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물신주의에 의한 도덕적 타락이다.
천신만고 끝에 임용고시에 합격했지만 그것은 열망했던 등용문이 아니라 고생문이기 십상이다. 옛말에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라고 했으니 원래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 우리의 선생님은 영예로웠으되 고달픈 인생이었다. 그러니 師道를 가르치는 즐거움만으로만 생각했다면 거기서부터 잘못이었다. 그래도 옛날에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하였으니 교사는 배 고팠으나 사회적 지위와 함께 가르친다는 보람과 긍지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교사는 꿈꿔왔던 사도와는 너무 다른 현실에 비애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긍지와 권위의 인격체에서 한낱 지식의 전달자요, 입시의 기술자로 전락한 처지에 슬퍼했던 일은 이제는 차라리 그리운 추억이 되어버렸다. 교사는 교육의 주체라고 배워왔지만 현실은 이미 교육의 주체에서 보조자 하수인으로, 전문직에서 극한직업으로 밀려나 있다. 지금 교직생활에 이러구러 견뎌내고 있는 생활형 교사도 적지 않지만 사명감에 차 있는 교사일수록 소신보다는 생존수단에 급급해하고 있는 처지를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현직교사 대부분은 자괴감으로 학교를 떠날 기회만 엿보고 있다고 하니 교단붕괴가 눈앞이다.
맹자는 교육이 인생삼락(人生三樂)이라 했으니 교직생활 중 가장 보람 있는 것은 제자를 기르는 기쁨이다. 제자를 길러내는 것이야말로 필생의 목표였던 것이 우리 교사의 긍지였다. 그러나 흔히 말하던 ‘교사는 있으나 스승은 없고, 학생은 있으나 제자는 없다’라는 탄식도 행복한 일이 되어버렸다. 권위와 소신이 없는 교사가 어찌 제자를 얻을 수 있으며, 교사를 존경하지 않는 학생에 어찌 스승이 있으랴? 선생님이 늘 만나는 이웃집 아줌마 아저씨 같다면 어떻게 존경할 수 있을까? 제자를 가르치자면 권위와 실력과 애정을 가지고 있어야 하건만 한낱 직업인으로서 학생에게 수시로 평가를 받아야 하고, 학부모에게 시시콜콜 간섭을 받고, 학생에게 폭행을 당하고, 학부모에게 고발, 재판, 처벌까지 당한다면 교사의 비극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사는 교권(敎權)이 없다. 교권이란 교사의 ‘권위’이다. 권위라고 하면 전근대적인 ‘권위주의’를 경계하기 쉽지만 교사가 학생을 압도하는 권위가 없다면 교육은 성공할 수 없다. 교사가 지식이나 인격에서 모범이 되지 못한다면 배울 의욕이 생길 리 없고, 인격적으로 뛰어나지 않다면 신뢰와 존경심이 생기지 않는다. 교권이란 지식과 인격적 수범이지 결코 헛된 위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교권은 전근대적, 비민주적이라는 비난을 받기 십상이고, 교사 자신도 거기에 동조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교사는 권위의식에서 벗어나 학생의 인격과 학습권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 민주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권위가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존재가 바람직한 교사상으로 여겨지는 시대이다. 물론 그것이 인간적이고, 시대에 걸맞은 사고방식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래서는 교권은 서지 않는 법이다. 교권이 비록 교사중심의 권위의식일지 몰라도 교권이 없는 가운데에서 교육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민주적인 교육, 학생의 인격과 학습권 보장, 체벌금지, 교사 처우개선도 중요하지만 교사한테는 교권에서 나오는 존경과 신뢰가 생명이다. 과거 교권시대가 비민주적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보다 성공적이었던 교육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경제적인 번영은 그러한 결과물이다. 오늘날의 교육이 민주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실패한 교육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지금 당장 몰상식한 학부모나 교육당국에게 책임을 묻기에 바쁘지만 그것은 산불에 바가지 물로 대드는 짓과 같다.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물신주의 팽배에 의한 우리 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아야 그 치유책이 나올 수 있다.
교편(敎鞭)이란 말은 교육적 체벌에서 나온 말이다. 교사가 체벌을 하는 것은 폭력적일 수도 있지만 대개는 ‘사랑의 매’로 여겨져 왔었다. 그러나 이제 체벌은 아동학대, 인권유린이 되어 감옥을 가야하는 시대이다. 그것이 과연 인권존중이요, 민주적, 인권적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체벌을 인격적 감화로 대신한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정작 교사에게 인격적 감화란 지극히 어려운 부담이다. 바람직한 변화라고 하지만 교권과 교편을 빼앗긴 오늘날 우리 교사는 슬픈 피노키오이다. 그래서 더 많은 교사는 교실에서 인격적 감화가 아닌 무기력, 체념, 좌절, 포기도 모자라 길거리에서 생존보장을 외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용인하기 어렵겠지만 우선 교편과 교권을 세우는 것이 이 대란을 수습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요즈음 교사의 비애를 생각하면 교편을 잡다가, 교권을 누리면서 교단을 떠났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스승이 없는 시대’라고 하지만 ‘스승을 만들어 주지 않는 시대’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옛날 존경받던 스승은 자신이 훌륭해서라기보다는 스승을 만들어 준 제자가 훌륭해서가 아니었을까? 내 경우로 말하면 옛날의 제자는 아직도 연락이 닿지만 근래의 애들 소식은 듣기 힘들다. 옛날에는 스승이었고, 근래에는 꼰대에 불과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러니 스승이 잘나서가 아니라 제자가 훌륭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요즈음의 교사들이 더 뛰어난 사명감과 실력을 가지고서도 오히려 학부모와 학생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거리로 내몰리는 현실을 보면 교사의 비극이 교사로 끝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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