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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jamin Coffee Sep 02. 2021

연극, 혹은 <버드맨>

2015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기대감을 애써 누르며 영화관을 찾았다. 기대가 높아서 좋을게 없다는 걸 경험상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란 게 누른다고 눌러지는 건 아닐 터. 솔직히 말해, 기대를 잔뜩 숨긴 표정만을 겨우 남긴 채 영화를 보러 갔다. 물론, 그 아래엔 터질 듯한 기대감이 들끓고 있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경험이 모든 걸 설명해주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니. 근래에 보러 간 영화들을 다 합친 것 보다 더 큰 기대를 안고 갔지만, 늘 그렇듯 <버드맨>을 보고 기대가 꺾이긴 커녕 기대를 넘어서는 강렬한 울림을 받았다. 영화를 둘러싼 수많은 호평들이 결코 공허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영화관을 나설 때의 그 충만함을 공유하고 싶다. 


<버드맨>에 대한 호평 중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촬영’이다. 이번 87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본 사람라면 알겠지만,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는 촬영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동진을 비롯한 여러 평론가들은 <버드맨>의 ‘롱테이크’ 촬영 기법에 대해 칭송했다. 내가 무엇보다 카메라에 집중하며 영화를 볼 수밖에 없던 까닭이다. 



예상보다 카메라는 훨씬 유려했다. 카메라 워킹은 물 흐르듯 부드러웠고, 특유의 느린 듯 긴장감을 놓치 않는 리듬은 나를 압도했다. 정말로 영화는 거의 하나의 컷으로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건 물론 촬영 기술 발전의 덕택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감독의 철저한 전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예컨대, 다음 장면을 기억해보자.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 분)이 물건들을 집어던지며 대기실을 난리통으로 만들 때, 제이크(자흐 갈리피아니키스 분)가 ‘마침’ 방으로 들어온다. 리건에게 거짓말을 한 뒤 방을 나서는 제이크에게 ‘마침’ 레슬리(나오미 왓츠 분)와 로라(안드레아 라이즈보로 분)이 말을 건다. 이후 레슬리가 방으로 들어가 리건을 위로하고 다른 문으로 나온다. 그때 ‘마침’ 반대편 문에서 마이크(에드워드 노트 분)이 문을 빼꼼 연다.   



강조했듯, 여기서 ‘마침’이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이 영화는 롱테이크로 (물론 딥포커스로도) 찍혔음을 잊지 말자. 위의 장면에서 단 한 대의 카메라만이 인물들의 동선을 좇는다. 그러니까 배우와 스탭은 단 한 번에 저 모든 ‘연속적’인 상황들을 만들어야 했다. 여기선 그 무엇보다 배우들의 합이 중요하다. 사실상 영상 속의 시간과 촬영 현장 속의 시간이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침’ 일어나는 행동들의 시간차는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며, 각 인물들의 동선도 철저하게 짜여야 한다.   



일반적인 영화와 비교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리건과 제이크의 대화 이후 방을 나서는 제이크의 뒷모습을 담은 쇼트. 이후 문 밖 복도에서 레슬리와 로라의 옆모습, 그러니까 문과 그 옆에 서 있는 둘을 잡은 쇼트. 문을 열고 나오는 제이크에 말을 건다. 이후 제이크를 정면에서 담은 쇼트, 제이크는 레슬리의 옆으로 지나간다. 다시 레슬리와 로라를 잡은 쇼트. 그녀들은 제이크를 비난하고, 멀리서 아웃포커스된 제이크는 흥분한 채로 소리 지른다. 


뭐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구성에서 시간을 고려한 전략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영상의 시간은 쇼트와 쇼트들로 분절되어있고, 그건 달리 말해 쇼트와 쇼트 사이의 시간, 그러니까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는 시간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최대한 자연스레 그 시간의 공백을 메우려고 하지만(소위 ‘이음매없음’ seamless), 현명한 관객이라면 영화의 시간을 촬영현장의 시간과 동일하다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쉽게 말해, 제이크가 리건의 방을 나설 때에 맞춰 굳이 레슬리와 로라가 문밖 복도에 서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고, 굳이 레슬 리가 문 앞을 지나칠 때에 맞춰 마이크가 문을 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각각의 상황을 따로 찍고 편집으로 이어붙이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롱테이크 기법의 효과, 혹은 의도는 무엇일까. 한국 영화계에서 ‘롱테이크’하면 누가 뭐래도 홍상수가 떠오른다. 그런데 홍상수의 ‘롱테이크’와 이냐리투의 롱테이크는 그 성격이 다르다. 홍상수의 ‘롱테이크’는 철저하거나 매끄럽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투박하며 무디다. 홍상수는 그의 영화들에서 ‘데드 타임(dead time)’을 버리지 않았다. 말하자면 쓸데 없는, 혹은 서사와 동떨어진 영상을 컷(cut)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혹시 홍상수의 영화에서 지루함을 느낀 사람이라면, 잘려나가지 않은 ‘데드 타임’ 때문이리라. ‘데드 타임’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기 때문에 그의 영화에서 시간은 전면화된다. 홍상수는 결국 영화는 시간의 예술(혹은 작품)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홍상수에게 있어서 ‘롱테이크’란 어쩌면 단지 시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의 ‘롱테이크’는 자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어지는 하나의 컷이다.  



이냐리투의 롱테이크는 정반대다. 위에서 말했듯, 그의 롱테이크는 세련되고 매끄럽다. 그의 롱테이크는 시간의 연속성이 아니라, 차라리 사건의 연속성을 담보하기 위한 방식이다. 같은 롱테이크를 사용했지만, 홍상수에서 지루함을 느꼈던 사람이 이냐리투에선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카메라, 멈추지 않고 발생하는 사건들에서 시간은 오히려 사라진다. 이냐리투의 다른 영화들을 아직 못 봐서 단정하긴 이를지 모르지만, 이건 가히 이냐리투만의 ‘롱테이크’라고 부를 법하다. 그리고 나는 그만의 롱테이크를 ‘연극적’ 롱테이크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버드맨>에서 연극은 핵심적 소재다. 영화는 사실상 연극에서부터 시작해 연극으로 끝난다. 그런데 가끔 연극과 (영화 속) 일상이 혼동되는 순간이 있었다. 특히, 영화 초반에 리건이 앉은 테이블에서 연극 대본 연습을 하는 장면에선 한동안(리건이 연기 지적을 하기 전까지) 일상 대화인 줄만 알았다. 물론, 손에 들고 있는 종이를 의심하긴 했지만. 그리고 샘(엠마 스톤)이 리건에게 막말을 퍼붓는 장면에서는 마치 하나의 연극을 보는 것만 같았다. 짐작건대, 이냐리투는 연극과 영화가 중첩되는 지점을 노렸던 게 아닐까. 



그런데 <버드맨>에서 연극은 기술적인 차원에서도 영화에 침범한다. 다시, 롱테이크로 돌아와 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롱테이크는 영화를 마치 하나의 연극처럼 상연하기 위한 수단이다. 앞에서 한 얘기들을 잘 따라온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거라 믿는다. 촬영 시간과 영화 시간이 (표면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 인물의 동선이나 사물의 배치, 그리고 배우들의 합을 사전에 미리 맞춰놓고 연속적으로, 실수없이, 단 한 번에 끝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일상(혹은 현실)이라고 하기엔 사건들의 나열은 비현실적이지 않은가.(이냐리투처럼 숨가쁘고 벅찬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니 있기는 할까?) 거기다, 편집과 CG를 통해 마치 하나의 테이크로 이어진 것처럼 만든 컷과 컷 사이. 그 사이의 자연스러움에선 연극에서 막과 막 사이의 짧은 암전이 떠오르지 않는가. 


* 혹시나 버드맨에 대한 글을 이어서 쓰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댓글로나마 질문들을 던져봅니다. 영화에서 판타지적 요소들은 계속해서 제시됨과 동시에 부정됩니다. 말하자면 영화 속 판타지는 단지 리건 개인의 망상임이 드러나죠. 그런데 영화에서 유일하게 판타지 그 자체로서 나타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마지막 장면이죠. 기억이 안 나신다고요? 바로 사라진 리건을 찾아 창문 밖을 보다가 하늘을 바라보는 샘을 담은 장면입니다. 거기서 더이상 리건의 망상은 작동하지 못합니다. 거기서 리건은 아마도 죽었거나, 인간이 아니니까요(버드맨 그 자체가 되었다면요). 어쩌면 그 장면이야말로 영화에선 유일한 객관적, 혹은 또 다른 주관적 시선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유일한 그 객관적인 부분에서 영화는 내내 부인하던 판타지'만'을 보여준다는거죠. 이건 무얼 의미할까요? 


* 그리고 자세히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영화에서 유일하게 컷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리건이 자살기도를 하는 부분 이후죠. 그 전까지 거의 원테이크처럼 찍힌 영화는 그 이후 몇분 동안 떨어지는 운석, 공연장에서의 환상적 쇼트, 그리고 해안에 죽어있는 해파리 쇼트들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이후 다음 쇼트는 또 하나의 원테이크죠. 그러니까 영화는 저 짧은 쇼트들의 연결로 구성된 부분을 경계로 나뉜다고 볼 수가 있는 셈이죠. 후반부에서 리건은 죽지 않습니다. 리건이 죽었어야 영화는 깔끔하게, 완전무결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죠. 하지만 리건은 죽지 않습니다. 다만 코가 작살났을 따름이죠. 그건 또 무슨 의미일까요. 오이디푸스 이야기을 아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오이디푸스는 끔찍한 진실을 안 뒤 자살하지 않고 자기의 두 눈을 찌릅니다. 이후의 서사는 전적으로 예상치 못한, 이를테면 과잉 그 자체입니다. 찔린 눈이라는 상징 그 자체가 이후 서사를 규정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리건의 작살난 코는 오이디푸스의 찔린 눈알에 대응합니다. 그렇다면 영화의 후반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작살난 코겠죠. 그리고 실제로 그 부분에선 코 그 자체만이 외설적으로 과잉되어 나타납니다. 


* 이후 서사는 오로지 코를 위해 존재합니다. 보신 분들은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리건을 따라다니는 버드맨의 존재도 의미심장해요. 버드맨은 리건에게 위안임에 동시에 위협입니다. 버드맨은 리건에게 돌아갈 수 없는, 하지만 그 무엇보다 욕망하는 과거를 계속해서 상기시킵니다. 말하자면 버드맨은 리건에게 가닿을 수 없는 욕망을 상징하죠. 물론 여기서 욕망은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라캉이 말한 욕망입니다. 제논의 역설 중에 화살이 결코 과녁에 가닿지 못하리란 것을 증명한 게 있죠. 라캉에게 있어 욕망이란 그런 것입니다. 결코 성취될 수 없는 것, 하지만 무엇보다 원하는 것. 리건에게 버드맨이란 존재는 오이디푸스적 욕망인거죠.


* 아, 그리고 중간에 트위터나 페북 운운하는 장면에서 sns의 폐해를 떠올리신 분이 있을진 모르겠는데 과연 그럴까요. sns로서 존재하는 현대인들은 이상한걸까요. sns과도 같은 매개체는 존재의 기반입니다. 다만 그게 편지, 면대면 대화 혹은 전화, 가까이는 이메일에서 sns로 바뀐 것 뿐이죠. 문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출처: https://byulnight.tistory.com/135?category=630546 [Byul Night, 세상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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