그 점이 밤톨만해서 커다란 컴플렉스이지만 막상 없애지 못하는 까닭은 그 예언을 무시할 수 없어서일 것이다. 이른바 '복성'이라고 하는데 성형수술이라도 했다가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를 일이다. 그 노인은 아마도 신이 들렸거나 관상을 보는 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딸 둘을 연달아 낳으신 끝에 어렵게 낳은 아들을 어려서 잃으시고, 그런 예언을 듣고 나를 낳으셨으니 어머님의 기대가 얼마나 크셨을까? 그 기대에도 불구하고 어머님께 참 불효를 많이 저질렀다. 아버님과 달리 장수하셨던 어머님은 그만큼 자식에 대한 실망과 회한도 크셨을 것이다. 살아 생전 효도하지 못하면 돌아가신 후에 후회하게 된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림이 없다.    

  아무튼 이런 일을 계기로 해서 나는 사주나 관상을 그냥 일소에 부치지는 못하게 되었다. 지금은 후회하지만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바꾸어 주기도 했다. 돈 받고 하는 작명가도 아닌 사람이 이름만 바꾸어주면 잘 살 텐데 쓸 데 없는 고집부리지 말라는 윽박을 견딜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내 이름도 아니고 아들 잘 되자는 건데 보잘 것 없는 애비 소신쯤이야 별 거랴 싶었다. 이름을 바꾼 아들의 팔자가 정말 피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이름에 과연 영험한 운명과 신통력이 담겨져 있는지는 아직도 확신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아버님께서 자식의 액운을 싸가지고 마지막 길을 가셨다는 아버님의 사랑과 하늘이 주신 내 운명이 고맙기 그지없다. 남들이야 이런 생각을 곧이 듣기 어렵겠지만 당사자인 나는 이름 모를 사주쟁이 아저씨가 신비하기까지 하다. 더구나 오늘 아버님의 기일을 맞이하니 더욱 아버님 생각이 간절하다. 아들 둘이 있었으나 둘 다 최전방 철책선에서 군 생활을 하느라고 부고도 늦게 받고, 부대에서 출발도 늦어져 임종은 물론 출상 때까지 상주노릇도 못 했다. 아버님은 수복도 없으시고, 자식복도 없으신 분이셨다. 자식이 변변치 못하여 학교 다닐 때에도 무척이나 속을 썩혀드렸다. 휴가 나와서도 친구들과 어울려 사고를 치고, 피해자에게 곤욕을 치르신 적도 있었다. 불면증과 상습적인 두통을 앓으셨는데 나는 밤늦게까지 TV를 보기 일쑤였으니 잠마저 편히 주무시지 못하셨다. 불효의 기억을 일일이 다 옮길 수 없다. 

  자식의 액운을 다 지고 가셔서 사람 구실을 하게 하셨다니 태어나고 기른 은혜를 입은 다른 자식들보다 그 은혜가 얼마나 더 큰지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늘 아버님 연도를 맞으니 단명하셨던 아버님 생각이 더 애틋하다. 돌아가신 지도 오래 되니 아버님을 잊고 살 때가 많다. 오늘만큼이라도 아버님의 사랑과 불효를 잊지 말아야겠다고 때 늦은 다짐을 해 본다.  (2020.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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